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극장] 종로 네거리가 좁았던 여성운동가 박신우

2020. 5. 12.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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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임경석의 역사극장]1927년 혜성처럼 등장한 근우회 책사이자 맹렬한 실행가, 갑자기 흔적 없이 사라져

1933년 11월28일 소련 국가정치보위부에 체포된 이튿날 찍은 박신우 사진. 표정에서 당혹감과 공포감이 느껴진다. 임경석 제공

박신우(朴新友)는 여성운동계에 혜성같이 나타났다. 1927년 초부터 사회주의 성향의 여성단체 여성동우회에 출입하더니, 3월8일 국제여성의날을 기점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국제무산부인데이’라고 불렀다. 이날을 기념해 여성동우회는 서울 종로2가 YMCA회관에서 대규모 강연회를 열기로 했는데, 여성운동계 유력자로 구성된 강사 명단 7명 속에 박신우도 포함돼 있었다. 그가 맡은 강연 제목은 ‘3월8일과 조선 여성’이었다.

조직 활동 계획 세우고 전국 돌며 강연회

박신우는 지방 강연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단지 여성 의식을 계몽할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 여성단체 조직 가능성을 확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잡지 <부녀세계>가 주관하는 지방 순회강연에도 선뜻 참가했다. 1927년 4월 창간한 <부녀세계>는 3·1운동 이후 발간된 <여자시론>(1920), <부인>(1922), <신여성>(1923), <부녀지광>(1924) 뒤를 잇는 대표 여성지였다. 잡지사는 창간호 발행을 기념해 남부조선 순회강연 사업을 벌였다. 4월17일 기자 2명이 출발하고 같은 달 23일에는 박신우를 포함해 후발대 4명이 경성을 떠났다. 순회 기일은 약 보름 예정이었고, 첫 강연지는 전북 이리(현재 익산)였다.1

박신우가 여성운동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근우회 때부터였다. 그는 근우회 발기인 명단 40명에 이름을 올렸고, 그해 5월27일 창립총회에서는 집행위원 21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 식민지 조선의 민족통일전선 기구이자 여성운동을 대표하는 단체의 간부가 됐다. 창립 직후 처음 열린 집행위원회에선 7명으로 이뤄진 상무집행위원에 선임됐다. 핵심 간부가 된 것이다. 상무집행위원은 이름에서도 드러나듯이 매일 상근하는 집행위원이었다. 날마다 출근해 직업적으로 단체 일에 종사하는 직무이니만큼 업무도 많고 권한도 큰 자리였다.

박신우가 맡은 분야는 ‘선전·조직부’였다. 이 분야는 단체활동의 꽃이라 할 만큼 중요했다. 당시 사회주의 비밀결사는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트로이카’라고 부르는 최소 인원 3명으로 집행부를 구성하곤 했는데, 이들의 직무는 으레 총무·선전·조직으로 나뉘었다. 그만큼 중책이었다. 박신우는 그 직무를 능히 감당했다. 취임 뒤 20일 만에 선전·조직 분야의 장단기 사업 계획안을 만들었다.

일본 경찰이 작성한 정보 보고서에 의하면, 6월15일치 근우회 집행위원회 회의 석상에서 박신우는 10개 조목으로 구성된 조직 발전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여학생부’와 ‘노동부인부’ 두 기구를 만들어 지식계급과 노동계급의 여성들을 조직화하며, 조선 각지에 근우회 지부를 설치해 여성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쌓는다는 복안이었다. 조직 계획은 선전 계획과 밀접히 연결돼 있었다. 선전 계획을 들여다보면, 전국을 4개 권역으로 나눠 순회강연대를 파견한다, 각 권역의 요충지에 여름방학 기간을 이용한 강좌를 3주간 개설한다, 연극단을 조직해 전국을 돌게 한다, 근우회 선언문과 선전 전단을 만들어 배포한다, 기관지 <근우>를 발행한다는 등의 내용이 있다.2

1928년 초 남편 김규열과 소련 국경을 넘다

박신우가 작성한 선전·조직 사업 계획 초안은 하나하나 축조 심의 대상이 됐는데, 그 결과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그는 근우회의 책사였다. 사실상 근우회의 활동 계획 전반을 설계했다고 평가할 수 있었다. 도대체 이런 비범한 안목과 수완을 어디서 익혔을까. 나이 서른 살밖에 되지 않은 젊은 여성이 말이다. 놀라운 일이었다.

