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역병의 시대, 여기선 배우고 놀고 일하고 사랑하며 지낸다 [다른 삶]

이숙명 2020. 6. 5.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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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명의 '유유자적'

[경향신문]

요즘 발리 날씨는 이상하다. 우기가 끝나도 벌써 끝났어야 하는데 사흘이 멀다 하고 비가 내린다. 동물들도 적응이 안 되는지 숲에 있어야 할 두꺼비들이 자꾸 집 안으로 들어온다. 처음엔 의자 뒤에 숨은 두꺼비를 보고 놀라서 까무러칠 뻔했는데 나중엔 정이 들어서 “자자, 아침이니까 밥 먹으러 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렴. 뱀한테 안 물리게 조심하고” 하면서 침착하게 내보내게 되었다. 발리 살이는 그렇다. 도마뱀, 두꺼비, 쥐, 바퀴벌레에 익숙해져야 한다. 사방이 숲이고 정원인 데다 개방된 공간이 많은 주택 구조상 청소를 잘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집에 뱀이 들어오는 경우도 흔하다. 특급 호텔들이야 사방을 밀폐하고 하루 종일 에어컨을 틀면 된다. 하지만 연중 무더운 곳이라 에어컨도 두어 달마다 퍼져버리니까 돈과 수고를 아끼려면 주택을 개방형으로 짓는 게 낫고, 결국 별로 안 귀여운 동물들과도 친해질 수밖에 없다. 안타깝지만 현실은 인스타그램 여행사진만큼 낭만적이지 않다.

발리와 누사프니다 간 일반 여객선 운항은 3월 말부터 중단 상태다. 관광객과 호객꾼으로 북적이던 부두가 한산하다. 하루 한두 편 있는 긴급 후송 보트를 타려면 동사무소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가만 보면 도마뱀이나 두꺼비도 생김새와 성격이 제각각이라 유독 정이 가는 개체가 있고, 나름대로 지켜보는 재미가 있는 녀석도 있다. 사실 도시에서 이 신문을 읽는 사람들에게 도마뱀, 두꺼비 얘기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하지만 아침마다 테라스에 두꺼비가 출몰하는 게 요즘 내 삶의 가장 큰 사건이고, 매일 보는 도마뱀이 어느 날 갑자기 꼬리가 끊어져 있는 게 신기하고 관심 가는 뉴스다. 나는 음식물 쓰레기를 주방 창문 밖으로 던져버리는데, 그럼 옆집 닭들이 와서 먹을 건 먹고, 그들이 남긴 건 금세 썩는다. 그걸 2년 동안 했더니 요즘은 유독 똑똑한 닭 한 마리가 배 고프면 창문 앞에 와서 나를 부른다. 하얀 몸체에 빨간 벼슬이 달린 닭이다. 그것도 생명체와 소통하는 것이어선지 은근히 나의 정서 관리에 도움이 된다. 그러다 인터넷을 열면 두렵고 골치 아픈 세상사가 펼쳐지고, 이렇게 고통 가득한 세계에서 나만 너무 속 편하게 사는 건 아닐까, 과연 인생을 이렇게 써도 되나, 죄책감도 든다. 요즘 세상이 뒤숭숭하니 특히 그렇다. 그러려고 떠나온 거긴 하지만 이런 평화로운 삶을 단지 선택하지 않은 게 아니라 선택할 수 없는 사람들이 종종 떠올라 마음이 무겁다.

얼마 전 프랑스 친구 팬치가 말했다. “적어도 여기 있는 유럽인들은 굶어 죽을 걱정은 없는 사람들이잖아.” 그는 관광업의 미래가 불투명한 현실에서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가 없어서 스쿠버다이버 경력을 포기하고 유럽으로 돌아가려는 참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여행을 다니면서 어학을 가르치고 다이빙 강사를 했다는 그는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를 겪으면서 자기 인생을 돌아보게 됐다. 그 결과, 보다 안정된 미래를 위해 대학에 가서 해양생물학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었다. 심란해하는 그에게 “그래도 프랑스에 가면 가족이 먹여주고 재워줄 거 아냐”라고 했더니 그가 한 말이 저것이었다. 경제위기라곤 해도 이곳 이민자 그룹에겐 목숨이 아니라 삶의 질이라든가 자아실현에 타격이 오는 수준이다. 그들도 나름 좌절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고통받는 인간들은 분명 아니다. 불안하지만 불평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노력하고 있다.

