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로 돌아온 ‘가황’ 나훈아, 피습부터 루머 해명까지 파란만장 54년 돌아보니

김지혜 기자
가수 나훈아. ‘나훈아 드림 콘서트’ 포스터

가수 나훈아. ‘나훈아 드림 콘서트’ 포스터

다시, 나훈아다. ‘가황(歌皇)’ 나훈아가 30일 KBS 추석 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비대면 공연으로 15년 만에 방송에 출연한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지친 국민들을 위로하고 다시 한번 힘을 내자는 취지로 마련된 만큼 나훈아는 출연료 없이 공연에 임했다. 지난 23일 열린 비대면 공연은 단 1000명에게만 온라인 방청권이 주어졌고, 세계 각국에서 신청이 쏟아져 서버가 한동안 다운되기도 했다. 방송에 공연다운 실감을 더하기 위해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는 심지어 다시보기 서비스도 제공하지 않는다. 방탄소년단급 티켓 파워를 자랑하는 ‘가황’의 공연을 볼 기회는 이토록 귀하다.

나훈아의 TV 귀환과 함께, 옛 경향신문 지면을 통해 그의 음악 인생 54년을 돌아봤다. ‘사랑’ ‘영영’ ‘무시로’부터 최신곡 ‘테스형!’까지 주옥 같은 명곡들만큼이나 눈에 띄는 건 천생 ‘스타’답게 그가 몰고 다닌 각종 사건·사고 목록이다. 그중 오래도록 인구에 회자된 몇몇 사건들의 기록을 다시 들춰봤다. 나훈아의 앳된 얼굴이 담긴 옛 기사들을 읽다보면 그가 시대를 휘어잡은 막강한 ‘대스타’였다는 사실이 새롭게 피부에 와닿는다. 남진·나훈아 라이벌전으로 번진 피습 사건부터, 거듭된 결혼과 이혼, 황당한 헛소문과 패기 넘치는 기자회견까지 파란만장했던 나훈아의 54년을 톺아본다.

■1972년 6월4일 나훈아 피습 사건

1972년 7월7일자 경향신문

1972년 7월7일자 경향신문

1972년 7월7일자 경향신문에는 “나훈아 피습, ‘정확한 결론’ 호소”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 따르면 “가수 나훈아군은 지난 6월4일 밤 서울 시민회관에서 공연 중 무대에 뛰어오른 한 청년에게 술병 등으로 크게 부상을 입”었다. 25세 때의 일이다. 이날 기사는 한국연예인협회가 “석연치 않은 나훈아군 피습사건의 명확한 종결을 희망한다”고 관계 당국에 진상규명을 호소하는 내용이 중심이 됐다. 그 이유인즉, “나군측에서는 이 청년의 단독 범행이 아니고 계획된 테러라고 주장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이후 범인 김모씨가 경찰에 검거되면서 사건은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2년이 흐른 뒤, ‘나훈아 피격 사건’은 ‘남진 배후설’과 함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전국을 뜨겁게 달군 가수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전이 불씨가 됐다. 남진이 라이벌 나훈아에 대한 살인을 사주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돌기 시작한 것이다.

나훈아를 피습한 김씨는 실제로 비슷한 주장을 한 적이 있다. 1974년 1월23일자 경향신문에는 “가수 나훈아씨를 깨진 유리병으로 찔렀던 김모씨(28)가 다시 가수 남진씨를 협박한 혐의로 서울 중부서에 구속됐다”는 기사가 실렸다. 기사는 “나훈아씨를 찔러 1년6개월을 복역한 김씨는 출감한 뒤 남진씨를 찾아가 ‘나훈아를 찌른 것은 라이벌인 네가 시켜서 했다고 세상에 폭로하겠다’고 말해 4차례에 걸쳐 8만1500원을 갈취해갔다”면서 “김씨의 행패에 견디다 못한 남진씨의 신고로 경찰에 잡혀온 김씨는 ‘돈이 궁해 한 짓’이라고 진술했다”고 전했다.

