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희·박상영의 우리 뭐볼까?] <연년세세> - 황정은

김세희 작가 박상영 작가 2020. 10. 9.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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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비슷하지만, 다른 누구와도 같지 않은

1946년생 ‘순자’씨의 삶
‘이순일’이란 호적상 이름
놔둔 채 왜 그렇게 불렸나
물으면 이렇게 답할지도
“우리 때는 많이 그랬어”

버지니아 울프의 장편소설 <등대로>에는 램지 부부가 등장하는데, 나는 그 모델이 작가의 부모라는 걸 알고 무척 놀랐다. 먼저 이토록 세련된 소설의 주인공이, 섬세하고 예술적인 인물들의 모델이 자기 부모라는 게 놀라웠다. 내 부모님의 삶을 떠올릴 때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한국적인 풍경, 정서와는 참으로 거리가 멀었으니까.

김세희 작가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인공이 부모라는 건, 작가가 소설 안에서 그들이 ‘되기’로 결심했다는 뜻이다. 부모님에 ‘대해서’ 쓰는 것과, 부모님이 ‘되어’ 쓰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작가는 소설 안에서 주인공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끌어나간다. 그러니까 울프에게 자신의 부모는 그만큼 문제적인, 그리고 매력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되어 그들의 삶을 살 만큼.

지난달 출간된 황정은 작가의 연작소설 <연년세세>를 읽으며 이때와 비슷하고도 다른 놀라움을 느꼈다. 이 책은 네 편의 소설로 이뤄져 있다. 어린 시절 ‘순자’라고 불렸던 이순일과 두 딸의 이야기가 큰 줄기를 이룬다. 처음 실린 단편은 차녀 세진이 중심인물이고, 두 번째 이야기는 장녀 영진이 중심인물이다. 세 번째 이야기 ‘무명無名’에서는 그들의 엄마 이순일이 등장해 직접 살아온 내력을 들려준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외할아버지에게 맡겨져 고된 노동을 하며 자란 일, 고모네 집에서 식모살이 하다 동명의 친구 순자의 도움으로 도망친 일 등등.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사는 동안 순자, 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자주 만났”고 “순자가 왜 이렇게 많을까?” 하는 질문에서 이 책이 시작됐다고 밝혔다. 이순일의 경험은 우리 할머니들, 먼 친척들이 겪었을 법한 일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녀의 사연이 비슷하지만 다른 누구와도 같지 않은 한 인물의 삶으로 강렬히 와닿는 독서 경험을 했다. 또한 딸들의 시선으로 간접적으로 재현되던 이순일이 주인공이 되어 직접 입을 열고 말하는 데서 오는 전율이 있었다.

작가는 <무명>을 1946년생 순자씨를 인터뷰해서 썼다고 한다. 작가가 한 인물의 사연을 듣고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기까지, 그사이의 시간을 떠올려보았다. 어떤 인물의 이야기를 들을 것인가. 어떤 인물의 삶을 살 것인가. 그 마음을, 관심과 애착과 노력을 생각해보았다. 모든 일의 시작은 그 마음이겠지. 그것이 있어야 사연과 소설을 잇는 플롯을 궁리해낼 수 있을 것이다.

내게 플롯은 ‘어떤 이야기를 만들 것인가’라는 의미다. 어느 하루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 어느 사건, 어느 갈등에 중점을 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갈 것인가. 플롯이 너무 강하면 쉽게 요약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된다. 플롯이 너무 희미하면 이게 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어진다.

황정은 소설의 플롯은 극적이지 않다. 두 번 세 번 읽어야 사려 깊은 플롯의 윤곽을 알아차리곤 한다. 삶의 복잡함을 그대로 담아내면서 이야기로서 최소한의 테두리를 만드는 플롯이라고 생각해왔다. 이 책을 읽으면서는 그 자체로 삶을 존중하는 형식으로서의 플롯, 이라는 생각을 했다. 차마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일, 차마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을 품은 채로, 그럼에도 자신의 자리에서 자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 플롯 안에 담겨 있다.

소설을 다 읽을 즈음, 엄마의 개명 전 이름이 ‘숙자’라는 사실이 퍼뜩 떠올랐다. ‘순자’와 받침 하나 차이다. 어릴 때부터 외가에 가면 친척 어른들이 모두 엄마를 ‘숙자’라고 불렀고 지금도 엄마는 고향에 가면 ‘숙자’가 된다. 궁금증이 생겨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이름을 바꿨는지 묻자, 놀랍게도 엄마는 개명한 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호적상 이름은 처음부터 지금과 같았다는 것이다. 엄마가 성인이 된 뒤 직접 개명한 줄 알고 있던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그럼 호적에 그렇게 올려놓고 왜 숙자라고 부르는데?” 글쎄, 라고 말하며 엄마가 웃었다. “그냥 그랬는데? 우리 때는 많이 그랬어.”

