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인정할 용기" 사법부·입법부에도 닿기를

한겨레 입력 2020. 11. 20. 17:36 수정 2020. 11. 20.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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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미의 TV 새로고침][황진미의 TV 새로고침] SBS '날아라 개천용'

“이거 실화냐?” 수원 노숙 소녀 살인사건, 익산 약촌오거리 살인사건, 삼례 나라슈퍼 3인조 사건. 다들 이름은 들어봤을 것이다. 그런데 알았는가. 이들 사건의 변호사가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날아라 개천용>은 재심사건을 다룬 드라마로, 실화의 비중이 매우 높다. 어쩌면 지난해 방송된 <닥터 탐정>과 비견할 만하다. 진지한 사회문제를 담은 실제 사건을 다루면서 장르물의 형식을 취한다. 또한 소재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갖췄지만, 드라마를 써본 경험이 없는 신인 작가를 과감하게 기용한 <에스비에스>(SBS) 드라마라는 공통점이 있다.

극 중 박삼수(배성우) 캐릭터는 탐사보도 전문 기자 박상규를 모델로 삼는다. 그는 이 드라마의 작가이기도 하다. 박삼수의 독특한 개인사는 박상규 기자에게서 왔다. 모니터 생산 공장의 비정규직 출신에 블로그를 운영하다 인터넷 언론사 기자가 된 것은 물론, 엄마에 대한 묘사까지 실화다. <이게 다 엄마 때문이다> <똥만이> 등에는 그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겨 있다. 박태용(권상우) 캐릭터는 박준영 변호사를 모델로 삼는다. 완도의 장의사 아들, 사춘기의 방황과 가족사, 수원에서 ‘국선 재벌’ 변호사로 활동하다 노숙 소녀 살인사건을 계기로 재심 전문 변호사가 된 사연이 <우리들의 변호사>에서 밝힌 삶과 일치한다. 재심사건 승소로 성공을 꿈꿨지만, 돈 안 되는 일만 들어와 파산에 내몰린 것이나, 마이너스 1억원 통장을 가진 것 등도 모두 실화다.

이들의 인생사도 놀랍지만, 재심사건들이 품은 어이없음이 진심으로 놀랍다. 경찰이 고문으로 사건을 조작해 사회적 약자를 범인으로 만드는 것은 영화 <살인의 추억> <7번방의 선물> 등에서 보던 바다. 그러나 검찰이 자백하는 진범을 풀어주고 조직적으로 은폐했다는 이야기는 악의적인 농담처럼 들린다. 그런데 실화다! 강도사건 피해자가 누명을 쓴 가짜 살인범들에게 미안함을 느껴 진범을 찾으러 나서고, 거짓 자백하는 가짜 살인범이 불쌍해서 진범이 눈물을 흘렸으며, 뒤늦게나마 진실을 밝혔다는 휴먼스토리도 모두 실화다. 심지어 누명을 쓴 발달장애인이 어릴 때 겪은 엄마의 자살 사건도 실화다. 픽션이라면 지나치게 선정적이고 신파적이라며 비난받았을 묘사가 모두 실화라니, 현실의 기막힘에 가위가 눌릴 지경이다. 탐사보도 프로그램이 미처 담아내지 못한 곡진한 사연들이 드라마의 형식을 통해 무람없이 쏟아진다.

드라마에는 재심의 어려움이 잘 나온다. 재심은 사법부 확정판결에 대한 예외적인 구제조치로, 주로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이나 과거사정리위원회의 도움으로 이루어진다. 일반 형사사건의 경우 재심청구 자체가 힘들다. 확정판결을 뒤집을 만한 증거가 있어야 청구할 수 있다. 증거는 대개 검경에 있지만, 변호사에겐 공권력을 조사할 권한이 없다. 검경의 협조도 기대하기 어렵다. 과거 잘못을 인정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사법부도 재심을 원치 않는다. 자신과 동료의 잘못이 파헤쳐지는 것을 꺼리는 탓도 있지만, ‘법적 안정성’이 훼손되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드라마에는 코믹하고 정형화된 악역도 등장하지만, 보수적인 사법부 시스템 자체가 재심을 막는 가장 큰 산이라는 느낌을 적절히 준다. 더욱이 누명을 쓴 사람들은 가난하고 못 배운 이들이다. 수임료를 기대할 수 없는데다 고생은 몇배인 재심사건을 반길 변호사도 없다. 정치적인 사건도 아닌 일반 형사사건 재심은 대중의 관심을 끌기도 어렵다.

이런 어려움을 뚫고 박준영 변호사와 박상규 기자가 의기투합해 재심 승소와 사회적 관심을 끌어냈다. 두 사람은 2016년 ‘하나도 거룩하지 않은 파산 변호사’ 스토리펀딩을 진행하여, 약 5억7천만원을 모금했다. 인터넷에는 당시 연재한 ‘재심 시리즈 3부작’이 남아 있다. 이들의 기적적인 성공은 찬사와 존경을 받을 만하지만, 박상규 작가가 재현한 두 주인공의 이미지는 정의로운 영웅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공명심과 물욕 앞에 자주 흔들리고 곧잘 비굴해지는 속물에 가깝다. 다만 측은지심과 잡초 같은 자긍심으로, 소외된 이웃을 내치지 않고 결정적인 순간에 나쁜 선택을 하지 않는다. 이런 선택이 이들을 숭고하게 만든다.

드라마는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그토록 독지가를 원했던 변호사에게 도움을 준 것은 펀딩에 참여한 1만7천여명의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대중의 십시일반으로 ‘돈이 정의인 세상에서, 정의가 돈이 되는 세상’에 한발 다가간 것이다. 이는 귀족의 후원을 받던 예술가가 대중에게 작품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근대를 맞이한 것에 비견할 만큼 급속한 매체 환경의 변화를 암시한다. 일시적인 펀딩이 아니라, 미국의 ‘이노센스 프로젝트’와 같은 재심을 돕는 공익적 단체와 기금이 만들어진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지나치게 조건이 까다롭고, 한번 기각되면 같은 사유로 다시는 청구를 할 수 없는 재심제도를 바꾸기 위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사형 집행 반대의 이유로 빠지지 않는 것이 ‘오판의 가능성’이다. 단지 이론적 차원의 가능성이 아니라, 실제로 오판이 일어난다는 사실이 재심사건을 통해 증명된다. 그동안의 수사 및 재판 관행상 얼마나 많은 오판이 있었을지 냉정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잘못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잘못을 바로잡는 용기”라고 박준영 변호사는 말한다. 부디 이 말이 사법부는 물론이고 법을 바꿀 수 있는 입법부에 가닿기를 소망한다.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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