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를 찢는 상상, '불륜'에도 '명품'이 있다

이태훈 기자 2020. 5. 16.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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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하며 사적인 플레이리스트]①불륜
'인디에어'부터 '화양연화'까지
명작으로 남은 '불륜영화' 5편

①불륜

관록의 여배우 김희애를 앞세운 한 불륜 치정 드라마가 오늘(16일) 종방이다.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고 걸죽하게 욕 먹는 동안 시청률은 치솟아 어느새 25% 안팎. 극중 지선우(김희애)는 말한다. “결혼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아요. 판돈 떨어졌다고 가볍게 손 털고 나올 수 있는 게임이 아니라고요.” 왜 그걸 모르겠나. 그래서 인간은 영화를 만들었다.

'불륜 영화'에도 명작이 있다. 그 포스터들.

영화는 도덕책이 아니다. 교과목으로 따지자면 오히려 ‘사회’나 ‘과학’에 가까울 것이다. 고대로부터 이야기는 인간의 상상을 그럴듯하게 풀어내는 판타지였다. 그 상상 속 일탈이 사회적 금기를 넘어설 경우, 관객의 판단을 가르는 것은 어쩌면 설득력이다. 애정이란 어차피 교통사고 당하듯 덜커덕 치인 뒤에야 깨닫는 것. 어떤 영화는 자기 골대 앞부터 차근차근 공격을 빌드업하는 EPL의 리버풀처럼 상황과 계기를 쌓아올려 개연성의 마법을 건다. 스트라이크 존 잘 잡히는 날의 류현진처럼 구석구석 찔러넣는 제구로 옴싹달싹 못하게 옭아매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70m 단독 드리블하며 열 명쯤 제치고 원더골을 넣는 손흥민처럼 정신차릴 틈을 주지 않고 폭풍질주하는 영화도 있다.

‘불륜 영화’에도 명작이 있다. 지나치게 ‘에로 에로’하거나 잔인한 영화들은 뺐다. 영화 잘 뽑아내기로 이름난 명감독과 무슨 짓을 해도 믿을 수밖에 없는 명배우들이 만나 빚어진 ‘작품’만 골랐다. 혹시 평론가나 다른 관객의 평가가 궁금할 경우를 대비해, 요즘 가장 보편적인 영화 메타 리뷰 사이트 ‘로튼토마토’의 평론가·기자 평점 ‘토마토 지수’와 관객 평점 ‘팝콘 지수’를 동봉했다. 지극히 사적이며 사소한 영화들의 플레이리스트, ‘불륜’ 편.

◇인 디 에어(Up in the Air·2009)

평론가 지수 [91%] vs. 관객 지수 {79%}

감독 : 제이슨 라이트먼

주연 : 조지 클루니, 베라 파미가

제이슨 라이트먼 감독의 '인 디 에어'(Up in the Air·2009). /파라마운트픽쳐스

당신이 등에 지고 있는 무게는 얼마인가. ‘라이언 빙엄’(조지 클루니)은 1년 365일 중 322일 비행기를 타며 미국 전역의 구조조정 대상 기업에서 사람을 자르는 베테랑 해고 전문가. 기내 캐리어 안에 다 담기는 인생이 홀가분해 좋고, 집보다 비행기 안이 더 편하다. “삶의 가장 무거운 부분은 인간관계죠. 천천히 움직이면 빨리 죽어요. 우린 일편단심 백조가 아닙니다. 우린 상어예요.” 어차피 같은 종착점을 향해 달려갈 뿐인데, 왜 질척이며 매달리겠는가.

그의 유일한 목표는 항공 마일리지 1000만 마일을 쌓아 세상에 단 7명 뿐인 항공사 플래티넘 고객 카드를 받고 기장과 나란히 앉아 가는 것. 그랬던 라이언의 삶에도 폭풍우가 몰아친다. 신입사원 ‘나탈리’(애나 켄드릭)가 온라인 해고 시스템을 제안해 받아들여진 것이다. 라이언은 출장지에서 자주 만나 사랑을 나눴던, “집보다 비행기가 편하다”는 자신의 닮은 꼴 여자 ‘알렉스’(베라 파미가)를 떠올린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불륜 자체에 관한 영화라기보다, 드라마를 클라이맥스에 올려놓는 소재가 결과론적으로 불륜인 영화. 금융위기로 구조조정과 대량해고가 일상이던 2009년의 미국에서 이런 영화를 만들고 개봉한 제이슨 라이트먼 감독의 패기, 그 눈주름에 익사할 것 같은 조지 클루니와 차가운 눈매로 활짝 웃는 베라 파미가의 아이러니컬한 매력이 돋보이는 영화. 빈틈없이 짜여진 드라마, 간결하나 묵직한 대사를 따라가다 보면, 쫓기듯 달려가는 인생과 인간을 부속품 취급하는 산업자본주의, 사랑과 죽음의 의미 같은 크고 작은 단상이 시퀀스와 대사들 사이에 삐죽삐죽 고개를 내민다. 2010년 미국 아카데미 6개 부문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엔 실패했다.

