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다 죽은 당신, 뒤늦게 알았습니다"···홍대 거리에 붙은 '반성문'

조해람 기자
20일 오후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앞 삼성디지털프라자 홍대점 공사장 외벽에 최근 이곳에서 사망한 노동자를 추모하는 시민들의 메모지가 붙어 있다. 지난 16일 이곳에서는 한 건설노동자가 승강기 통로에서 작업 중에 끼임 사고로 숨졌다. 조해람 기자

20일 오후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앞 삼성디지털프라자 홍대점 공사장 외벽에 최근 이곳에서 사망한 노동자를 추모하는 시민들의 메모지가 붙어 있다. 지난 16일 이곳에서는 한 건설노동자가 승강기 통로에서 작업 중에 끼임 사고로 숨졌다. 조해람 기자

“이 번화한 홍대거리에서 여전히 노동자들은 일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기초적인 안전장비의 혜택도 받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바쁘게 오가는 주말 홍대거리 한 켠에 ‘반성문’이 붙었다.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앞 삼성디지털프라자 홍대점 공사장 앞이다.

‘이 근처에 살고 있지만 뒤늦게 소식을 접한 한 시민’이라 소개한 글쓴이는 “지난 16일 이곳에서 한 노동자가 사망했다”며 “우리 곁에서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죽음의 릴레이는 반드시 멈춰야 한다”고 밝혔다. 대자보 옆에는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적힌 메모지 여러 장이 붙었다. 공사장 옆 골목을 돌아서면 “삼성전자 초일류 매장 구축을 위해 새단장 리뉴얼을 진행한다”는 현수막이 휘날린다. 20일 이곳을 찾았다.

소방당국 등에 따르면 지난 16일 오후 한 노동자가 이곳 승강기 통로에서 작업을 하다가 갑자기 작동한 승강기에 끼어 숨졌다. 관할 노동청은 지난 18일 “승강기 방화벽체 작업 중 협착으로 인한 중대재해가 발생”했다며 해당 승강기에 사용중지명령을 내렸다. 경찰과 소방은 정확한 사고 원인을 조사하고 있다.

20일 오후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앞 삼성디지털프라자 홍대점 공사장 외벽에 시민들의 대자보와 메모지가 붙어 있다. 지난 16일 이곳에서는 한 건설노동자가 승강기 통로에서 작업 중에 끼임 사고로 숨졌다. 조해람 기자

20일 오후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앞 삼성디지털프라자 홍대점 공사장 외벽에 시민들의 대자보와 메모지가 붙어 있다. 지난 16일 이곳에서는 한 건설노동자가 승강기 통로에서 작업 중에 끼임 사고로 숨졌다. 조해람 기자

글쓴이는 “이 기업이 우리의 돈을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쓰고 있는지에 대한 소비자로서의 책임을, 정부가 이 죽음을 제대로 예방할 수 있도록 요구하는 국민으로서의 책임을 제대로 이행하자”며 “저 또한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 사람으로서 이 반성문을 그 노동자분의 영전에 바친다”고 밝혔다.

자신을 ‘성산동 주민’이라 소개한 시민도 그 옆에 나란히 대자보를 붙였다. 그는 “제가 매일 출퇴근 할 때마다 다니는 이 길에서 누군가 죽었다는 사실이 그냥 쉬이 묻히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펜을 들었다”며 “누구나 알고 있다. 기한을 맞추기 위해 빨리 일을 끝내야 하고, 그러다 보니 안전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이라고 적었다. 그는 “홍대 거리를 지나는 여러분께 호소드린다. 더 이상 산업재해·안전사고로 허무하게 죽어나가는 사람이 없도록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에 함께해달라”고 덧붙였다.

20일 오후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앞 도로에서 한 시민이 발걸음을 멈추고 대자보를 읽고 있다. 조해람 기자

20일 오후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앞 도로에서 한 시민이 발걸음을 멈추고 대자보를 읽고 있다. 조해람 기자

지나가던 시민들도 발길을 멈추고 대자보를 읽거나 사진을 찍어 갔다. 프리랜서 사진작가 정정은씨(33)는 “서점에 가는 길인데 이 자보로 처음 알았다”며 “나도 지인의 아버지가 건설현장에서 일하다 돌아가신 경험이 있다. 일하다 죽지 않아야 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2020년에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니 안타깝다”고 말했다. 직장인 전예진씨(27)는 자보를 읽자마자 휴대전화에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청원을 검색했다. 전씨는 “SNS에도 공유하려 한다. 돌아가신 소식을 기사로도 못 접했다. 계속 같은 일이 반복되고 노동자만 현장에서 고통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산업재해 사망자는 2020명이다. 하루 평균 7명이 산재로 사망했다. 승강기 관련 사고도 계속 일어난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 4월 기준으로 최근 5년간 38명이 승강기 관련 작업을 하다가 사고로 숨졌다. 지난해에도 8명이 승강기 관련 작업(승강기 설치, 교체, 유지·관리작업)을 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반복되는 산재 사망에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요구도 커지고 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란 안전관리·안전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은 사업장에서 노동자가 죽거나 다치면 기업이나 경영자 등을 강하게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다. 지난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 하청업체에서 일하다 사망한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이 국회 온라인 청원사이트인 국민동의청원 홈페이지에 올린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에 관한 청원’은 20일 오후 4시 현재 9만6000이 넘는 동의를 얻었다. 30일간 10만 명의 동의를 얻으면 소관 상임위원회가 관련 내용을 심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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