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FA] 죽기살기로 노력한 이민재 "농구하며 행복했다"

이재범 2020. 5. 30.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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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이재범 기자] 잔인한 5월, 매번 고비를 넘기고 넘겼다. 그렇게 10년의 시간을 보냈다. 더 이상 연장은 없었다. 결국 은퇴. 그렇지만, 코트를 누빈 시간은 적을지라도 단 1초를 뛰기 위해 그 누구보다 노력했던 이민재(188cm, F)는 “농구하며 행복했다”고 마지막 말을 남기며 이제 유니폼을 벗는다.

5월이면 자유계약 선수(FA) 시장이 열린다. 대박의 기회이지만, 출전 기회가 없었거나 고참 선수에겐 은퇴의 기로다. 2010년 KBL 국내선수 드래프트에서 16순위에 뽑힌 이민재는 5번의 FA 시장에서 살아남았다. FA 횟수만 따지면 20시즌을 치른 주희정과 같다. 매번 1년 계약을 맺어 시즌이 끝날 때마다 FA였기 때문이다.

5번의 FA 중 가장 큰 위기는 2016년이었다. 20사단 포병대대에서 군 복무를 한 이민재는 2016년 7월 6일 제대했다. 입대 전에 FA 계약을 하지 않아 군 복무를 하며 FA 기간을 맞이했다. 구단과 만나서 협상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당시 소속팀 KT도 이민재를 꼭 필요한 자원으로 여기지 않아 계약을 하지 않을 방침이었다.

사이버 지식 정보방에서 잠 자기 전 농구 드리블 영상을 보며 헬스장에서 드리블 연습을 했던 이민재는 “운동이 너무 하고 싶다. 기회를 한 번 달라”고 연락했고, 휴가를 활용해 테스트를 받은 끝에 계약 연장에 성공했다. 군 복무를 하면서도 운동할 수 있는 몸 상태를 유지하고, 간절함이 컸던 게 비결이다.

이민재는 매 순간 절실함을 가지고 노력했다. 햇수로는 10년, 프로에서 치른 8시즌 동안 정규경기 통산 138경기 총 921분 44초(평균 6분 41초) 동안 코트에 나서 240점 88리바운드 37어시스트 44스틸 6블록 3점슛 40개 성공(31.0%)이란 기록을 남겼다.

지난 시즌 출전시간 1위인 송교창은 54경기가 아닌 42경기 만으로도 1336분 22초를 뛰었다. 지난 시즌 921분 이상 출전한 국내선수만 20명이다. 송교창은 시즌 초반 15경기 만에 251점을 기록했다. 241점 이상 득점한 국내선수는 32명이다.

어떤 선수에겐 한 시즌이 아닌 40여 경기만 뛰어도 기록할 수 있는 출전 시간과 득점이지만, 이민재는 이를 위해 보이지 않는 코트 밖에서 땀을 흘리고 흘렸다. 누군가는 하찮게 여기는 승부가 끝난 시간에 코트에 나서 차곡차곡 쌓은 출전시간과 득점이기도 하다.

이민재는 “가비지 타임엔 ‘경기가 끝났는데 뭐 하려고 그렇게 하냐’라며 죽기 살기로 열심히 하는 걸 부끄럽게 여겨 그렇게 하지 않는다. 저는 1분 1초를 뛰더라도 최선을 다했고, 그럴 때 경기를 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이대로 시즌이 끝날 거 같아도 갑자기 기회가 오기 때문이다”고 했다.

어쩌면 이름조차 모르는 팬들이 더 많은 이민재는 노력에선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기에 은퇴하는 순간 “농구하며 행복했다”고 말을 할 수 있었다.

◆ 이민재 선수 약력
2010~2011시즌 SK에서 24경기 출전
2011~2012시즌 2011년 6월 LG로 이적 후 30경기 출전
2012~2013시즌 LG와 첫 FA 계약 후 7경기 출전
2013~2014시즌 사인앤트레이드로 KT 이적, 가장 많은 37경기 출전 후 입대
2016~2017시즌 군 복무 기간 중 KT와 FA 계약을 맺어 선수로 복귀
2017~2018시즌 2017년 FA 때 모비스와 KGC의 영입 제안을 받아 KGC를 선택, 3경기 출전
2018~2019시즌 KGC가 출전경기수 미달에도 계약 연장을 선택해 KGC에서 두 번째 시즌 보냄
2019~2020시즌 2019년 5번째 FA에서 KGC와 재계약해 마지막 시즌을 치름

다음은 이민재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2010년 데뷔해 시간만 따지면 딱 10년간 프로 무대에서 활약했다.
24년 동안 아버지 영향으로 농구를 했다. 아버지께서 할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선수 생활을 하기를 바라셨는데 (은퇴해서) 많이 아쉬워하신다. 제 실력으로 10여년 동안 많은 걸 경험하고, 배우고, 의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농구를 하며 좋은 선수도 만나고, 행복한 20대를 지냈다. 몸이 아픈 것도 아니라서 아직 더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쉽다. 실력이 부족하지만, 매시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죽기살기로 했다. 프로는 냉정하기에 살아남기 위해서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다. 그래서 진짜 열심히 했기에 시원섭섭해도 후회는 없다.

