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조찬기도회' 40년 뒤 '코로나 집회'..전광훈과 대형교회

2020. 9. 21.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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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 시간의 극장
제17화 전광훈과 대형교회
2011년에 기독자유민주당을 창당하는 전광훈의 모습이다. 지금보다 젊었다. 신소영 기자가 찍었다. 하나 건너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한때 유명했던 이건개 전 고검장이다. 홍준표가 ‘모래시계 검사’로 자처하는 이유는 검사 시절 이 사람을 잡아넣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개 쪽에서는 자신은 정치적 희생양일 뿐이라며 억울하다고 주장한다.

문제적 목사 전광훈이 <한겨레> 인터넷판에 처음 등장한 때는 2005년 1월이었다. 그를 전국적 유명인사(?)로 만든 ‘속바지 발언’ 때문이었다. 전광훈 쪽은 많이 억울했나 보다. 자신을 “빤스 목사”라 흉보는 기사와 댓글을 꾸준히 고소해온 것을 보면 말이다. 2011년 9월 <한겨레>에는 전광훈 쪽의 ‘반론’도 실렸다. “<한겨레>는 지난 22일 서울 시내 한 호텔의 커피숍에서 전광훈 목사를 만나 그가 어떤 취지로 해당 발언을 했는지 해명을 들어봤다.” 자신이 속바지 발언을 한 사실은 인정했다. 다만 본뜻이 왜곡되었다고 했다. 더 나아가 전광훈은 “내가 대한민국 정체성을 문제 삼으며 종북주의자를 비판하니 그들이 나를 폄훼한다”며, 정치성향 때문에 자신이 부당한 공격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전광훈 목사와 대형교회의 역사를 <한겨레> 아카이브에서 살펴봤다. / 해설 김태권

어떤 목사의 신앙 척도는 신도가 속바지 내리는 거였다 해명 보면 더 기가 막혀

군부독재 체제와 닮아있는 듯한 일부 대형교회의 리더십 행태 나라 안팎에서 관용 없는 모습

왜 지금 나는 속바지 이야기를 꺼내는가. 전광훈이 등장했다는 2005년 1월의 기사가 눈길을 끌어서다. 전광훈의 주장과는 달리, 이 기사는 그의 정치색을 문제 삼지 않았다. 심지어 기사 주제도 전광훈의 막말이 아니다. “담임목사의 절대권력과 우상화” 문제를 다뤘다. 내가 보기에는 ‘속바지 발언’보다 중요한 주제 같다. 지금 한국 개신교의 위기가 여기서 비롯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한겨레>의 옛 기사를 뒤적이며 교단의 자정 능력에 대해 고민한다.

개신교 개혁을 꿈꾸며, 교회 내부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한 언론 <뉴스앤조이>를 꾸려가는 사람들이다. 앞줄 오른쪽 둘째가 김종희 대표. 2010년에 조현 기자가 찍었다. 지면에 실리지 않았던 사진을 이번에 공개한다.

2005년 1월26일, <한겨레> 인터넷판에 이런 사연이 실렸다. 서울 어느 교회에서 담임목사의 ‘갑질’에 맞서던 부목사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했다고 한다. 그러자 담임목사를 따르는 교인들이 농성장을 찾아와 욕을 하고 걷어차고 뺨을 때렸다.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담임목사의 권력이 지나치게 크기 때문이다. “(교회에는) ‘모든 권력은 마이크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설교권이 담임목사에게 있기 때문에, 어떤 주장을 반복하면 교인들도 세뇌가 되는 거죠.”

교회 한곳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담임목사의 절대권력화와 우상화는 어느 정도일까?” <한겨레>는 그 무렵 <뉴스앤조이> 보도로 세상에 알려진 전광훈의 ‘속바지 발언’을 예로 들었다. “전광훈 목사는 ‘우리 교회 성도들은 목사인 나를 위해 죽으려는 자가 70% 이상이다. 내가 손가락 1개 펴고 5개라 하면 다 5개라 한다. 자기 견해 없이 목사를 위해 열려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목사는 교인들에게 “교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이 성도가 내 성도 됐는지 알아보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옛날에 쓰던 방법 중 하나는 젊은 집사에게 빤스(팬티) 내려라, 한번 자고 싶다 해보고 그대로 하면 내 성도요, 거절하면 똥이다. 또 하나는 인감증명을 끊어 오라고 해서 아무 말 없이 가져오면 내 성도요, 어디 쓰려는지 물어보면 아니다’고 말했다.”

