
낙선재의 ‘낙선樂善’은 ‘선을 즐긴다’는 뜻이다. 우리는 낙선재를 하나의 건물로 알지만 석복헌, 수강재는 물론이고 상량정, 한정당, 취운정과 각종 화초, 석물, 굴뚝으로 자연 경계를 이룬 화계도 모두 낙선재 권역이다. 낙선재의 본래 이름도 ‘낙선정’이었다. 낙선재의 정문인 장락문을 들어서면 정면 6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본채가 보인다. 좌측에는 돌출한 건물이 있어 누마루가 되고 그 뒤에는 온돌방, 대청, 다락방, 툇마루 그리고 각 공간을 연결하는 쪽마루가 있어 공간 이동과 구성이 매우 효율적이다. 이 건물이 의미가 있는 것은 궁에 지어진 유일한 양반가 주택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단청도 없다. 하지만 왕이 머물면서 위엄과 화려함, 왕실을 상징하는 장식이 더해졌다. 창호에는 ‘만卍, 아亞, 정丁’자 모양의 살에 당초무늬, 마름모고리무늬 등 다양한 장식을 추가해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누마루와 온돌방 사이에 설치된 만월문은 섬세한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건물 자체뿐 아니라 왕과 왕족들의 침전과 생활 공간으로 사용된 역사성도 높아 2012년 보물 제1764호로 지정되었다.
불과 100여 년 전까지 왕실이 존재했고 그 후손이 30여 년 전까지 생활했던 공간인 낙선재는 역사의 한 부분이다. 특히 덕혜 옹주 이야기는 안타까움을 준다. 고종이 환갑을 넘어 얻어 너무나 귀여워한 옹주는 일본에서 정신 분열증으로 병원에서 지내다 1962년 귀국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영친왕, 이방자 여사와 지내며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내다 1989년 4월21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방자 여사도 상심해서일까, 불과 열흘 뒤 세상을 떠났다. 덕혜 옹주가 정신이 맑을 때 썼다는 글이 있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그렇게 역사의 한 페이지는 덮였다.
[글 장진혁(프리랜서) 사진 문화재청국가문화유산포털, 위키피디아]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758호 (20.12.15)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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