1974년 8월31일자 경향신문

1974년 8월31일자 경향신문

그렇게 김씨는 다시 구속됐지만 소문은 일파만파 퍼졌다. 1974년 8월31일자 경향신문에는 “나훈아 피습사건에 가수 남진군이 관련됐다는 설이 사건 발생 2년이 지난 요즘 가요계에서 새삼스럽게 거론되고 있다”면서 한국연예인협회 가수분과위원회 박일호 위원장이 남진을 불러 캐묻는 모습을 공개했다. 부산 공연 도중 조사를 받기 위해 상경한 남진은 “누군가 나를 모함하기 위해 거짓 정보를 제공한 것 같다”면서 “재론할 가치조차 없다”고 잘라 말했고, 박 위원장은 “만일 남진군이 이 사건에 관련됐다면 제명 처분 등 강력 조치를 내리겠다”고 못박고, “그러나 아직은 남진군이 관련됐다는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남진 대 나훈아 라이벌 구도가 강력했던 시절이었기에 벌어진 해프닝이지만, 이 소문은 5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최근까지도 심심찮게 거론되곤 한다. 지난해 6월 MBC <라디오스타>에 출연한 남진은 수십년 전 소문에 대해 또다시 해명해야 했다. 남진은 “당시 의혹이 커져 검찰에 소환됐지만 5분 만에 풀려났다”면서 “몇십 년이 지나서 사실을 알았다. (나훈아를 피습한) 괴한이 고(故) 신성일 선배한테 제일 먼저 갔고 저한테 왔던 것이었다. (괴한이) 나중에 저희 (전남) 목포 집에 와서 방화도 하고 그랬다”고 말했다.

■1982년 5월6일 나훈아·김지미 이혼하다

1976년 7월10일자 경향신문

1976년 7월10일자 경향신문

인기가 절정에 올랐던 1976년, 나훈아는 당대 최고 여배우 김지미와 결혼을 발표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1976년 7월10일자 경향신문은 “여배우 김지미(37)가 7살이나 연하인 가수 나훈아(30)와의 결혼을 선언했다”고 보도했다. 기사는 “전날 저녁 이들은 ‘처음으로 양가의 부모들이 대면한 자리에서 결혼을 승낙받았다’고 밝혔다”면서 “이들이 처음 만난 것은 지난 1972년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렸던 ‘스타의 밤’ 공연 때였다고 한다. 서로가 연예계에서 없어서는 안 될 훌륭한 연예인이라는 생각에 뜻을 통하게 됐고 그 뒤 자주 만나왔다”고 전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처음부터 가시밭길이었다. 김지미는 간통 혐의로 고소를 당한 이력이 있었고 나훈아는 군입대 전 결혼했던 부인과 막 이혼한 참이었다. 게다가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나이 차이 역시 따가운 눈총의 대상이 됐다. 그럼에도 김지미와 나훈아는 “남녀가 사랑을 하는데 나이차이가 무슨 문제가 되느냐”면서 “사는 날까지는 열심히 노력하고 살아갈 것”이라고 사랑을 다짐했다.

1982년 5월6일자 경향신문

1982년 5월6일자 경향신문

그로부터 6년 뒤인 1982년 5월6일자 경향신문엔 두 사람의 파경 소식이 실렸다. 기사는 “주위의 따가운 눈총 속에 불안한 스타트를 보였던 배우 김지미(42)와 연하의 가수 나훈아(35)의 결합은 6년 만에 파경으로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고 전했다. 기자들과 만난 나훈아는 “지난 3월 심한 부부싸움을 한 이후 냉전이 계속 돼오던 중 오늘 아침 집사람이 너무 피곤해 참을 수 없으니 헤어지자고 이혼을 제의했다”고 말했으며 “나도 서로의 피곤한 상태를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었다”며 파경에 이른 직접적 이유를 밝혔다. 당시 나훈아는 “여자는 돈이 없으면 살 수 없을 것”이라며 전 재산을 위자료로 넘겨 화제가 됐다.