전광훈은 오해라고 주장한다. ‘내가 속바지를 벗으라고 하면 내 신도들은 벗겠지만 나는 벗으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 자신의 본뜻이라고 해명(?)했다. 2011년 <한겨레>에 실린 전광훈의 반론은 이렇다. “어떤 목사가 집사와 불륜관계에 있었다. 그 목사가 조사를 받다가 ‘나는 책임 없다. 집사님이 꼬셨다’라며 모든 책임을 돌렸다더라. 나(전광훈)는 그 목사의 잘못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성도들이 목사 좋아하는 것은 선이 없다. … 우리 교회 집사님들은 나 얼마나 좋아하는지 내가 빤스 벗으라면 다 벗어. 목사가 벗으라고 해서 안 벗으면 내 성도 아니지. 그런다고 해서 집사들에게 책임을 지우면 되겠느냐’라고 말했다. 이런 맥락에서 한 발언”이라나.

글쎄, 독자님은 어떠신지. 전광훈의 ‘해명’을 듣고 ‘아! 전광훈 목사가 억울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드시는지? 아무려나 나는 속바지 발언보다 청중의 반응이 더 문제인 것 같다. “<뉴스앤조이>는 이 강연에 대해 ‘해괴하기만 한 강의였으나 주된 참석자들인 … 목회자 부부들은 양손을 치켜들고 ‘아멘’으로 화답하기에 바빴다’고 보도했다. ‘우상화’ 수준에 이른 일부 담임목사들이 자신이 고용한 부목사나 관리집사 등을 어떻게 대했을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말하는 전광훈도 듣는 목회자들도 한마음 한뜻이었다는 사실이 어쩌면 더 큰 문제 아닐까.

다른 종교와의 대화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1992년에 출교당한 감리교 신학자 변선환 교수의 해맑게 웃는 사진이다. 변선환은 교회와 학교에서 쫓겨나고 3년 뒤인 1995년에 책더미 앞에 앉은 채 숨졌다. 그 뒤에도 <한겨레>는 변선환 교수를 추모하는 기사를 여러 차례 실었다.
어느 개신교 신자가 불교 사찰을 파손하자 한국기독대학의 손원영 교수는 개신교인으로서 참회한다며 모금을 해 불교계에 전달했다. 그런데 학교는 이 일을 트집 잡아 손 교수를 쫓아냈다. 변선환 사건과 비교되곤 한다. 2017년에 조현 기자가 찍고 매체에 실리지 않았던 사진을 공개한다.
1992년에 변선환, 홍정수 교수를 쫓아내는 종교재판이 열렸다. 김홍도는 금란교회 교인들을 동원해 사나운 분위기를 조성하고 항의하는 감리교 신학대학 학생들을 강제로 끌어냈다. 이정우 기자가 촬영해 그해 5월 <한겨레>에 실렸다.
1992년 5월, 변선환 교수의 출교에 항의해며 감리교신학대학 대학원생들이 농성을 벌이고 있다. 장철규 기자가 찍었다. 학생들은 1993년과 1994년에도 백일 넘게 수업 거부를 하는 등, 학교를 장악하려는 김홍도 같은 외부세력과 맞섰다.
김홍도 목사가 교인을 종교 이외의 목적에 동원한 일은 변선환 사건 때가 마지막이 아니었다. 1998년 4월에는 문화방송(MBC)의 <시사매거진 2580>이 김홍도 목사의 비리 의혹을 보도하자 신도들이 몰려가 문화방송 문을 막아버린 사건이 있다. <한겨레>에 따르면 이때 라디오 방송 진행자들이 사옥에 들어가지 못해 방송이 파행을 빚을 정도였다고 한다. 촬영한 기자 이름이 적시되어 있지 않다.
2005년 남아시아 쓰나미 사태로 수십만명이 목숨을 잃고 전세계가 애도했다. 그런데 김홍도 목사는 이 지역 사람들이 이슬람과 불교를 믿어 벌을 받았다는 말을 해 국제적인 공분을 샀다. 장봉군 화백이 그린 2005년 1월13일치 <한겨레> 그림판이다.