◇클로저(Closer·2005)

[68%] vs. {81%}

감독 : 마이크 니콜스

주연 : 나탈리 포트먼, 주드 로, 줄리아 로버츠, 클라이브 오웬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클로저'(Closer·2005). /퍼스트런

이 아름다운 남녀들이라면 사랑의 작대기가 이러저리 꼬이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부고(obituary) 전문기자인 ‘댄’(주드 로)은 출근길에 우연히 마주친 여자 ‘앨리스’(나탈리 포트만)에게 빠져든다. 앨리스는 뉴욕 출신의 스트립 댄서. 그녀의 이야기로 소설가의 꿈을 이뤘지만, 댄은 표지 사진을 찍기 위해 만난 사진작가 ‘안나’(줄리아 로버츠)에게 앨리스에게선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안나에겐 약혼자 ‘래리’(클라이브 오웬)가 있다. 그 다음은? 래리는 안나와 댄의 관계를 눈치채고, 래리와 앨리스의 관계가 깊어진다.

이 정신없는 막장 드라마를 만든 감독은 마이크 니콜스. 사이먼 앤 가펑클의 ‘사운즈 오브 사일런스’, ‘미시즈 로빈슨’ 같은 노래로도 오래 기억되는 영화 ‘졸업’(1967)의 감독이다. ‘워킹 걸’(1988), ‘남아있는 나날’(1993) 등에서도 음악을 다루는 놀라운 솜씨를 보여줬다. 이 영화 ‘클로저’에서도 ‘The Blower’s Daughter’가 데미언 라이스의 미성으로 관객의 가슴을 찢어 놓는다.

◇우리도 사랑일까(Take This Waltz·2011)

[79%] vs. {57%}

감독 : 사라 폴리

주연 : 세스 로건, 미셸 윌리엄스

사라 폴리 감독의 '우리도 사랑일까'(Take This Waltz·2011). /티캐스트

‘낯선 남자에게 끌리는 정숙한 부인’이라는 컨셉은 불륜을 다루는 동서고금 문학과 예술의 클리셰. ‘우리도 사랑일까’는 이 컨셉을 정직하지만 정서적으로 깊이있게 현대로 옮겨온다.

대체로 아내가 바람나는 불륜 영화의 남편들은 순하고 착한데, 이 영화도 그렇다. 결혼 5년차인 프리랜서 작가 ‘마고’(미셸 윌리엄스)에게는 다정하고 유머러스한 남편 ‘루’(세스 로건)가 있다. 겉으로는 흠잡을 데 하나 없는 아름다운 부부. 그런데 마고가 출장길에 우연히 젊은 남자 대니얼을 만나게 되고, 둘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서로에게 알 수 없는 끌림을 느낀다. 설상가상, 대니얼이 바로 이웃에 산다는 걸 알게 된다. 그 뒤는 예상한 대로다.

이 영화의 뻔한 이야기에 놀라운 개연성을 부여하는 것은 무엇보다 배우 미셸 윌리엄스다. 윌리엄스는 따뜻하고 안온한 부엌에서 남편을 꼭 안아주는 친절하고 아름다운 아내지만, 가끔 들이닥치는 알 수 없는 외로움과 허무의 감정에 무너져 내린다. 채울 수 없는 공허의 깊이를 표현할 때 미셸 윌리엄스는 가장 완벽한 그릇을 가진 여배우 중 한 명이다. 그 공허의 틈새를 낯선 흥분이 비집고 들어올 때, 저항은 소용없다. 끝내 휩쓸려 버리는 수밖에.

배우로도 친숙한 사라 폴리 감독은 버티고 버티다 끝내 무너지고 모든 걸 놓아버리는 여성의 심리적 변화 과정을 세미한 붓으로 수채화를 그리듯 부드럽게 터치하며 이끌어간다. 정서적 긴장감이 상당하고, 카메라워크도 신선하다. 무엇보다 이 영화, 클라이맥스의 타임랩스 회전 베드씬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다. 모든 걸 놓아버린 뒤 폭주하는 위험한 열정을 시청각적으로 강렬하게 전시한다.