날씨까지 이상해 아직도 우기
아침마다 출몰하는 두꺼비가
요즘 내 삶의 가장 큰 사건이다

관광객이 끊겨 삶이 불안하나
유럽이 국경을 연다는 소식에
청소도 하며 준비를 하고 있다

감염자도 없는 누사프니다 섬
사람들은 이제 슬슬 움직이고
라마단이 끝나며 파티도 했다

본업은 아니나 무언가를 하며
이웃과 어울려 지내는 이곳
대학 자취촌 방학 풍경 같다

관광이 중단되면서 주민들의 가계는 어려워졌지만 교통 체증, 매연, 소음이 없어져 환경은 쾌적하다.

지역경제는 점점 나빠지고 있다. 오전, 오후 두 번 문을 열던 재래시장은 이제 오전에만 영업을 한다.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석 달 동안 일을 못했으니 아무거나 시켜달라는 택시 운전사의 호소가 올라온다. 거기 대고 어떤 불레(백인)가 “운전은 진짜 직업이 아니다. 불레 젖소는 더 이상 젖을 짤 수 없게 됐으니 헛된 기대 말고 진짜 직업을 알아보라”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했다가 많은 사람들의 지탄을 받았다. 지역 토박이인 친구 꼬망은 다이빙센터에서 일하다가 쉬는 중인데 셋째 출산이 임박해서 병원비를 빌려야 했다. 외국인이 소유한 해변 리조트, 술집 몇 군데가 급매물로 시장에 나오기도 했다. 이 시국에 과연 팔릴지는 의문이다.

한편으로 희망의 기운도 감돈다. 섬 폐쇄와 영업 중단이 오래되면서 이곳 사람들은 새로운 일상에 적응하고 있다. 몇 년간 관광객이 급증해서 쉴 틈이 없었기 때문에 한동안 무턱대고 늘어져 있었지만 슬슬 뭐라도 해보려는 분위기다. 미뤄둔 공부를 하고, 취미생활을 하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마케팅 자료를 만든다. 몇 달 동안 평론가라도 되려는지 아침부터 밤까지 틀어박혀 영화만 보던 나의 동거인은 사흘 전 갑자기 대청소를 했다. 집 안 곳곳의 거미줄을 치우고 잡동사니를 버리고 귀찮아서 내버려두던 옷장 속 도마뱀을 쫓아내고 집 안 물건을 몽땅 끄집어낸 뒤 수세미와 락스로 바닥을 닦았다. 이런 변화는 유럽이 국경을 열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 때문이기도 하다. 발리는 관광업 없이 버티기 힘든 지역이다. 호주, 중국, 유럽이 문을 연다면 발리도 문을 열 것이다. 그런 판단이 무기력을 해독하는 약이 되고 있다. 희망이 있으면 사람은 움직일 수 있다.

인도네시아 무슬림 최대 명절인 ‘이둘 피트리’를 위한 만찬. 커리와 코코넛 가루를 넣은 얼큰한 국과 쇠고기 꼬치다.

누사프니다는 이웃 섬 발리와 달리 아직 지역사회 감염이 없다. 5월 말 크루즈선에서 일하다 귀국한 노동자 여럿이 확진 판정을 받았고 그중 한 명이 누사프니다 사람이라곤 하나 호텔에 격리된 상태에서 검사를 받은 터라 추가 감염은 없었다. 인도네시아는 섬나라다 보니 부분 봉쇄가 쉽고, 그 덕에 전염병 방어에는 유리하다. 역으로 이 안에서 대규모 감염이 발생하면 섬이 통째로 버려질 수도 있겠다는 공포영화 같은 상상을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질병의 공포는 옅어지고 연결의 욕구는 강해진다. 두 달 넘게 섬에 갇혀서 외부인과 접촉 없이 지내온 사람들은 ‘그럼 우리끼린 괜찮은 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은 삼삼오오 모여 밥도 먹고 술도 마신다.

