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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과는 또다른 맛’ LP판, 2030 취향 저격하다

입력 : 2020-05-02 10:26:29 수정 : 2020-05-02 10:4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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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크한 아날로그질감에 젊은층 열광 / 마니아 이미지서 벗어나 대중에 인기 / 백예린·신승훈 등 한정판 LP 줄이어 / 대중문화 키워드 ‘레트로’ 등과 조화 / 美선 2019년 LP 1884만장이나 팔려 / 1991년來 최대… 올 CD시장 추월 관심 / 가수 크러쉬, 5000장 소장 오디오쇼도 / 요즘 노래와 달리 음악성 뛰어나 명맥

“오늘만 한 15장 정도 건진 것 같은데요?”

 

모처럼 완연한 봄날씨였던 26일 서울 황학동 ‘도깨비시장’에서 만난 김모(33)씨가 양손에 LP(바이닐)를 들어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이날 오전 11시부터 4시간 넘게 시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입수한 ‘전리품’이었다. 1965년 영국과 미국에서 나란히 데뷔한 핑크 플로이드와 도어스의 앨범이 눈에 띄었다. 호주머니에서 나간 돈은 총 7만5000원. 적은 돈이 아니었지만 그는 “엄청 싸게 산 것”이라고 귀띔했다.

 

“저는 LP 세대는 아니거든요. ‘어릴 때 삼촌이 모았었다’ 정도 기억밖에 없어요. 그러다 29살 때였나… 아무튼 직장에 들어가고 찾은 LP바에서 노래를 듣고 ‘이거 괜찮은데’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때부터 하나둘 모으기 시작해서 지금은 한 700장 정도 있어요.”

 

언제 들어도 항상 깨끗한 음질의 스트리밍에선 접할 수 없는 ‘지지직’하는 아날로그 질감이 그가 LP를 찾는 이유다. 디지털과는 또 다른 ‘맛’이 있다는 거다. “음질은 아무래도 안 좋죠. 근데 그 특유의 유니크한 느낌이 좋아요. 어디 가서 듣기 어렵잖아요.”

 

김씨만의 얘기가 아니다. ‘LP 붐’이야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지만 최근 LP에 관심을 갖는 20·30이 부쩍 늘어나면서 가요계가 크게 호응하고 있다. 한정판 LP 등이 인기를 모으면서 미국에서는 올해 LP시장이 CD시장을 넘어설 것이란 장밋빛 전망까지 나온다. LP 특유의 ‘갬성’이 청년세대 취향을 제대로 ‘저격’하고 있는 셈이다.

◆‘한정판 LP’ 내놓는 가수들

이제 가수들이 LP를 따로 내놓는 것은 그다지 대수로울 일도 아니다.

1980년대 후반 등장한 ‘시티팝’ 장르를 잇달아 내놓으면서 큰 인기를 모은 가수 백예린은 지난해 발매한 첫 정규앨범 ‘에브리 레터 아이 센트 유’를 LP판으로 만들어 다음달 11일 내놓는다. 지난 2월 제17회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올해의 음반상’, ‘최우수 팝 음반’, ‘최우수 팝 노래’ 등 3관왕을 차지한 앨범인 만큼 벌써부터 기대감이 높다.

가수 신승훈도 최근 30주년 기념 앨범 ‘마이 페르소나스’의 LP판 1000장을 발매했다. 예약 주문 하루 만에 동이 났을 정도로 인기였다. 지난해 김현철은 13년 만의 정규 10집 ‘돛’을 발표하면서 아예 “이번 앨범은 처음부터 LP 발매를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이라고 했다. 트로트 가수 송가인도 지난해 첫 앨범 ‘가인’의 한정 LP를 7000장이나 제작했다. 서태지, 신화 등 1990년대 데뷔한 가수들의 최근 앨범과 고 김광석·김현식 등의 헌정 앨범은 거의 대부분 LP로 발매됐다.

26일 서울 황학동 도깨비시장 인근에서 LP 수집이 취미인 직장인 김모(33)씨가 이날 구매한 LP들을 꺼내 기자에게 설명하고 있다.

