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선재 樂善齋-조선 왕실 후손의 마지막 거처

2020. 12. 12.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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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는 500년을 지속하며 수많은 유물과 건물, 문화, 이야기를 한반도에 남겼다. 서울만 해도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창경궁, 종묘 등과 함께 근교에 다수 왕릉이 잘 보존된 사례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기적 같은 일이다. 물론 일제 강점기, 한국 전쟁, 개발 시대를 지나면서 파괴되고 훼손되고 변형된 것도 다수지만, 서울에서 조선 왕조의 흔적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창경궁과 창덕궁 사이에 건물 몇 채가 있다. 바로 낙선재다. 원래 창경궁 부속 건물이었지만 현재는 창덕궁 권역이다. 낙선재는 1847년 헌종이 사랑하는 후궁 경빈 김 씨를 위해 특별히 지었다. 후계를 이을 왕자를 보는 것이 급했던 헌종은 낙선재에 주로 머물렀고 경빈 김 씨는 그 옆 석복헌에, 그리고 헌종의 할머니 대왕대비 순원 왕후도 낙선재 권역에 머물렀다. 하지만 헌종은 낙선재를 짓고 불과 2년 뒤인 1849년에 세상을 떠났다. 왕이 죽으면 후궁은 궁을 떠나는 법. 경빈 김 씨가 낙선재를 나온 뒤 낙선재는 빈 건물이 되었다.

낙선재에 사람의 온기가 다시 깃든 것은 고종 때다. 고종은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이곳을 집무실로 사용했고 뒤를 이은 순종이 1907년 이곳을 침전으로 사용했다. 순종이 승하하고 황태자 영친왕이 사용하다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나자 또 빈 건물이 되었다. 광복 후, 조선 왕실은 더 이상 명맥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4.19혁명 후 정릉 인수재에 머물던 순종효 황후가 낙선재로 돌아와 기거했다. 그러면서 낙선재 본채에는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가, 석복헌에는 순정효 황후가, 수강재에는 고종이 사랑한 덕혜 옹주가 머물러 왕실 후손들이 ‘궁 생활’을 이어 갔다. 이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면서 낙선재는 영원히 빈 건물로 남게 되었다. 2005년 영친왕의 아들 이구, 즉 조선 왕조의 마지막 세손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빈소를 이곳에 설치해 조선 왕실 최후의 빈소로 기록되었다.

낙선재의 ‘낙선樂善’은 ‘선을 즐긴다’는 뜻이다. 우리는 낙선재를 하나의 건물로 알지만 석복헌, 수강재는 물론이고 상량정, 한정당, 취운정과 각종 화초, 석물, 굴뚝으로 자연 경계를 이룬 화계도 모두 낙선재 권역이다. 낙선재의 본래 이름도 ‘낙선정’이었다. 낙선재의 정문인 장락문을 들어서면 정면 6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본채가 보인다. 좌측에는 돌출한 건물이 있어 누마루가 되고 그 뒤에는 온돌방, 대청, 다락방, 툇마루 그리고 각 공간을 연결하는 쪽마루가 있어 공간 이동과 구성이 매우 효율적이다. 이 건물이 의미가 있는 것은 궁에 지어진 유일한 양반가 주택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단청도 없다. 하지만 왕이 머물면서 위엄과 화려함, 왕실을 상징하는 장식이 더해졌다. 창호에는 ‘만卍, 아亞, 정丁’자 모양의 살에 당초무늬, 마름모고리무늬 등 다양한 장식을 추가해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누마루와 온돌방 사이에 설치된 만월문은 섬세한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건물 자체뿐 아니라 왕과 왕족들의 침전과 생활 공간으로 사용된 역사성도 높아 2012년 보물 제1764호로 지정되었다.

불과 100여 년 전까지 왕실이 존재했고 그 후손이 30여 년 전까지 생활했던 공간인 낙선재는 역사의 한 부분이다. 특히 덕혜 옹주 이야기는 안타까움을 준다. 고종이 환갑을 넘어 얻어 너무나 귀여워한 옹주는 일본에서 정신 분열증으로 병원에서 지내다 1962년 귀국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영친왕, 이방자 여사와 지내며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내다 1989년 4월21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방자 여사도 상심해서일까, 불과 열흘 뒤 세상을 떠났다. 덕혜 옹주가 정신이 맑을 때 썼다는 글이 있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그렇게 역사의 한 페이지는 덮였다.

[글 장진혁(프리랜서) 사진 문화재청국가문화유산포털, 위키피디아]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758호 (20.12.15)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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