처음 2년 계약 후 매번 1년씩 FA 계약을 맺었다.
만감이 교차한다. 프로라서 계약을 연장하려면 보여줘야 하고, 성과를 내야 살아남는다. 매시즌 1초를 뛰더라도 코트에서 제 모든 장점, 할 수 있는 모든 걸 보여주려고 했다. 장시간 출전시간을 보장 받은 적이 없다. 어떤 역할, 임무를 받아서 장시간을 뛰어야 하지만, 짧은 시간이라도 그 임무를 수행하려고 했다.
저를 3&D라고 불러줬지만, 처음에는 수비를 잘 하지도, 3점슛을 많이 던지지도 않았다. 한 가지 특기만 있으면 오래 선수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한다. 팀을 옮길 때마다 고참 선배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한 가지 특기를 살리라고 해서 상대 에이스 수비를 악착같이 하고, 슛도 연습해서 그걸 살렸다. 화려한 기량을 갖춘 선수가 아니라서 매년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열심히 했다. 그래야 계약을 할 수 있으니까.

조언을 해준 기억에 남는 선수가 있나?
SK에서 데뷔했을 때 주희정 형이 대선배이자 룸메이트였는데 첫 단추를 잘 꿰도록 해줬다. 사우나 멤버인데 오래 선수 생활을 하려면 몸 관리를 잘 해야 한다고 했다. 희정이 형도 몸 관리를 잘해서 오래 선수 생활을 했다. 김영환 형, 조성민 형도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줬다. 성민이 형에겐 장점인 슛 도움을 많이 받았다. 슛 자세와 슛 밸런스, 무빙슛 던질 때 움직임 등 슈팅 관련 많은 걸 알려줬다. 영환이 형은 정신력과 마음가짐을 올바르게 해줬다.
선배들에게 조금씩 많이 배웠다. 상남자인 양희종 형이 중심을 많이 잡아줬다. 정신이 해이해지려면, 안일한 마음을 가지면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주고, 선수 생활 마무리를 잘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야기를 해주며 도움을 줬다.

상무 입대 전에 가장 많은 37경기에 출전했다.
KT에 있을 때 전창진 감독님께서 기용을 많이 하셨다. 성민이 형의 뒤를 받치는 선수로 뛰었다. 성민이 형이 전성기라서 움직임도 좋았고,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래서 상대팀의 견제를 당하면 성민이 형의 힘든 부분을 도와주는 역할로 나갔다. 37경기 중에서도 선발 출전(4경기)도 있었다. 전략적으로 기용도 해주셔서 그 기대에 보답했다. 경기를 많이 뛰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시즌이다.
그 때가 프로 4년차였는데 KBL에서 4시즌까지 뛰면 나이가 차서 무조건 군대를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팀에선 입대를 미룰 수 없는지 이야기를 했는데 그 때 못 가면 군대를 못 가는 줄 알았다. 그 때 만약 계약을 했다면 좀 더 길게 계약을 할 수 있었다. 군대 문제로 타이밍이 안 좋았다.

두 자리 득점을 4번 했는데 그 중에 2013년 10월 25일 동부와 경기서 13점을 올린 게 최다 득점이다.
제가 코트에 나갈 때 김도수 형, 송영진 형, 성민이 형 등 형들이 경기를 잘 해서 점수 차이가 벌어져 있었다. 제가 마지막이라도 득점을 차곡차곡 쌓았다(3쿼터 4점, 4쿼터 9점). 그 이후 출전 기회를 더 많이 받았던 거 같다. 전창진 감독님께서 기회를 주자 열정적으로, 악착같이 뛰는 걸 인상적으로 보셔서 그 이후 많이 출전시켜 주셨다. 감독님께서 저에게 죽기살기로 열심히 한다고 말씀하셨던 게 기억에 남는다. 승부가 결정된 뒤에 들어가더라도 죽기살기로 한결같이 뛰었다.

