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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정동제일교회-한국 교회 ‘최초’를 보유한 정동길 교회당

입력 : 
2020-04-23 09:44:07
수정 : 
2020-04-24 10: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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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에는 걷기 좋은 길이 꽤 있다. 아마도 궁궐이 있고, 남산과 한강의 존재 덕분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덕수궁 돌담길 혹은 정동길은 운치가 남다른 곳이다. 이 길은 걷고, 보고, 게다가 ‘사색’이라는 것을 하기에도 스스로 쑥스럽지 않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교회당도 그중 하나다.

덕수궁 돌담을 의지하며 걷노라면 서울시립미술관이 나오는데, 이 사거리에서 직진하면 이화여고, 러시아 공사관 터를 만나고, 그 오른편은 미국대사관저와 덕수궁 후문이다. 잠시 어느 길로 갈까 하는 순간, 붉은색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정동제일교회다. 이 교회를 보면 이문세 노래 ‘광화문 연가’가 생각난다.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물론 이 정동제일교회는 노래처럼 ‘조그만’하지는 않다.

사진설명
정동제일교회는 교회 본연에서나 건물로나 역사적 의의가 깊다. 한국 최초의 감리교 교회고, 19세기에 지어진 유일한 건물로 120년 동안 보존된 고딕 양식 예배당이다. 감리교는 1885년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우리나라에 최초로 창립했다. 그는 1887년 한옥을 구입해 예배를 드렸고 그해 12월26일 이곳에 ‘하나님의 집’이란 뜻의 ‘벧엘(Bethel)’ 예배당을 지었다. 건물은 붉은색 벽돌을 사용했다. 예배당 남측 종각은 3층 높이로 지었다. 또 정면에 보이는 파이프 오르간 역시 ‘역사적인 악기’다. 1918년 우리나라 최초로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하고 성가대까지 구성해 ‘제대로 예배’를 드렸다. 6.25때 건물 일부와 파이프 오르간이 파괴되었으나 2003년에 복원되었다. 아펜젤러가 예배를 볼 당시 정동은 이른바 ‘신문물 지식인들’이 많은 곳이었다. 이화여고, 배재학당이 옆에 있어 이 학교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신자가 되었다. 그 영향일까. 교회는 개화 운동, 독립 운동에서도 중심이 되었다. 특히 이태주 목사는 1919년 2월26일 예배당 옆 사택 지하실에서 민족 대표 33인에 참여하는 기독교계 대표 16인의 명단을 확정했고,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몰래 만드는 등 3.1운동을 주도해 2년 옥고를 치렀다. 이필주 목사 사택에는 사회 교육관이 들어섰고 그 터만 남아 있다.

교회 앞마당에는 흉상이 둘 있다. 왼쪽은 아펜젤러 선교사, 오른쪽은 최병헌 목사의 흉상이다. 최병헌 목사는 제4대 담임 목사다. 그는 책으로 처음 기독교를 접한 뒤, 1888년 아펜젤러를 찾아가 성경을 얻어 공부했다. 1893년 세례를 받고 아펜젤러 타계 후 담임 목사가 되었다. 이후 현순, 손정도, 이필주 목사와 박동완 장로가 모두 독립 유공자로 3.1운동에도 적극 참여한 분이다. 유관순 열사 또한 이 교회 신자였다.

1979년 4월15일, 감리교 선교 100주년을 기념해 새 예배당을 봉헌했다. 벧엘예배당과 통일감을 주기 위해 붉은색 벽돌을 사용했고 지붕 역시 검은색 박공으로 완공했다. 새로 지은 예배당 1층은 아펜젤러 기념 박물관으로, 아펜젤러 목사의 일기장과 당시를 확인할 수 있는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서 눈과 마음으로 읽히는 글이 있다. 바로 아펜젤러 목사가 한국 땅에 첫발을 내딛고 드린 기도문이다. 종교를 떠나 한 인간의 숭고한 일념, 즉 ‘진심’이 담겨 있다. 지금 이 시대에 정치인, 종교인은 물론이고 모두에게 필요한 마음 같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무덤의 빗장을 산산이 부수고 부활한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여 있는 굴레를 끊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옵소서!”

[글 장진혁(프리랜서) 사진 정동제일교회 홈페이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726호 (20.04.28)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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