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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도 美·中 정부도 굽신 ‘슈퍼 을’ ASML

  • 강승태 기자
  • 입력 : 2020.05.08 15:21:28
  • 최종수정 : 2020.05.08 15:44:52
‘갑을관계’란 말은 계약서상 계약 당사자를 순서대로 지칭하는 법률용어다. 하지만 의미가 변질돼 지금은 상하관계 의미로 많이 사용된다. 산업계에서는 통상적으로 대기업과 협력업체 관계를 갑을관계로 표현한다.

반도체 업계에서 ‘갑’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미국 인텔 등 반도체를 직접 생산하는 기업이다. 하지만 업계에서 드물게 ‘슈퍼 을’로 불리는 반도체 장비기업이 있다. 바로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기업 ‘ASML’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극자외선(EUV) 노광장비(잠깐용어 참조)를 생산하는 기업이다.

반도체 공장에는 최첨단 기술이 모두 모여 있다. 이 중에서도 EUV 장비는 한 대에 1500억~2000억원 할 정도로 초고가 장비다. 세계에서 ASML이 독점 생산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인텔, SK하이닉스 등의 기술이 발전할수록 ASML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다.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기업 ASML이 글로벌 반도체 기업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기업 ASML이 글로벌 반도체 기업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



▶ASML은 어떤 기업?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기업

ASML은 1984년 필립스와 ‘ASM인터내셔널’이란 회사가 합작해 만들었다.

당시 필립스는 광학기술이 우수했지만 반도체 시장에서는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ASM인터내셔널은 반도체 장비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신생 기업이었다. 다만 이전 몇 년간 성장을 뒤로하고 한 단계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했다.

두 기업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반도체 장비 전문기업인 ASML이 탄생했다. ASML은 필립스의 기술과 ASM인터내셔널의 반도체 시장 노하우가 결합해 만들어진 셈이다.

반도체 공정에서는 회로 선 폭이 얇을수록 웨이퍼 한 장에 나오는 칩의 수가 증가한다. 도화지에 크레파스보다 얇은 연필을 이용해야 더 많은 선을 그을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칩에 더 많은 기능을 담을 수도 있다. 글로벌 반도체 기업이 10나노, 20나노 등 나노 단위로 선 폭을 얇게 하는 기술 경쟁을 벌이는 이유다. 선 폭을 얇게 하려면 회로를 그리는 빛의 파장이 짧아야 한다. ASML이 만든 장비를 쓰면 10나노 미만 초미세 공정을 구현할 수 있다. 삼성전자, TSMC 등 반도체 미세 공정을 구현하는 기업은 모두 ASML 장비를 쓴다고 보면 된다.

2000년대 이전만 해도 반도체 장비는 미국과 일본 등이 오랜 기간 주도해왔다. 반도체 노광장비 역시 과거 오랜 기간 캐논과 니콘 등 일본 업체들이 과점해온 분야다. 반도체 장비에 있어 변방인 네덜란드 기업 ASML이 캐논, 니콘을 제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먼저 광범위한 협력을 통한 기술력 확보를 들 수 있다.

ASML은 독일 광학기업 칼자이스와 전략적으로 협력을 맺고 있다. ASML은 칼자이스와 함께 지난 2003년 기존에 없던 새로운 방식의 노광장비를 출시했다. 이후 ASML은 캐논과 니콘을 뛰어넘어 노광장비 시장을 석권했다.

ASML은 칼자이스 외에도 독일, 벨기에 등 인근 국가 업체와 긴밀히 협력 중이다. ASML이 생산하는 극자외선 노광장비 한 대에 들어가는 부품은 어마어마하다. 900개 이상 협력사로부터 관련 부품을 조달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ASML은 기업뿐 아니라 대학, 연구기관, 반도체 기업과 협업에도 적극적이다. 글로벌 반도체 연구기관인 벨기에 아이멕(IMEC)을 비롯해 네덜란드 아인트호벤공대, 독일 아헨공대 등과 산학협력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ASML을 가리켜 ‘유럽 반도체 기술의 집합체’라고 부르는 이유다.