선수 생활을 돌아보면 군 복무할 때 KT와 힘들게 재계약을 했던 게 제일 기억에 남을 듯 하다.
농구 열망이 강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제대하기 직전으로 휴가를 몰아놓은 뒤 KT에서 테스트를 봤다. 제가 입대 전에는 KT 주장이었던 송영진 코치님이 아니었다면 선수생활을 연장하지 못했을 거다. 제가 기량을 떠나서 열심히 하는 걸 좋게 보셨다. 휴가를 나갔을 때도 따로 만나서 맛있는 것도 사주셨다. 지금은 그래서 편하게 연락을 할 수 있다. 부대로도 공 두 개를 보내주셨기에 볼을 만지고 드리블 연습을 해서 볼 감각을 안 잊었다. 송영진 코치님이 조동현 감독님께 선수 복귀 의사를 전해주셔서 테스트를 보고, 몸 상태도 좋아서 계약할 수 있었다.
7월이 전역이었는데 5월에 FA 계약을 하는 게 이례적인 사례라고 하더라. 사실 저도 안 될 줄 알았다. 농구를 하고 싶으니까 부딪혀보자며 도전했던 거다. ‘올해 안 되면 내년에 다시 도전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나의 특기를, 농구를 좋아하고,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했다. 입대 전 37경기를 뛰었는데 그 때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면 은퇴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을 거다. 제가 농구하는 모습을 부모님도, 친구들도 좋아해서 군대에 있을 때 농구하는 모습을 계속 그렸다.

매년 FA 계약을 체결했는데 2018년에는 경기수 미달에도 계약 연장이 되어 FA 시장에 나가지 않았다.
그 때는 팔을 다쳤다. 한 시즌을 거의 못 뛰었다. 아마 2,3경기(3경기) 밖에 못 뛴 시즌일 거다. 동호회 농구를 하다가 팔이 부러졌다. 농구 인생에서 제일 크게 다쳤다. 수술도 두 번 했다. KGC 입장에선 저를 활용하려고 영입한 거였다. 시즌을 시작하기도 전에 다쳐서 미안했는데 팀에서 기회를 주셨다.
팀에서 ‘나이도 어리고, 활용을 하려고 영입했기 때문에 이렇게 은퇴한 게 아쉽다. 네가 보여주라. 그럼 더 좋은 계약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거의 1년을 쉬다가 시즌 막판 2~3경기 뛰었다. 비시즌 훈련을 열심히 하고, 좋은 모습을 보여서 다음 FA 때 계약을 했다. 가장 큰 부상을 당해서 마음을 비웠는데 한 시즌 더 기회를 줘서 자동 연장이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연장이나 계약을 하지 못하고 은퇴를 했다.
올해 보여준 게 없다. 우리 선수들이 잘 해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 선수들이 워낙 좋고, 제가 경쟁에서 밀렸다. 아쉽지만, 팀 성적이 좋아서 뒤에서 박수를 쳤다. 시즌을 치르면서 생각을 많이 했다. ‘제2 인생을 생각해야 할 때가 되었구나’라고 마음을 비우고 정리를 했다. FA 시장에 나간 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선수생활 돌아본다면?
24년 동안 농구를 했는데 군산중 농구부 코치셨던 아버지에게 농구를 배웠다. 아버지라서 다른 선수보다 편애하지 않으려고 저에게 더 혹독하게 하셨다. 우여곡절이 있고, 힘들어도 참고 견뎠다. 운동을 관두려고도 많이 했다. 엄청 잘 했던 선수들도 힘들거나 다른 것에 현혹되어서 그만뒀다. 저는 어쩌면 가늘고 길게 왔다. 진짜 농구를 잘 해서 출전시간을 보장받으며 꾸준하게 한 건 아니다. 1년씩 연장을 하면서 프로 생활을 어렵게 했다.
어느 친구가 저에게 존버(오래 참으며 끝까지 견디고 버티는 것)라고 했는데 오래 버티는 자가 이긴다는 말 같이 선수생활을 했다.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한다. 은퇴를 결정하고 나서 수고했다고, 고생했다고 연락을 많이 받았다. 프로가 경쟁이 치열하다는 걸 아는데 10여년 버틴 건 잘 한 거라고 해줬다. 30살까지 선수생활을 하는 게 목표였는데 34살까지 이어와서 ‘저도 잘 해왔구나’라고 생각했다.
2군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고,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많았고, 군대 갔다 오면 선수생활을 할 수 있을까 걱정도 했다. 일반 군대를 다녀와서도 34살까지 선수생활을 한 건 남들 쉴 때 더 열심히 노력을 했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사람이 간사한 건데 제가 일부러 개인운동하는 모습을 더 보여주려고 했다. 남들보다 더 한다는 걸 보여줘야 경기를 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간절했다. 안쓰럽기도 하다. 경기를 뛰어야 제가 어떤 선수인지 알 수 있고, 보여줄 수 있다.
3&D라고 제가 평가 받는 건 이런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어쩌면 남들보다 열심히 하는 걸 연기를 한 거다. 솔직히 말해서 모든 선수들이 열심히 한다. 다 열심히 하는데 제가 똑같이 열심히 하는데 더 부각되거나 어필하려면 더 죽기살기로 한다는 걸 보여줬어야 한다.
여러 감독님께 그렇게 기회를 받고 1년씩 선수 생활을 연장했다. 그래서 저에게 잘 했다고 박수를 쳐주고 싶다. 업적을 남긴 건 아니지만 2010년부터 2020년까지 매년 살얼음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 치며 열심히 했다고 생각한다. 전 항상 낭떠러지 앞에 서 있었다. 시즌이 끝나도 편하게 쉰 적이 없다.