◇언페이스풀(Unfaithful·2002)

[50%] vs. {68%}

감독 : 애드리언 라인

주연 : 다이앤 레인, 리처드 기어

애드리언 라인 감독의 '언페이스풀'(Unfaithful·2002). /에이라인

리스트의 영화들 중 평점이 가장 낮다. 작품 자체로 큰 인정을 못 받았다는 뜻. 하지만 이 영화, 감독이 애드리언 라인이다. 킴 베이싱어와 미키 루크의 ‘나인 하프 위크’(1986), 마이클 더글러스와 글렌 클로스의 ‘위험한 정사’(1987), 로버트 레드포드와 데미 무어의 ‘은밀한 유혹’(1993), 그리고 ‘로리타’(1997)를 만드신 그 분이다.

성애 묘사에 있어선 다른 감독의 추종을 불허하는 내공을 쌓아온 감독. 이 영화의 말초적 흥분은 사전적 의미 그대로 손가락 발가락 끝까지 감전되듯 퍼져 나간다. 신경쇠약 직전의 정숙한 아내를 연기하는 배우가 다이앤 레인이라면, 금기를 넘어서는 두려움과 떨림은 그녀의 정숙한 얼굴을 통해 수십 배로 증폭된다.

◇화양연화(In the Mood For Love·2000)

[90%] vs. {94%}

감독 : 왕가위

주연 : 장만옥, 양조위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In the Mood For Love·2000). /굿타임엔터테인먼트

이 영화를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줄거리와 시공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가장 아름다운 불륜 드라마.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의 양조위와 장만옥이 그 안에 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 숨이 막힐 것 같다. ‘breathtaking’이라는 형용사는 이런 영화를 위해 존재한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 화양연화. 하지만 1962년 홍콩, 상하이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아파트에 동시에 온 두 부부의 일상은 화양연화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무역회사 비서 ‘리첸’(장만옥)과 그녀의 남편, 지역 신문사 기자 ‘차우’(양조위)와 그의 아내. 리첸은 남편의 일본 출장이 잦아서, 차우는 아내의 직장이 호텔이어서 각각 혼자 있는 시간이 길다. 리첸과 차우는 우연히, 자주 부딪치며 가까워진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차우는 리첸이 아내와 똑 같은 핸드백을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리첸은 차우의 넥타이가 남편 것과 똑같다는 걸 깨닫는다.

이런 저런 이야기보다, 이 영화는 영어 제목 ‘In the mood for love’가 웅변하듯 어떤 분위기에 관한 영화다. 사랑, 고독, 아픔, 외로움 같은 깊고 무거운 감정을 둘러싸고 묵직하게 고여 있는 공기에 관한 영화다. 탕웨이 이전에는 어떤 여배우도 흉내낼 수 없었던 장만옥이 입은 치파오의 우아한 스타일, 고개를 숙이거나 턱을 들 때 왕조위의 얼굴에 드러나는 외로움, 손끝의 작은 떨림 하나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두 배우의 연기, 그리고 한없이 완전함에 가까운 감독 왕가위와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의 미장셴과 카메라. ‘마스터피스’다.

◇번외편

'명작'이 된 불륜 영화, 번외편 포스터들.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메릴 스트립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1995, 90%/87%)는 두 말 할 필요없는 영화. 교통사고처럼 치이는 갑작스러운 사랑에 관한 가장 소박하고 우아한 이야기일 것이다. 소설도 재미있고, 뮤지컬도 명작이다.

이안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2005, 87%/82%)도 말 보태면 입만 아픈 걸작이다. 각각 미셸 윌리엄스와 앤 해서웨이를 아내로 두고도 두 남자 히스 레저와 제이크 질렌할이 평생 바람을 피운다. 뭐, 히스 레저와 제이크 질렌할이니까 이해되는 것으로 칠 수밖에. 많은 다른 이들처럼, 가끔 먼저 간 히스 레저가 그립다.

고민하다 리스트에 올리지 않은 작품들도 있다. 리즈 시절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의 ‘아이즈 와이드 셧’(1999·감독 스탠리 큐브릭)은 맨살이 너무 많이 나오므로 아쉽지만 탈락. 멋진 영화임엔 분명하나, 당대에 끼친 엄청난 충격을 그 추억 그대로 간직할 수 있도록 마이클 더글러스와 글렌 클로즈의 ‘위험한 정사’(Fatal Attraction·1987·감독 애드리언 라인)도 탈락. 줄리앤 무어와 리암 니슨 부부 사이에 젊고 치명적인 아만다 사이프리드가 끼어드는 ‘클로이’(2009·감독 아톰 에고이앙)는 불륜 드라마보다는 심리 스릴러에 가깝다고 생각돼 뺐다.

사적이며 사소한 리스트니까, 부디 널리 이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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