같은 생각인 사람이 모이면 다른 집단에 배타적이 되기 쉽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이나 종교를 가지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에게 배려가 부족하다는 말을 한국 개신교는 자주 듣는다. 1992년의 변선환 교수 사건은 교회 밖의 사람이 보기에 충격적이다. 변선환은 불교나 원불교 같은 다른 종교와도 대화해야 한다는 논문을 썼다. 그러자 그를 쫓아내겠다는 종교재판이 열렸다. “교계 안팎의 비상한 관심 속에 열린 이날 ‘한국판 종교재판’은 무리한 기소 절차, 재판 진행의 미숙 등 첫 교회재판으로서 많은 한계를 드러냈다.” <한겨레> 1992년 3월25일치 기사다. <한겨레>는 감리교신학대학의 학장이던 변선환 교수에 대해 그가 출교를 당하고 세상을 떠날 때부터 지금까지 50여건의 기사를 냈다. 5월에 이어지는 기사는 무시무시하다. “이날(5월7일) 재판은 (재판부를 편드는) 3000여 금란교회 교인들이 열광적으로 예배와 찬송을 하고, (재판부에 항의하는) 감리교신학대학생들을 이 교회 남성 선교회원들이 끌어내는 등 극도로 소란스러운 가운데 진행됐다.”

수천명의 교인을 동원해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한 사람은 금란교회 담임목사였던 김홍도다. 김홍도는 ‘관용 없음’의 상징과 같은 인물이다. 1998년에는 자신의 비리 의혹을 보도한 문화방송(MBC)에 신도 2000여명을 보내 방송에까지 지장을 주었다. 2004년에는 공금을 유용한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는데, 이 무렵 다른 대형교회 목사들과 함께 서울시청 광장에 교인 10만여명을 동원해 세를 과시했다. 2005년 초에는 서남아시아에서 쓰나미(지진해일)가 일어나 수십만명이 희생된 일을 놓고, 불교와 무슬림이 많이 사는 지역이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는 악명 높은 발언을 했다. 김홍도는 최근 세상을 떠났다. 그의 궂긴 소식을 전하는 <한겨레>의 기사 제목은 “전광훈의 사부 김홍도 목사 별세”였다. “전광훈 목사는 무명의 자신을 대형교회 부흥사로 데뷔시켜준 고인을 ‘영적 아버지’라며 아버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김홍도가 남긴 유산이 전광훈이다.

관용 없는 모습은 나라 밖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였다. 1992년 6월28일치 <한겨레>에는 “북방선교 과열 잇단 마찰”이라는 기사가 났다. “러시아 주재 한국대사관으로부터 한국 종교계가 옛 소련 전역에서 과열 선교로 물의를 빚고 있으므로 본국의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보고서가 오기도 했다. (최근 몇년 동안) 한국 종교계의 과열 선교가 금품 살포, 신자 뺏기, 교회 난립 등 큰 부작용을 불러 현지에서 한인들에 대한 인식을 악화시킨다는 것이다.”

러시아 정교회 역시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크리스트교의 한갈래라는 점을 생각하니 민망하다. 어디 러시아와 동유럽만 대상이랴. “한국 종교계의 북방선교가 과열 시비로 마찰을 빚은 것은 이번이 두번째로 지난해 8월에는 중국 정부가 우리 정부에 한국 개신교 등의 과열된 선교활동을 자제시켜 달라고 요청해온 바 있다.”

