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어겨서라도 전국민 대화 감시하라..'n번방 방지법'의 역설

정진우 2020. 5. 13.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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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 기사에게 배달할 물건 중 폭탄이 있는지 미리 확인해 폐기 처분하라는 것과 같은 말도 안 되는 법안입니다.”
한국인터넷기업협회 관계자는 지난 7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를 통과한 전기통신사업법·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이렇게 평가했다. 일명 ‘텔레그램 n번방 사건 방지 후속법안’으로 불리는 이 법안은 네이버·카카오 등 부가통신사업자에게 온라인을 통해 유통되는 불법 촬영물에 대한 차단·삭제 의무를 부과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불법 촬영물을 소지만 해도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하는 n번방 사건 방지법이 지난 4월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이후 논의된 n번방 사건 관련 후속 법안에 해당한다. 해당 법안은 법제사법위원회를 거쳐 다음주 소집이 점쳐지는 본회의에 상정을 앞두고 있다.


"현행 법 위반하라는 취지의 법안"

지난달 23일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2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텔레그램 n번방' 재발 방지 등을 위한 디지털 성범죄 근절대책 당정협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n번방 사건 방지 후속 법안은 사업자가 불법 촬영물을 차단하는 의무를 다하지 못할 경우 3년 이하 징역이나 1억원 이하 벌금에 처하는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과, 사업자가 불법 촬영물 유통을 방지할 책임자를 지정하도록 하는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으로 구성돼 있다. 당초 웹하드에 국한했던 ‘음란물 유통 금지를 위한 기술 조치 의무 조항’의 부과 대상을 카카오톡 등 통신 사업자 전반으로 확대한 것이다.

업계에선 ‘실행 불가능한 법안’이란 비판이 많다. 특히 온라인 메신저의 경우 기술적 검열 작업을 하기 위해선 대화내용과 전송되는 영상물의 불법 여부를 확인하는 사실상의 감청·감시가 필요하다. 또 기술적으로 가능하다 해도 현행 통신비밀보호법은 범죄수사 목적을 제외하고는 통신 감청과 통신사실 확인자료 제공 등을 금지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한 메신저 업체 관계자는 “수억개의 대화방에서 하루에 셀 수 없을 만큼의 대화와 영상 공유가 이뤄지는데 이를 검열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설혹 가능하다 해도 개인 간 대화를 감시·감청하는 것은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에 해당하는데 현행 법을 위반하라는 취지의 법안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1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체감규제포럼, 한국인터넷기업협회 등 주최로 '20대 국회의 인터넷규제입법 임기 말 졸속처리 중단 촉구' 기자회견이 열렸다. [뉴스1]

한국인터넷기업협회·벤처기업협회·코리아스타트업포럼 등 국내 정보기술(IT) 기업 3단체는 12일 기자회견을 열고 “20대 국회는 인터넷 규제 입법의 임기 말 졸속처리를 당장 중단하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기자회견을 주재한 김민호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각 법안의 시시비비를 차치하고서라도, 법안을 공청회 한 번 없이 이렇게 졸속으로 처리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각계 의견 수렴을 거쳐 21대 국회에서 재논의할 것을 요청드린다”고 말했다.


여론 떠밀린 '졸속 심사' 고질병
n번방 사건 방지법의 졸속 논란은 지난해 12월 일명 민식이법이 본회의를 통과할 때의 상황과 유사하다. 사건이 터진 후 법안이 급조됐고, 제대로 된 논의 없이 여론에 떠밀려 진행된 데다, 예방이 아닌 처벌 위주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다.

〈YONHAP PHOTO-4399〉 대통령에게 질문하는 고(故) 김민식 군의 부모 (서울=연합뉴스) 이진욱 기자 = 19일 오후 서울 상암동 MBC에서 열린 '국민이 묻는다, 2019 국민과의 대화'에서 고(故) 김민식 군의 부모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질문하고 있다. 김 군은 지난 9월 충남 아산의 한 어린이보호구역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던 중 교통사고를 당해 숨졌다. 국회는 어린이보호구역에 과속 단속 장비 설치 등을 의무화하는 '민식이법'을 발의했다. 2019.11.19 cityboy@yna.co.kr/2019-11-19 20:44:00/〈저작권자 ⓒ 1980-2019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민식이법은 지난해 10월 11일 강훈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스쿨존 내 단속 카메라 의무 설치 및 스쿨존 내 12대 교통 중과실로 인한 사망 사고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아 발의한 법안이 시초다. 사흘 후 이명수 미래통합당 의원도 처벌범위를 확대하는 법안을 내면서 일이 커졌다. 처벌 범위를 한정한 '12대 중과실'이라는 표현이 사라지면서 모든 과실사고가 대상이 됐고 사망 사고뿐만 아니라 상해 사고까지 가중 처벌 대상으로 삼자는 내용이었다.

발의 당시 관심을 받지 못한 채 표류하던 민식이법은 지난해 11월 19일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과의 대화’에서 김민식군 부모님을 만난 뒤 “운전자들이 스쿨존을 쉽게 인식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해 실행하라”고 지시하면서 급물살을 탔다.

대통령이 지시한 지 이틀 만에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는 법안심사소위에서 만장일치로 법안을 통과시켰고, 6일 뒤 행안위 전체회의를 통과해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됐다. 법사위에선 이명수 안에 가까운 형태의 수정안이 확정돼 일사천리로 통과됐다. 당시 법사위 전체회의에선 법안 제안설명을 서면으로 대체했다. 토론 역시 3분여 만에 끝났다.


법안 내용조차 모른 채 '찬성'
당일 법사위 회의록을 살펴보면, 유일하게 토론에 참여했던 금태섭 민주당 의원은 “현재 과실범은 다 금고형으로 하고 있지 않냐”며 민식이법의 형량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당시 김오수 법무부 차관이 “금고보다는 징역형 정도로 해서 어린이를 좀 더 강하게 보호하자 이런 의지를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고 답하며 토론이 종결됐다.

소년중앙_민식이법

민식이법은 졸속 심사와 무관심 논란 속에 지난해 12월 10일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에 따라 스쿨존 교통사고로 어린이가 사망할 경우 가해자는 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을, 다칠 경우엔 1년 이상 15년 이하 징역이나 500만원 이상 3000만원 이하 벌금 처벌을 받는다.

민식이법은 국민 실생활에 파급력이 큰 법안임에도 국회에서 허술하게 다뤄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당시 예산안 심사 등 산적한 현안 속에서 상당수 의원들이 법안의 내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고, 본회의장엔 법안 요지가 담긴 서면 자료조차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민식이법에 찬성표를 던진 민주당의 한 의원은 “법사위를 거쳐 올라온 법안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봤다”고 말했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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