나훈아의 파란만장한 결혼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는 김지미와의 이혼 1년 뒤인 1983년 ‘아빠가 됐다’는 소식을 알렸다. 14세 연하의 후배가수 정모씨와의 열애설도 함께 불거졌다. 결국 1985년 나훈아는 정씨와 세 번째 결혼을 했다. 그로부터 26년이 지난 2011년 8월, 정씨는 나훈아를 상대로 이혼 소송을 제기하며 이렇게 주장했다. “나훈아가 오랜 기간 연락을 끊었으며 불륜을 저지르고 생활비를 주지 않았다.” 오랜 법정 공방 끝 2016년 재판부는 나훈아에게 “12억1000만원을 지급하라” 명하며 “두 사람 이혼하라”고 판결했다. 세 번째 이혼이었다.

■2008년 1월26일 나훈아가 말했다 “언론이 해명하라”

2008년 1월25일자 경향신문

2008년 1월25일자 경향신문

2008년 1월25일자 경향신문 2면을 장식한 것은 바지춤을 풀어헤친 나훈아의 사진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 61세였다. ‘여배우 염문설’ ‘신체 일부 훼손설’ ‘일본 폭력조직 관련설’ 등 소문을 전면 부인하기 위해 나훈아가 기자회견을 연 날이었다. 말보다 행동이 앞선, 퍼포먼스에 가까웠던 이날 회견은 이후 1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마초’ 나훈아의 이미지를 완성한 명장면으로 회고된다.

회견일 당일인 25일 오전 11시, 서울 홍은동 그랜드 힐튼 호텔엔 700명이 넘는 취재진이 몰려들었고, 회견장 밖에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전경까지 배치됐다. 나훈아는 56분 동안 질의응답 없이 자신의 입장을 강력하게 피력했다.

“그간 내가 ‘그냥 놔둬라’고 무대응했지만 두 처자(여배우)들이 엉망진창이 된 상황에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려고 지난 일요일 결심 후 나서게 됐다.” 나훈아는 회견을 열게 된 동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배우 김혜수·김선아 등과의 염문설을 부인하기 위해서였다. 나훈아는 “불쌍한 두 처자들은 시집도 안 갔다. 그건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나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두 여배우는 꼭 바로잡아 달라”고 말했다. 기사는 “40년 넘게 가수생활을 했다는 그는 공인답지 않게 말투가 거칠었다”며 이날 나훈아가 뿜어낸 분노를 기록했다.

‘일본 폭력조직 폭행설’에 대해서는 더욱 격한 반응을 보였다. 기사를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그는 회견중 갑자기 재킷을 벗어 던지고 테이블 위로 뛰어올라가 허리띠를 풀고 바지 지퍼를 반쯤 내렸다. 그 뒤 억울함을 호소하듯 ‘밑에가 잘렸다고 한다. 여러분 대표에게 직접 5분간 보여주면 믿겠느냐, 아니면 내 말을 믿겠느냐’고 말했다.”

“언론이 해명하라.” 이날 나훈아는 언론에 대한 질타와 실망을 분노와 함께 쏟아 냈다. 그는 “속마음이 시리고 차가웠다. 해명할 게 없기 때문에 해명 기자회견이 아니다. 실제에 근거하지 않고 오보를 한 기자나 언론에서 해명해야 할 것”이라며 “노래 인생 40년 동안 나는 무대에서 관객의 기대에 부응할 만큼 약속을 지키고, 진실되게 노래했으며, 매번 정성들인 색다른 공연으로 꿈을 파는 예술을 추구해 왔는데 언론이 제대로 대접을 안해준다”고 말했다. 언론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을까. 이날 회견은 나훈아가 방송가를 떠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이후 무려 12년 간 이어진 긴 침묵이 이제 막 깨지려는 참이다. KBS 추석 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는 30일 오후 8시30분 KBS 2TV에서 방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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