기사에는 충고도 실려 있다. “종교계에서는 어쨌든 이 기회에 업적 및 성과주의, 물량공세 … 등 선교사업에 스며든 ‘한국적 축복신앙의 부정적 형태’를 시급히 일소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 고언을 1992년에 받아들였다면 어땠을까, 나는 조심스럽게 상상한다. 2007년에 아프가니스탄에서 목회자가 피살된 샘물교회 사건의 안타까운 비극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2014년 2월20일에 유죄판결을 받고 나오는 조용기 목사를 김봉규 기자가 찍었다. 지면에 실리지 않았던 사진이다. 항의하는 시민들과 지지하는 신도들이 뒤엉켜 어수선하다. 이날 지지자들과 경호원들이 기자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방송사 카메라를 때려부쉈다는 후일담이 있다.
조용기 가족의 비리에 항의하는 순복음교회 장로가 “교회를 사유화하지 말라”는 펼침막을 들고 시위하는 모습이다. 2011년 7월에 류우종 기자가 찍었다. 2017년 대법원까지 가서 조용기 가족의 유죄가 확정되었으나 항의하던 장로들은 2013년에 ‘보복성’ 징계를 받았다.
방인성 목사는 개신교회 개혁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사다. 2012년 6월13일, 조용기 가족의 교회 사유화에 반대하는 회견을 한 다음 <한겨레>와 인터뷰하는 모습을 강재훈 기자가 찍었다. 신문에 실리지 않았던 사진을 골라 이번에 공개한다

미리 밝혀야겠다. 나의 관심사는 몇몇 목사의 개인적 일탈을 버르집으려는 것이 아니다. 일부 목사의 잘못을 꼬투리 잡아 개신교 전체를 비난할 의도는 없다. 종교인의 일탈은 어느 교단에나 있다. 다만 나는 몇몇 교회의 자정 능력이 걱정이다. 잘못이 있어도 지적하지 못할 정도로 목사의 권력이 강하다면 문제가 아닐까? 일부 대형교회의 리더십이 군부독재 체제와 닮아 있다는 지적이 개신교 일각에서 제기되곤 한다.

한때 교회개혁 운동에 참여했던 정종은 교수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다. “이른바 ‘한국형 메가처치’는… 3선개헌과 유신으로 이어지는 박정희 정권의 영구집권 모색과 연계”된다는 분석이 2011년 1월 <<한겨레>21>에 실렸다. 2011년 6월 <한겨레> 기사에는 “박정희는 ‘경제 대통령’, 조용기 목사는 ‘종교 대통령’?”이라는 부제가 달렸다.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의 문제는 소통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조용기 가족의 경우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2000년대 초반에 조용기 목사는 큰아들 회사의 주식을 갑절 이상 비싼 값에 사주었다. 교회 돈을 가져다 썼다는 점이 문제였다.

종교전문 기자인 조현 기자는 <한겨레> 휴심정 페이지를 운영해왔다. 개신교 큰 교회들의 속사정 역시 오랫동안 다루었다. 2011년 9월20일 휴심정에는 “조용기 목사가 장로들에 의해 고발당했다”는 기사가 났다. 배임 혐의였다. 이때 조용기 목사 쪽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비판을 받아들였을까? 반대다. 2011년 10월 <한겨레>에는, 조용기 가족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국민일보 노조위원장이 해고를 당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2012년 12월에 큰아들이 기소당했다. 조용기 목사는 공범 혐의였다. 이때 교회는 살을 깎는 모습을 보였을까? 정반대였다. 2013년 1월5일치 <한겨레> 기사에 따르면, 1월3일에 열린 한기총 총회가 만장일치로 “조용기 목사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기로” 결의했다고 한다. “홍재철 회장은 ‘조용기 목사님은 지구를 115바퀴나 돌면서 세계에서 가장 많은 복음을 전했던 분이다. 꼭 혁명을 해야 (노벨평화상) 후보가 되는 게 아니지 않으냐’고 말했다.” 여론은 싸늘했다. 1월10일 휴심정 기사의 제목은 이랬다. “생뚱맞은 조용기 목사 노벨상 추천”. 결국 없던 일이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검찰은 착착 수사를 진행했다. “큰아들이 교도소에 수감된 와중에 조용기 목사도 배임 혐의로 기소될 처지라고 한다. 사법당국은 이번 사건을 엄정히 심판해 대형교회들이 자정하는 계기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한겨레> 3월1일치 사설이다. 그래서 이 계기에 자정했을까? 글쎄다. 비판한 사람들만 불이익을 당했다. 2013년 3월의 기사 제목은 이렇다. “조용기 목사 고발한 장로들에 ‘보복징계’”.

