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그렇게 울려야만 했습니까

이유진 기자 2020. 3. 30.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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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아동 공포심을 볼거리로 과장된 연출…‘정서적 학대’ 지적 나와
ㆍ육아는 사라지고…산으로 가는KBS ‘슈퍼맨이 돌아왔다’

KBS 2TV 예능 <슈퍼맨이 돌아왔다>가 본래 기획 취지와 동떨어진 채 아동의 공포심을 방송 소재로 활용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가수 문희준의 딸 희율, 방송인 샘 해밍턴의 아들 벤틀리, 가수 개리의 아들 하오가 방송에서 울고 있는 모습(위 사진부터 시계반대방향). KBS 유튜브 캡처

“아빠도 해봐.” 복싱 체육관에서 스파링 경기를 관전하던 아들 하오(2)의 말에 가수 개리(42)가 링에 오른다. 상대는 체육관 관장. 대련 끝에 관장에게 연달아 맞은 개리가 옆구리를 가격당하고 쓰러진다. 긴장한 채 바라보던 하오는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리고 “살려주세요”를 연신 외친다. 하오가 쓰러진 개리에게 달려가 입을 맞추자 개리는 “아빠가 장난친 거야”라고 말하며 일어난다.

지난 15일 방송된 KBS 2TV 예능 프로그램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한 장면이다. 국제아동인권보호단체 세이브더칠드런 코리아는 24일 해당 장면을 심의해달라고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민원을 제기했다. 아이의 순수한 마음을 확인하는 감동적인 ‘깜짝 카메라’로 연출됐으나, “아동의 공포심을 조장하고 흥밋거리로 소비했다”는 지적이었다. 이 단체는 “아동이 갖는 발달적 특성을 존중하고 아동의 입장을 먼저 고려하기보다 이를 기만하는 방식으로 자극하고 이를 재밋거리로 소비했다. 아동을 ‘놀리기 좋은 상대’로 바라보는 시각은 시청자뿐 아니라 우리 사회가 아동을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슈퍼맨이 돌아왔다>가 ‘일만 하던 아빠들의 48시간 나홀로 육아도전기’라는 본래 기획 취지와 동떨어진 채 아동을 방송 소재로 활용한다는 지적은 꾸준했다. 아동의 공포심을 웃음거리로 삼은 에피소드도 한둘이 아니다. 같은 날 방송에서 개리는 하오의 ‘배 포장지 공포증’을 극복시키겠다고 나섰다. 그러면서 겁먹은 아이에게 포장지에 싸인 배를 들이대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노출됐다. 각고의 노력으로 결국 배 포장지에 대한 공포를 ‘극복했다’고 결론 내렸지만, 전문가의 조언 없이 막무가내로 아이의 공포심을 극복시키겠다 나선 것은 괴롭힘에 가깝다는 지적이 나왔다.

과한 연출로 아이를 공포에 질리게 한 장면은 그다음 회인 22일 방송에도 등장했다. 봄맞이 이불 빨래에 나선 가수 문희준(42)이 무거운 이불을 들어 “허리가 나간 것 같다”고 말하자 딸 희율(3)은 그 말을 ‘허리가 어딘가로 나갔다’고 이해한다. 이후 부녀의 허리 찾기가 시작됐고, 소 엉덩이뼈를 탕으로 끓여낸 ‘방치탕’을 먹으러 간 희율은 식당 직원에게 “(아빠) 허리 못 봤냐”고 묻는다. 문제는 식당 직원이 “봤다. (방치탕을 가리키며) 이게 허리다”라고 말하면서 시작됐다. 아빠 허리로 만든 음식을 먹었다고 생각한 희율은 연신 “아니야”를 외치며 눈물을 쏟아냈다.

‘놀라운 상상력에서 비롯된 오해’라는 자막이 달렸지만 일부 시청자들은 과한 연출이었다고 비판했다. 해당 에피소드가 게시된 KBS 유튜브 채널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아빠의 신체 일부를 먹었다고 생각한 아이가 얼마나 놀랐을지 생각해보라” “우리는 예능이라 웃고 넘기지만 아이는 평생 트라우마가 남을 수도 있다” “아이의 우는 모습을 귀여운 장면이라며 보고 싶진 않다” 등의 의견이 나왔다. 방송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서당 훈육 에피소드 역시 ‘시대착오적’이란 비판이 나왔다. 같은 날 방송에서 서당을 찾은 윌리엄(4)·벤틀리(3) 해밍턴 형제는 훈장의 회초리 체벌 언급에 눈물을 보였고, 대신 회초리를 맞겠다고 나선 아빠 샘 해밍턴(43)의 모습이 나왔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연출이 출연 아동은 물론 시청 아동에게도 ‘정서적 학대’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한다. 나상민 세이브더칠드런 매니저는 “이번 민원 제기는 과거 유튜브 키즈채널 아동학대 사건·EBS <생방송 톡!톡! 보니하니> 사건에 대한 문제제기의 연장선”이라며 “방심위 심의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으나 국가인권위원회 진정 등 추가 대응을 고려 중”이라고 말했다. 나 매니저는 이어 “<슈퍼맨이 돌아왔다> 사례처럼 현실과 허구의 차이를 명확히 인지하지 못하는 아동을 반복적으로 비도덕적·정서적 불안을 조성하는 콘텐츠에 노출시킬 경우, 출연 아동은 물론 이를 시청하는 아동들에게도 정서적 해악을 끼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성상민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기획차장은 “아동·청소년이 나오는 관찰예능이 방송사마다 스테디셀러처럼 자리 잡은 상황에서 성장기에 있는 출연자에 대한 제작진의 세심한 배려는 불충분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에서 아동·청소년 출연자의 교육권·학습권·휴식권 등 인권보호를 명시하고 있지만, 세부규정을 비롯한 처벌 조항이 전무한 상태다. 또 KBS·EBS·MBC 공영방송 3사가 마련한 ‘아동보호를 위한 제작 가이드라인’ 역시 실제로 지켜지지 않아 실효성이 없다. 실천 가능한 가이드라인 마련과 함께 법 개정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유진 기자 yjle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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