안진호 한양대 신소재공학부 교수는 “ASML의 성공 비결은 오직 노광장비라는 한 분야에 집중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ASML은 인수합병을 할 때도 노광장비 분야에만 집중했다. 2007년 반도체 최적화 솔루션 업체 브리온 인수는 노광장비 경쟁력 확보를 위한 터닝 포인트였다. 2013년 EUV 광원에 대한 독점기술을 갖고 있던 사이머를 자회사로 편입하면서 독보적인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없어서 못 판다는 노광장비

▷1년에 불과 20~30대 생산

‘반도체 최신 장비를 만드는 유일한 기업’.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최근 ASML에 대해 소개한 내용이다.

현재 반도체 장비업계 1위는 미국의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AMAT)다. ASML은 장비업계 2위지만 파급력이 더 크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그 이유는 AMAT와 달리 ASML이 공급하는 장비는 현재로서는 대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ASML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지난해 6월 한창 미중 무역분쟁이 불거질 무렵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네덜란드를 방문했다. 폼페이오가 겨눈 것은 중국을 향한 반도체 장비 수출이었다.

폼페이오는 지난해 네덜란드 총리에게 최신 반도체 장비의 중국 판매 차단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은 ‘반도체 굴기’를 외치며 반도체에 공을 들였다. 하지만 폼페이오 방문 이후 ASML은 중국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생산) 기업 SMIC에 EUV 장비 공급을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결과적으로 중국 반도체 굴기는 ASML의 선택으로 인해 차질이 생겼다. 그만큼 ASML이 글로벌 반도체 업계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크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이 더 커지는 만큼 ASML의 실적도 치솟고 있다. 지난해 매출은 전년보다 8.3% 증가한 118억유로(약 15조2700억원)를 기록했다. 반도체 투자가 줄면서 지난해 세계 대부분 장비기업은 마이너스 성장했지만 ASML은 달랐다.

주가도 고공행진이다.

지난해 초 ASML 주가는 130유로 전후였지만 최근 266유로까지 올랐다. 1년 남짓 기간 동안 주가가 2배 올랐다. 올해 1분기 분위기도 나쁘지 않다. 매출 24억4100만유로(약 3조2489억원), 영업이익 4억2700만유로(약 5683억원)를 기록했다.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각각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9.5%, 27.8% 늘었다.

ASML과 한국 기업 간 밀월관계도 더욱 강화되는 모습이다. ASML코리아 매출 역시 지난해 20% 증가하며 실적 상승세가 꾸준하다. ASML은 최근 한국어 홈페이지를 개설하는 등 한국 시장에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다.

앞으로도 ASML은 반도체 시장에서 계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다. 삼성전자를 포함해 대만 TSMC, 미국 인텔 등이 잇따라 ASML의 EUV 장비를 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세계 파운드리 1위 기업인 대만 TSMC의 행보를 주목할 만하다.

2018년 1분기만 해도 ASML 전체 매출 중에서 대만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3%에 그쳤다. 하지만 지난해 4분기 51%로 급증했다. 지난 2년간 TSMC가 도입을 대폭 확대한 덕분이다. 세계 반도체 1위 기업 인텔 역시 내년 하반기 7나노 공정 기반의 중앙처리장치(CPU) 생산을 위해 EUV 장비 도입을 검토 중이다. SK하이닉스 역시 내년부터 D램 생산에 EUV 장비를 활용한다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반면 ASML의 생산량은 한정돼 있다. ASML이 2019년 생산한 EUV 노광장비는 26대에 불과하다. 올해 목표를 35대로 늘렸지만 많은 수요를 충당하기에 한계가 있다.

이래저래 ‘슈퍼 을’의 지위는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잠깐용어 *극자외선 노광장비 반도체 재료인 웨이퍼에 빛을 쬐어 반도체 회로를 형성시키는 설비다. 현재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회사인 ASML에서 유일하게 생산한다. 1대당 단가가 1500억~2000억원에 이를 만큼 고가다. 10나노 이하 미세 공정을 위한 필수 장비다.

[강승태 기자 kangst@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56호 (2020.04.29~05.05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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