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은 부모 몰래 정신과 못간다고?"..혼자 앓는 미성년자들

김지아 입력 2020. 5. 3.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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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드라마 부부의 세계의 극중 중학생 이준영(전진서)은 엄마 지선우(김희애) 몰래 정신과 상담을 받다 이 사실을 들킨 후 혼난다. [JTBC 캡쳐]

“여긴 왜 왔어? 미성년자가 보호자 없이 왜 여기서 상담을 받고 있어?”
한 엄마는 중학생 아들이 자신 몰래 정신과에서 상담받는 장면을 모습을 보고 소리를 지른다. 그러자 아들은 “엄마가 그럴 때마다 숨 막힌다”며 정신과 상담실을 뛰쳐나간다.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 속 한 장면이다.

현실은 어떨까. 부모 몰래 정신과 상담을 원하는 다수 미성년자는 진료거부를 당하고 있다.


“원래 안돼”, “돈 많이 든다”며 진료거부

부모님의 동행없이는 청소년들이 정신과 진료를 받기 어렵다. 게티이미지뱅크

1일 오전 서울 지역 정신과 병원 10곳에 무작위로 전화를 걸어 보호자 없이 청소년 혼자 진료를 받는 게 가능한지 물었다. 10곳 중 9곳은 "보호자 없이는 안 된다"고 답했다. 이유를 묻자 “부모님 이야기를 들어야 정확한 진단을 할 수 있다”, “진료비가 많이 나올 수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일부 병원은 특별한 설명 없이 “미성년자는 원래 법적 보호자가 있어야만 면담을 할 수 있다”는 말만 반복했다.
단 한 곳만 “보호자가 없어도 괜찮다”며 “부모님에게 숨기고 싶으면 비보험 처리를 하면 된다. 대신 진료비는 조금 더 나온다”고 설명했다.

의료진은 미성년자의 진료를 거부해선 안 된다. 의료법 제15조 제1항이 ‘의료인 또는 의료기관 개설자는 진료나 조산요청을 받으면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어서다.
신현호 의료법 전문 변호사(법률사무소 해울 대표)는 “진료 후 해당 미성년자의 극심한 약물남용 및 자해가 의심되면 부모님 동행을 요구할 수는 있다”면서도 “청소년이라는 이유만으로 진료를 봐주지 않는 건 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진료거부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부모님께 알려질 바엔 혼자 참아”

최근 5년새 꾸준히 늘어나는 우울증 치료 환자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보건복지부,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보호자 동행 없이 정신과 상담이 어려운 탓에 청소년들을 혼자 끙끙 앓고 있다. A군(15)은 "높은 성적을 요구하는 부모님 탓에 공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만 살고 싶다는 생각에 정신과를 찾았지만, 보호자와 같이 와야 한다고 해 발길을 돌렸다"고 털어놨다.

정신과뿐 아니라 학교 상담실도 청소년들이 마음껏 이야기를 터놓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디지털성착취 피해자 B양(16)도 "가족에게 피해 사실을 차마 알릴 수가 없어 학교 위(wee)클래스나 신고를 하는 건 꿈도 못 꾼다"고 했다. C군(18)은 "교내 상담센터인 위클래스에서 학교 폭력 건을 상담했는데, 집에 가보니 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고 있어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이처럼 청소년들이 상담할 곳은 부족하지만 우울감을 느끼는 청소년은 매년 늘고 있다. 질병관리본부가 지난해 발표한 ‘청소년의 우울감 경험률 추이(2007~2018년)’를 보면 우울감을 느끼는 청소년은 2015년 23.6%에서 2018년 27.1%로 늘었다. 10명 중 4명꼴이다.


“청소년 고민 절반은 가정에서 시작”

JTBC드라마 부부의 세계 속 지선우(김희애)는 자신의 아들을 정신과 상담해준 의사를 찾아가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이 왜 보호자 몰래 상담을 받고 싶어하는지부터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의 장은채 활동가는 “청소년들이 부모님에게 이야기 안 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을 보호해줄 거란 생각이 없기 때문”이라며 “상담을 받는 사실을 알면 오히려 부모님이 ‘네가 정신이 약해서 그렇다’ ‘그렇게 안 키웠는데 어쩌다 정신병자가 됐냐’고 비난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장 활동가는 “부모에게 알릴수록 정신적 문제를 숨기는 청소년들이 늘어나기 때문에 의료진들이 청소년들의 가정환경 현실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종익 강원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청소년 상담을 받는 이들의 원인을 살펴보면 절반 정도가 가정문제에서 기인한 것이라 이런 경우엔 부모에게 말하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지금도 지역 센터 및 학교 등 미성년자들이 상담할 수 있는 창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상담이 형식적으로만 이뤄져 청소년들의 만족도 상당히 낮다”며 “제 발로 정신과에 찾아가기 전 이들이 편히 상담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확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지아 기자 kim.ji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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