기획력뿐이랴, 실행력도 출중했다. 박신우는 지방 강연을 위해 빈번한 출장을 마다하지 않았다. 근우회 결성 이후만 보더라도 평남 평양(6월6일), 경기 개성(6월27일), 경기 수원(8월8일), 전북 전주(8월24일), 경성 용산(8월26일), 전남 목포(12월3일), 전남 담양(12월23일)에서 여성 문제 강연회를 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년 내내 조선 전역을 누비고 다닌 셈이다. 신문에 아직 보도되지 않은 사례도 있었을 터이므로, 실제는 이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이 노력은 그대로 조직 확대로 귀결됐다. 창립 첫해인 1927년에 근우회 지회가 설립된 지방은 4곳(전주·목포·담양·김천)인데, 이 중 3개 지회가 상무집행위원 박신우의 출장과 관련됐다. 지부 조직의 75%가 그의 활동 결과였다.

근우회 첫 1년은 활기찼다. 선전·조직부 동료이던 정칠성이 회고한 것처럼 “한참 당년, 근우회의 집행위원들의 멤버는 쟁쟁”했고, 종로 네거리를 좁다고 치고 다니는 그들로 인해 유쾌하고 씩씩한 기상이 넘치던 때였다.3 박신우는 그 활기찬 첫해의 선전·조직 담당 상무집행위원이었다. 근우회의 활력이 그의 헌신과 재능에 힘입었다고 볼 수 있다.

박신우의 신상 정보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박신우란 어떤 사람인가? 더욱이 그의 행적은 이듬해 1928년부터는 어떤 자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사라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박신우의 동향은 뜻밖에 1929~30년 전국학생운동 사건에 연루된 함경북도 현지의 한 사회주의자 재판기록에서 발견된다. 그에 따르면, 1928년 1월 중순 매서운 추위가 몰아칠 때였다. 함경북도 최북단의 항구도시 웅기에 박신우가 나타났다. 남편 김규열과 함께 비밀리에 국경을 넘으려 애쓰고 있었다. 부부에게는 월경을 돕는 협력자들이 있었다. 두만강 하구 일대의 지리와 교통에 밝은 현지 비밀결사 동료들이 길안내를 맡았다. 그리하여 청진에서 웅기까지 배로 움직이고, 웅기에선 중국인이 경영하는 마차 한 대를 빌려서 얼어붙은 두만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소련 연해주로 월경하는 데 성공했다.4

박신우의 예기치 않은 월경은 남편과 관련된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의 내부 사정 때문이었다. 1927년 12월10일 은밀히 열린 조선공산당 제3차 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된 김규열이 모스크바 파견 대표로 선출됐다. 소련을 근거지 삼아 코민테른과 관계를 맺고 조선·북간도와 통신 연락을 주관하는 것, 이것이 그에게 부과된 새 임무였다. 박신우·김규열 부부는 임무를 수행하는 데 적합한 경력과 재능이 있었다. 아내 박신우는 러시아 교민 2세 출신이었다. 박아니시야 다닐로브나, 이것이 그의 본명이었다. 그뿐인가. 두 사람은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 동기생이었다. 1923년부터 1926년까지 3년간 코민테른이 제공하는 고등교육 과정을 이수한 사회주의 엘리트였다. 러시아어 구사 능력도 높은 수준이었고,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 소양도 깊었다. 두 사람은 블라디보스토크와 모스크바를 근거지로 하여 조선공산당의 국외 부문 사업을 맡았다.