전화를 끊고 생각해보니 순자씨도 그랬다. 호적 이름은 처음부터 순일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이 책에 대해 설명하고, 다음에 만날 때 주기로 약속했다. 자신처럼 두 개의 이름을 지닌 순자씨의 삶을, 엄마가 어떻게 읽을지 궁금하다.

■서서 먹는 밥

밥상 앞에 함께 앉지 못하고
아궁이 앞에 서서 밥 먹던
이 세상 수많은 순자들의 꿈
“내 아이들이 잘 살길 바랐어
잘 모르면서 그 꿈을 꿨다”

평소 나는 말이 많고 정신이 없는 편이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부에는 어김없이 ‘주의 집중력이 모자라다’와 같은 표현이 들어가 있으며, 집중 시간이 짧아 글을 쓸 때도 앉은 지 십분만 지나면 좀이 쑤시고 유튜브며 여러 영상을 찾아보기 일쑤다. 강의를 들을 때도 나도 모르게 다리를 덜덜 떨고 있으니, 병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박상영 작가

이토록 산만하기 그지없는 내가 하루 중 유일하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분하게 앉아 있을 때가 있는데 바로 먹을 때이다. 음식을 앞에 둔 나는 마치 미사를 집도하는 신부처럼, 백팔배를 올리는 스님처럼 경건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먹는 것에 집중한다. 다른 곳도 아니고 유독 밥상에서만 왜 이런 태도를 가지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니 밥상머리 교육에 엄격했던 부모님 덕분인 것 같다.

식사 예절과 관련해 특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아마도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시절, 나는 (지금과는 사뭇 다르게) 밥 먹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꼬마였다. 잠시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식탁 앞에 서서 밥 한 술을 먹고 도망다니고는 했다. 그런 나를 보며 엄마가 해줬던 이야기가 있다.

“상영아, 너 서서 밥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몰라.”

“죽어.”

“거짓말.”

“진짜야. 어릴 적에 엄마네 먼 친척 언니가 우리 집에 식모살이를 했었어. 그 언니가 매일 너처럼 서서 밥 먹었는데 갑자기 죽었어. 이유도 없이.”

그날 이후로 나는 무조건 식탁 앞에 앉아 밥을 먹는 아이가 되었으며 식모살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고, 누군가의 삶이 어느 순간 단절될 수도 있다는 ‘죽음’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황정은 작가의 연작소설 <연년세세>의 주인공 이순일은 전쟁통에 부모와 헤어져, 외할아버지와 함께 살다 결국 고모 집에 보내져 식모살이를 하게 된다.

십수명이나 되는 가족들의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심지어는 식구들과 같은 반찬을 먹지도 못했던 이순일의 삶. 고된 노동을 버티지 못해 꿈을 안고 고모네 집에서 도망쳐 나왔지만 결국 다시 끌려갈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삶, 그러니까 식모살이.

친척 언니가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뒤로, 농사일이 바쁜 외조부모님을 대신해 중학생이었던 큰이모가 외가의 살림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 “우리 언니가 중학교까지만 나왔어도 대통령이 됐을 사람인데.” 엄마는 아직도 입버릇처럼 이런 말을 한다.

물론 그러는 엄마 역시도 스무살, 가장 꽃다운 나이에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다른 지역에 사는 자신의 친오빠(즉 나의 외삼촌)의 집으로 가 살았다. 외삼촌이 운영했던 사업체에서 일하며, 일이 바쁜 외숙모를 대신해 외삼촌네 살림까지 챙겼다. 갓난아이였던 외사촌들을 씻기고 입히고, 학교에서 사고를 치고 돌아온 조카 때문에 담임선생님 앞에서 고개를 조아렸던 것도 엄마였다. 그렇게 근근이 모은 돈으로 서른이 다 된 나이에 간신히 대학을 진학할 수 있었으니, 그녀는 행운이었다고 해야 할까?

소설 속 순일은 결혼을 하기 위해 서류를 떼기 전까지 자신의 본명인 ‘순일’ 대신 ‘순자’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살아왔다. <연년세세>는 황정은 작가가 살면서 만난 이 세상의 수많은 순자들로 말미암아 순자를 위해 쓰인 책이라고 한다. 소설 속 이순일은 자신을 삶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아이들이 잘 살기를 바랐다.

끔찍한 일을 겪지 않고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랐어.

잘 모르면서 그 꿈을 내가 그 꿈을 꾸었다.

잘 모르면서.”

책을 읽는 내내 자그마한 아궁이 앞에 서서 허겁지겁 밥을 먹는 ‘순자’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순자들이 정체를 알지 못하는 행복을 위해 아궁이 앞에 서서 밥을 먹어 왔고, 먹고 있고, 또 먹을 것인가 생각하니 자꾸만 누가 심장에 날카로운 돌을 던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김세희 작가 박상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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