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 조용한 일/김사인

입력 2020. 6. 10.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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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릅니다.

저는 정말이지 모릅니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당신에게 가는 동안 쑥부쟁이에 내려앉을까 말까 살랑이는 나비 구경하느라 한참, 지하철역 앞에서 나물 파는 할머니 한숨 소리 듣느라 또 한참,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소복소복 내려 쌓이는 눈 보느라 더 한참, 그러다 보면 결국엔 해 다 저문 늦은 저녁 낯선 동네에 서 있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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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 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 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 모릅니다. 저는 모릅니다. 저는 정말이지 모릅니다. 시가 무엇인지, 시가 어떻게 생겼는지, 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돌이켜보니 저는 여태 시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기만 합니다. 다만 시인이 깊고 정한 우물에서 길어 올려 대접 가득 담아 준 물 한 그릇 받쳐 들고 가만가만 당신에게 가는 게 전부였습니다. 행여나 넘칠까 혹시나 티끌이라도 내려앉을까 그런 걱정으로 안절부절못하면서요. 그러나 고백하건대 당신에게 가는 동안 쑥부쟁이에 내려앉을까 말까 살랑이는 나비 구경하느라 한참, 지하철역 앞에서 나물 파는 할머니 한숨 소리 듣느라 또 한참,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소복소복 내려 쌓이는 눈 보느라 더 한참, 그러다 보면 결국엔 해 다 저문 늦은 저녁 낯선 동네에 서 있곤 했습니다. 매번 그랬습니다. 매번 낭패였고 매번 실패였습니다. 그저 민망하고 미안합니다. 그래도 매번 기다려 주신 당신, 참 고맙습니다. 어쩌면 “말없이 그냥 있”어 주신 당신이 있어 제가 시 곁에 잠시나마 서성일 수 있었던 건 아닌가 싶습니다.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여 고마움을 표합니다. 부디 안녕하시길 기원합니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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