박신우·김규열 부부가 체포된 소련 모스크바 마르흘렙스키 거리 18동. 이 건물 한쪽에 그들의 거처가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밀류틴스키 소로’로 개칭됐다. 임경석 제공

소련 당국에 간첩 혐의 체포… 55년 뒤 복권

1933년 11월27일 모스크바 도심 동북쪽 마르흘렙스키 거리 18동 49호에 소련 국가정치보위부 요원들이 들이닥쳤다. 그곳에 사는 박신우·김규열 부부를 체포하기 위해서였다. 사유는 ‘일본 제국주의의 스파이 혐의’였다. 이튿날 찍은 36살 박신우의 초췌한 사진에는 중범죄자로 지목된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대한 당혹감과 공포감이 드러나 있다.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연루자가 더 있었다. 사건 번호 ‘P-37359’에 연루된 사람들로는 윤자영, 김영만, 김중한 등도 있었다. 누구 할 것 없이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의 간부이거나 열성 활동가였다. 1927년 말 당이 분열된 뒤 서상파로 지목된 사람들로, 일본의 탄압을 피해 소련에 망명한 사회주의자였다. 연루자가 더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직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지 않았다. 가장 먼저 체포된 이는 1933년 5월14일 김중한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6개월 먼저 구금돼 오랫동안 취조를 받았다. 다른 연루자들의 체포 일시는 거의 같았다. 박신우·김규열 부부는 11월27일, 윤자영과 김영만은 그다음 날이었다.

정치보위부 취조관들은 김중한이 스파이임이 틀림없고 그와 친교를 맺은 모든 조선인 망명자도 그렇다고 단정했다. 하지만 증거는 진술뿐이었다. 김규열의 심문기록을 보면, 그에게 들씌워진 혐의는 이미 밀정으로 판명됐다고 간주하는 김중한과 연락을 주고받은 점, 코민테른의 지휘나 승인 없이 조선과 만주로 사람을 파견하거나 직접 왕래한 점 등이었다. 소련 비밀경찰의 안목으로 보면 코민테른의 지도도 받지 않은 채 일본 영토와 세력권으로 왕래하거나 통신을 주고받은 행위는 스파이 행위나 다름없었다.

No.P-37359 사건은 바로 ‘소련 국가폭력에 의한 조선공산당 서상파 망명자그룹 탄압 사건’이었다. 소련 정치보위부는 피억압민족의 해방을 위해 투쟁한 혁명가들에게 ‘일본제국주의의 스파이’라는 모욕적인 범죄의 낙인을 찍었다. 그로부터 다시 6개월 뒤 사건 관련자 가운데 김규열, 김영만, 김중한에게 총살형이 집행됐다. 1934년 5월21일이었다. 다른 두 사람은 한두 등급 아래 처분을 받았다. 윤자영은 노동수용소 8년 징역형, 박신우는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5

너무 뒤늦게 찾아온 정의

노동수용소 이후 박신우의 운명에 대해서는 아직 알지 못한다. 관심 갖고 주시한다면 언젠가 드러날 것이다. 이 탄압 사건의 피해자들은 뒷날 소련의 국운이 저물어가던 1989년에야 비로소 소련 정부로부터 복권됐다. 55년이 지난 뒤였다. 너무나 뒤늦게 찾아온 정의였다. 그것을 정의라고 부를 수 있 을까.

범죄의 낙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남아 있다. 기나긴 망각의 세월이 지금도 계속된다는 점이다. 박신우·김규열 부부를 비롯해 소련 국가폭력에 의한 탄압 사건 희생자들은 조선혁명에 헌신했던 사람들이다. 그 무명의 헌신을 계속 잊고 살아도 좋은 것인가.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1. <婦女世界 巡廻隊 강연>, <조선일보> 1927년 4월25일치.2. 경성 종로경찰서장, ‘근우회 집행위원회의 건’, 1927년 6월17일. ‘사상 문제에 관한 조사자료’ 2,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3. 장원아, ‘근우회와 조선여성해방통일전선’, <역사문제연구> 42, 392쪽, 2019년.4. 조선총독부 도순사 細上玖市, ‘金河龍 신문조서’, 1930년 7월2일.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50 (동맹휴교사건 재판기록 2), 2002년.5. <스탈린시대 정치탄압 고려인 희생자들(자료편)>, 한국독립운동사자료총서 제48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715쪽, 734쪽, 740쪽, 745쪽, 764쪽,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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