며칠 전엔 같은 건물에 사는 인도네시아 친구 위디아가 케이크를 들고 왔다. 전기밥솥으로 만든 바닐라케이크였다. “집에만 있으니까 심심해서 말이야….” 건물에는 디저트의 나라 프랑스에서 온 사람이 여럿 살지만 오븐이 없다. 빵집 하나 없는 동네에 고립된 그들을 위한 특별식이었다. 프랑스인들은 쌀 문화권 사람들이 전기밥솥을 주방의 만능 아이템으로 여기는 것에 한 번, 실제 그걸로 케이크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스쿠버다이버인 위디아는 일이 없는 요즘 요리와 손빨래, 프랑스어 공부를 한다. 그는 무슬림임에도 올해 이둘피트리(Idul Fitri)를 가족과 지내지 못했다. 이둘피트리는 라마단이 끝나는 날이다. 인도네시아 최대 명절이기도 하다. 원래는 이날 뿔뿔이 흩어진 가족이 한데 모여서 식사를 한다. 하지만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곳곳의 교통이 끊겼다. 위디아는 고향 롬복에 가는 대신 친구들을 초대해 사테(꼬치구이) 파티를 벌였다. “와줘서 고마워. 너희도 내 가족이니까 같이 명절 즐겁게 보내자.” 위디아가 말했다.

홍콩 친구 루도 전기밥솥 예찬을 들려주었다. “요즘 시간이 많으니까 전기밥솥으로 별걸 다 해보고 있거든. 그걸로 할 수 있는 요리 종류가 무궁무진한 거 알아? 케이크뿐 아니라 삼계탕, 카레, 파스타 소스도 만들 수 있어. 너 잡지에 쓸 거 없다고 항상 고민하잖아. 전기밥솥에 대해 써보는 건 어때?” 요가 강사이자 스쿠버다이빙 강사 루는 요즘 자신의 리조트를 짓는 와중에 동영상 편집을 공부한다. 훗날 리조트에서 관광 경영 실습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위해 교육자료를 만드는 거다.

또 다른 날, 나는 캐나다 친구 로렌을 만났다. 해양환경 운동가인 로렌은 요즘 디제잉을 배운다. 섬이 작다곤 해도 별의별 사람이 다 있어서 배우려면 못 배울 게 없다. 한때 파리 유명 클럽과 축제의 사운드 엔지니어로 일한 친구가 로렌을 가르치고 있다. “나는 코로나 디제이, 코로나 제빵사, 코로나 정원사야. 내가 기른 가지 좀 가져갈래?” 로렌이 웃으며 내게 물었다. 처음 디제잉을 배운 날, 그는 열 시간 동안 음악을 틀었다. 밤이 되자 술집을 운영하다 코로나19 때문에 쉬고 있는 다른 친구가 디스코볼을 가져왔다. 시골살이의 즐거움이라면 역시 이웃이 소음 신고를 해서 경찰이 출동할까 걱정할 필요 없이 밤새 EDM을 틀 수 있다는 것, 이라고 하면 물론 거짓말이다. 로렌의 집처럼 외딴 곳은 여기서도 드물다. 로렌이 디제잉을 배워야 할 이유다. 아무튼 사람이 모이자 우리는 술 판매상 밥에게 전화를 걸었다. 코로나19 때문에 모든 가게가 문을 닫고 관광객도 떠났지만 수십 명의 술고래가 남아서 밥의 생계에는 큰 타격이 없다. 위스키나 와인을 주문하면 그가 집까지 배달을 해준다. 그는 누사프니다 불레들의 거주지를 가장 정확히 아는 사람이다. 그날 내가 로렌의 집을 떠나올 때는 음악과 술에 만취해서 기력이 다한 인간들이 넷플릭스로 추억의 시트콤 <프렌즈>를 보겠다면서 얌전한 자세로 TV 앞에 모여 앉아 있었다. 소도시 대학 자취촌의 여름방학 풍경 같았다.

배우고 놀고 일하고 사랑하기. 누사프니다 사람들은 대역병의 시대를 이렇게 지나고 있다.

▶필자 이숙명

영화잡지 ‘프리미어’, 패션지 ‘엘르’ ‘싱글즈’ 등에서 일했다. 27년차 프로 독거인으로서 <혼자서 완전하게>라는 책을 썼으며, 2017년 한국을 떠나며 짐정리를 하느라 고군분투한 얘기를 <사물의 중력>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현재 발리 인근 누사프니다에 살면서 가끔 글을 쓰고 요가와 스쿠버다이빙을 한다.』

이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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