LP가 그 시절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굿즈’로 확고히 자리 잡은 셈이다. 아무래도 LP는 옛날 음악까지 찾아 듣는 마니아적 이미지가 강하다보니 ‘음악성’을 강조하는 가수일수록 LP 판을 내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에 더해 최근 턴테이블의 접근성이 크게 높아진 점도 한몫한다.

각종 LP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장안레코드’ 관계자는 “옛날엔 턴테이블이 대단히 고가였는데 요즘엔 10만∼20만원대가 많이 나왔다”며 “젊은이들이 술 한두 잔 안 마시면 충분히 살 수 있는 정도의 가격이니 큰 부담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26일 서울 황학동 ‘돌레코드’를 찾은 한 시민이 진열된 LP들을 살펴보고 있다. 돌레코드는 1975년부터 LP판과 카세트 테이프 등을 판매해 온 음반가게로, 지난 2017년 서울시 ‘오래가게’로 선정됐다.

◆“LP가 CD시장 넘어설 것”

우리만의 현상은 아니다. 최근 빌보드 등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에서는 LP가 1884만장이나 팔렸다. 집계를 시작한 1991년 이래 최대치라고 한다. 매출액은 전년 대비 18.7% 증가해 같은 기간 각각 12%, 17.6% 감소한 CD와 다운로드 음원 시장과 대조를 이뤘다.

이런 성장세는 사실상 비틀스가 이끈 것이다. ‘Abbey Road(1969)’ 50주년 딜럭스 에디션 24만6000장 등 미국에서만 비틀스 LP가 47만1000장이나 팔렸다. 퀸(34만5000장), 핑크플로이드(21만7000장), 너바나(14만1000장), 프린스(14만장), 레드 제플린(13만4000장), 마이클 잭슨(12만7000장) 등 대체로 올드록, 올드팝 앨범이 많았으나 빌리 아일리시(25만장) 등 신예 아티스트도 일부 상위권에 포진했다.

전문가들은 이 통계에 중고 거래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실제 LP시장 규모가 훨씬 클 것이라 보기도 한다. 일부에선 “올해 미국 LP시장이 CD시장을 거뜬히 넘어설 것”이란 전망도 흘러 나온다.

수년 전부터 대중문화의 핵심 키워드가 된 ‘레트로’, ‘아날로그’에 LP가 더없이 잘 어울리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태어나자마자 디지털 음원만 듣고 자란 20·30대에게 LP가 일종의 ‘취향’으로 자리 잡았다는 거다. 서울 마포구 ‘도프레코드’나 ‘김밥레코즈’ 앞에 유명 해외 가수들의 LP버전을 구하려 개장 전부터 청년들이 북새통을 이루는 것은 익숙한 풍경이 된 지 오래다.

가수 크러쉬는 지난해 12월 자신이 소장한 LP들을 소개하는 ‘크러쉬네 바이닐봉지’ 오디오쇼 진행을 맡았다. 네이버 제공

물론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는 LP에 담긴 높은 음악성도 빼놓을 수 없다. 지난해 12월 가수 크러쉬는 네이버 플랫폼을 통해 ‘크러쉬(Crush)네 바이닐(Vinyl)봉지’를 공개했다. 그가 소장한 LP를 청취자들에게 직접 들려주고 소개하는 콘셉트의 오디오쇼다. 5000여장 LP를 모았다는 크러쉬는 “90년대 R&B 황금기 음악을 들으며 음악적 정체성을 쌓아왔다”며 LP를 치켜세웠다.

1975년부터 황학동 ‘돌레코드’를 운영하고 있는 김성종(65)씨의 설명이다.

“오랫동안 가게를 운영하면서 느낀 점은 주옥같은 명반은 영원히 살아남는다는 거예요. 오래됐다고 음악성이 낮은 것이 아니죠. 외려 요즘 노래들보다 음악성이 더 높은 것들이 많습니다. 지금 청년 세대가 LP를 통해 이런 노래들을 우연히 하나둘 접하면서 호응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LP는 사실 집에서밖에 못 듣잖아요. 집의 공간성이 각광받고 이를 중심으로 문화생활이 이뤄지는 것도 한 이유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때 침몰하다시피 했던 업계였는데… 다시 호황을 맞이한 것 같아 보기 좋네요.”

 

글·사진=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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