2017년 대법원에서 조용기 목사의 유죄가 확정되었다. 그 전에 자정의 노력이 없지는 않았다. 조용기 가족의 비리 의혹에 대해 교회가 “자체 진상조사를 벌인 결과 절반 이상이 사실이라는 결론을 냈다.” 2014년 2월11일치 기사다. 그러나 “여러 의혹이 사실임을 밝히고도, 언론사에 보낸 보도자료에는 ‘의혹 대부분은 오해거나 과장이며, 일부 관련이 있더라도 회복 가능한 부분’이라고 밝혔다.” 내부에서 끙끙 앓고 내놓은 결론일 텐데, 밖에서 보는 사람은 안쓰럽다.

흑백텔레비전 화면에 “녹화중계-전두환 상임위원장을 위한 기도회”라는 자막이 올라온다. 1980년 8월6일, 개신교회를 대표하는 23명의 목사가 전두환을 위해 조찬기도회를 열었다. 5·18 학살을 저지른 직후 정통성에 목말랐던 신군부는 이 기도회 영상을 세번씩이나 텔레비전에 틀었다. 당시 영상 갈무리 사진이다.
1980년 8월6일, 개신교회를 대표하는 23명의 목사가 전두환을 위해 조찬기도회를 열었다. 당시 영상 갈무리 사진이다.
2011년 6월16일치 <한겨레>에는 개신교가 박정희 시대에 외형적 성장에만 신경 쓰느라 “그 결과 일제강점기에 사회에 영향력을 끼쳤던 모습은 약해졌다”는 최동규 교수의 지적이 실렸다. 사진은 홍용덕 기자가 2007년에 찍은 제암리 순국기념관이다. 3·1운동 때 천도교와 함께 사회운동에 앞장섰던 개신교의 위상은 돌아올 것인가.

생각이 같은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은 생각이 다른 사람은 떠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것이 개신교의 위기로 이어졌다. 2006년 6월 기사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가톨릭 신자가 219만, 불교 신자가 40만5천명이 각각 늘어난 반면 개신교 신자는 14만4천명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개신교가 전해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때 자성했다면 어땠을까.

자성의 기회는 1988년에도 있었다. <한겨레>는 창간 직후부터 ‘1980년 8월6일의 조찬기도회’를 반성해야 한다는 개신교 신자들의 목소리를 실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몇달 되지도 않아 개신교 목사 23명이 모여 기도회를 열었다. “신군부는 이 기도회를 현장중계하는 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아 평일인데도 점심과 저녁 두 차례 더 녹화중계하는 ‘정성’을 들였다.” 이날 정진경 목사는 전두환이 “사회 구석구석에 존재하는 악을 제거하고 정화”한다고 찬양했다. 1988년에 개신교인들이 그때 전두환 정권을 정당화해준 일을 참회하라고 촉구했다. 이때 자성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조찬기도회의 주역 23명 중 단지 2명만이 (1996년에) 발표한 참회성명에 동참했을 뿐이다.”

나중에 2020년을 돌이켜 “코로나 재확산 사태 때 한국 개신교가 자성했다면 어땠을까” 아쉬워하게 되지는 않으려나. 안타까운 마음이다.

▶ 해설자인 김태권 작가는 만화가입니다. 글도 쓰고 일러스트도 그립니다. 요즘은 주로 관악산 자락에서 두 아이를 떠메고 다니며 시간을 보냅니다.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와 <히틀러의 성공시대> 등의 만화책을 그렸고, <불편한 미술관>과 <에라스뮈스와 친구들> <먹히는 자에 대한 예의> 등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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