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식때 한번만 내 이름 불러봐" 여직원 글에 팀장 날아갔다

최선욱 입력 2020. 5. 4. 05:01 수정 2020. 5. 4.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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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딥톡]17회.회식문화 바뀌었다지만 여전히 회식이 싫은 직장 여성들
회식 연출 사진. 중앙포토

“회식 때 내 이름 한번만 더 불렀다가는 가만 안둔다. 나도 참는 데 한계가 있어.”

최근 어느 금융회사의 ‘블라인드’(직장인 익명 게시판 커뮤니티)에 한 여성 직장인이 올린 사연이다. 글쓴 이는 팀장을 거론하며 “점심에 불러서 돈이 얼마가 있고 어디에 아파트 있으니 거기서 지내라는 이상한 소리 그만 지껄여. 생각해보니 나한테만 그런게 아니라서…”라는 불만도 함께 적었다. 이 글은 사내에 화제가 됐고, 자체 조사가 시작돼 결국 해당 팀장은 사표를 냈다고 한다.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성추행 사건을 계기로 여성이 겪는 직장 문화가 재조명 받고 있다. 오 전 시장이 주재한 2018년 회식 자리에서 여성 직원들을 양 옆에 앉게 한 모습이 다시 화제로 떠오르면서다.

실제로 직장 성희롱은 회식 자리에서 발생 빈도가 가장 높다. 지난해 3월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성희롱 실태조사’(2018년 9000여명 대상)에 따르면 국내 직장인 8%가 성희롱을 경험했는데, 성희롱이 가장 많이 발생한 곳은 회식장소(43.7%)로 조사됐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2019년 7월)이 시행되기 전인 2018년만 해도 식당의 주변 자리에선 이 같은 말이 들리기도 했다.

오거돈 전 부산시장이 본인 SNS에 올렸던 2018년 회식 사진. 뉴스1

“○○씨는 역시 외모가 되는 스타일이잖아.”
“…….”
“좋은 얘길 했는데 이것도 요즘엔 문제가 되나. 무슨 말을 못하겠네.”
“…….”
“아이고 참 진짜 가만히 있어야겠네.”

지금은 어떨까. 금융 회사에 다니는 여직원 A씨(30대)는 “그래도 2~3년 전과 비교하면 최근엔 많이 나아졌다”고 말했다. A씨는 “몇년 전까지만 해도 ‘아무래도 여직원이 상무님 옆으로 앉는게 낫지’ 같은 발언이 회식 자리에 나오곤 했는데, 지금은 그런 말을 하면 문제가 된다는 걸 남자 간부들도 다 아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자동차 설비업체에 다니는 또다른 여직원 B씨(40대)는 “요즘은 성희롱 발언이나 행동이 회식 자리에서 나오면 항의할 수 있는 분위기고, 징계로까지도 이어진다”며 “‘이것도 성희롱일까’ 하면서 참고 사는 일은 확실히 줄었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회식을 대하는 여성 직장인의 고충은 여전하다고 한다. 화학 회사에 다니는 C씨(30대)는 귀가길 안전을 최고의 고충으로 꼽았다.

“회식 때 술 마시고 집에 가는 길은 아직 여자들에게 위험하지 않나요. 술 취한 남자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알아서 피하는데, 술 취한 여자가 걸어가면 시선 자체가 다르잖아요. 위험한 것뿐 아니라 ‘여자가 밤에 저러느냐’는 손가락질도 받는 분위기가 여전해요.”

중앙포토

그렇다고 해서 회식에 불참하거나 술을 피하기 힘들다는 의견도 있다. C씨는 “주량을 자제하더라도 ‘여자는 적극적이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을까 봐 어느 정도는 동료들과 음주량을 맞춰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털어놨다.


강압적인 회식 있는 조직문화가 근본적 문제
근본적인 문제는 회식 참석에 대한 압박이 있는 기업의 조직문화다. 박점규 직장갑질119 운영위원은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된 뒤, 성희롱 신고나 회식 압박에 대한 신고가 줄어든 건 우리도 느끼고 있다”면서도 “다만 아직 우리 사회에 집단주의가 남아 있고, 기업 조직 전체의 성인지 감수성이 낮은 곳이 많은 점은 위험 요소”라고 말했다. 박 위원은 또 “업무 성과와 상관 없이 ‘윗 사람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문화가 남아 있으면 직장인에 대한 회식 압박과 스트레스는 성별에 관계 없이 계속 가해질 것”이라며 “이런 문화가 성희롱 범죄로도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홍석환 HR전략컨설팅 대표도 “단순히 술 마시고 윗사람과 관계를 좋게 만드는 자리로서의 의미만 있다면 회식은 성별 구분 없이 직장인에게 스트레스가 될 수밖에 없다”며 “윗사람과 사무실이 아닌 공간에서 대화하며 조직문화나 업무 역량을 배우는 자리가 회식이 된다면 여성이든 남성이든 이를 마다할 후배 직원들이 있겠느냐. 결국 리더십의 문제”라고 말했다.

최선욱 기자 isotop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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