주전으로 뛰기보다 이민재 선수처럼 출전기회를 바라며 노력하는 후배 선수들이 더 많다. 그들에게 한 마디를 해준다면?
전 항상 준비를 했다. 보통 시즌 초반과 중반까지 안 뛰고 2군 경기에 나가면 ‘전력에서 제외되었구나, 이제 그만해야겠구나, 경쟁력이 없구나’ 하면서 포기를 한다. 그리곤 준비를 안 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시즌 막판 5라운드나 6라운드에 선수들이 다치는 등 우연찮게 기회가 온다. 그 때 몸을 만들어놓은 것과 멍하게 있었던 건 코트에 나갔을 때 다르다. 그래서 몸을 만들고 준비해야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시즌 중반까지 못 뛰다가 후반에 경기에 나선 적이 있다. 감독님의 전략 경기로 벤치 선수를 선발로 내볼 수도 있다.
기회가 오면 그게 기회인지 모른다. 팀에서는 기회를 줬다고 생각하는데 그 선수는 준비를 안 해서 그게 기회인지 모르고 지나치곤 한다. 그래서 항상 시즌 끝날 때까지 기회가 무조건 오니까 준비를 해야 한다. 그 기회가 언제 올지 모르니까 준비를 해야 한다. 열심히 하면 감독님께선 언제나 기회를 주신다. 그 기회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나오면 영원히 기회를 못 받는다. 신인이거나 어린 선수들을 보면 시즌이 안 끝나는데도 내년에 뭘 해야지 생각하는 걸 보면 안타까웠다.

아시아 쿼터 제도가 생겨 일본 B리그 진출도 가능하다.
일본을 가면 경기를 뛸 수 있다. 올해 경기를 많이 뛰고 싶었지만, 팀에 쟁쟁한 선수가 많아서 경기를 못 뛰었다. 그래서 아쉬운 마음이 컸다. 뛰면 뭐라도 보여줄 수 있고, 경쟁력이 아직 있다고 생각한다. B리그에서 제안이 오면 고민을 하겠지만, 제가 가려고 알아보는 건 억지 같다. 좋은 조건을 받는다면 하고 싶은 의지는 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달라.
농구를 하면서 4팀에서 뛰었다. 좋은 선수들, 좋은 지도자들,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다. 김현중 형, 서장훈 형, 전형수 형과도 같이 했고, 성민이 형, 도수 형, 영진이 형, 희정이 형, 희종이 형, 영환이 형 등 이런 선수들과 같이 지내고 생활을 했다. 오래 선수 생활을 해서 가능했다. 농구를 하면서 성격도 변하고 제 역량을 많이 키웠다. 농구를 하면서 농구만 한 건 아니다. 농구 외적으로 역량을 키우며 많이 배웠다.
농구를 하며 행복했다. 농구를 하며 만난 사람들이 다 좋았다. 저를 응원해주신 팬들도 계신다. 저보다 더 많이 아쉬워하시더라. 저를 응원해주신 팬들께서 매시즌 챙겨주셔서 감사한 마음과 고마움을 전한다. 저를 지도해주신 은사님도, 선수들에게도 감사함을 드린다. KGC 선수들과 얼굴을 보며 인사를 못 했지만, 저는 은퇴해도 밖에서 응원할 거고,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사진_ 점프볼 DB(박상혁, 유용우, 홍기웅, 문복주 기자), KBL 제공

점프볼 / 이재범 기자 sinae@jumpbal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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