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가 울린 경계경보..'좌초자산'의 해일이 밀려온다

이봉현 입력 2020. 3. 23. 05:08 수정 2020. 6. 15.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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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사회]
화석연료 기반 산업에 엄습하는 위기
금융투자자도 석탄·석유에서 손 떼
20~30년 내 좌초자산 수천조원 예상
'제조업 많고 에너지 다소비' 한국 불리
기후변화가 경제 바꾼다는 인식 필요
산유국 간 ‘치킨게임’으로 국제유가가 배럴당 20달러 선까지 추락하면서 생산단가가 높은 미국 셰일오일 채굴 업체의 부실 위험이 커지고 있다. 최근 미국 증시의 폭락을 주도한 것도 에너지 관련 종목이었다. 원유, 석탄 등 화석연료 기반 산업은 기후변화와 관련해서도 막대한 규모의 자산이 쓸모없어질 것이란 예상이 나오고 있다. 사진은 멕시코만의 해상 석유시추시설. AP 연합뉴스

‘비욘드 퍼트롤리엄’(Beyond Petroleum).

석유를 넘어서’라는 뜻의 이 홍보 문구는 영국 최대 기업이자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석유·가스회사 비피(BP: British Petroleum)가 자사의 영문 머리글자를 활용해 만들었다. 석유의 시대가 저물고 있으니 태양광이나 풍력 같은 새로운 에너지로 눈을 돌리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다. 하지만 홍보는 홍보일 뿐이었고, 비피는 여전히 땅속에서 석유와 가스를 뽑아내는 일을 주업으로 하고 있다. 심해에서도 석유를 퍼 올리다 2010년 멕시코만에서 치명적인 해상 오염을 일으킨 적도 있다. 바닷속 5천m까지 파이프를 박은 석유시추시설이 폭발해 한반도 면적보다도 넓은 바다가 검은 기름에 덮였다. 하지만 날로 심각해지는 기후변화는 이런 거대 석유회사가 재생에너지를 겉치레로 들먹이는 시대를 끝내고 있다.

기후변화가 정부, 기업 그리고 투자자의 행동을 바꾸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가 최근 하나 추가됐다. 영국 고등법원은 지난달 28일 런던 히스로공항의 제3활주로 건설 계획을 불허하는 결정을 내렸다. 활주로 확장에 정부가 관여하는 것이 법에 어긋난다는 이유에서다. <비비시> 보도를 보면, 이렇게 판결한 이유가 주목할 만하다. 활주로를 증설해 더 많은 항공기가 이착륙하면 온실가스 배출량이 늘어날 것이고, 그 영향으로 영국 정부가 파리기후변화협약을 통해 약속한 탄소배출량 감축 목표를 지키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히스로공항은 연간 8천여만명이 이용하는 유럽 최대의 허브공항이다. 한해 47만3천대(2019년)의 항공기가 뜨고 내리는데, 이를 포함해 항공기가 영국 전체 탄소배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6%나 된다. 늘어나는 항공 수요에 맞추기 위해 공항을 증설해 2050년까지 연간 74만대의 항공기와 1억3천만명의 승객이 이용하는 공항으로 키우려던 계획에 법원이 제동을 건 것이다.

사실 영국 정부는 다른 분야에서는 적극적으로 탄소배출 감축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6월에는 2050년까지 ‘탄소 제로’(탄소배출을 줄이고, 배출에 상응하는 흡수대책을 세워 실질적 배출량을 0으로 만드는 것)를 달성한다는 야심 찬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2025년까지 전기 생산에서 석탄을 퇴출하기로 했는데, 지난해 여름부터는 사실상 석탄화력을 가동하지 않고 있다. 10년 전 전력의 3분의 1을 석탄화력에서 생산하던 것에 견주면 커다란 변화다.

자본은 기후변화 해결책 쪽으로 흘러야”

히스로공항 증설을 불허한 영국 법원의 판단처럼 기후변화에 대한 위기감이 높아지면서 탄소배출이 많은 화석연료 산업이나 생태환경에 악영향이 큰 산업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영국, 프랑스, 캐나다, 멕시코 등 20개국은 2030년 무렵까지 석탄발전소를 모두 폐쇄한다는 ‘탈석탄동맹’을 맺었다. 이들 국가는 늦어도 2040년쯤에는 휘발유, 경우 등 내연기관 자동차 판매도 금지하려 하고 있다. 마크 카니 전 영국 중앙은행 총재가 지난해 4월 투자자들이 기후변화 리스크에 적절히 대응하지 않으면 자산가격이 급락할 것이라고 경고한 이래, 금융회사들은 속속 화석연료 기업에 대한 투자를 중단하거나 철회하고 있다.

약 7조달러(8726조원)의 자금을 운용하는 세계 최대의 자산운용회사 블랙록은 1월 중순, 향후 투자에서 지속가능성을 중심에 놓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구체적으로 총매출의 25% 이상을 석탄화력 생산 및 제조에서 벌어들이는 기업의 주식과 채권을 투자 포트폴리오에서 제외해 올여름까지 팔기로 했다. 이 회사의 래리 핑크 최고경영자(CEO)는 세계 경영자들에게 보낸 연례 서한에서 “우리는 금융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는 문턱에 이르렀다”며 “모든 기업은 기후변화 행동에 나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지속 불가능한’ 사업 활동에 대한 투자자들의 분노에 직면해 미래 자산·수익이 크게 훼손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석유회사도 이런 추세를 피해 가지 못한다. 약 143억파운드(21조5천억원)를 운용하는 영국의 자산운용사 사라신 앤 파트너스는 지난해 다국적 석유회사 셸의 주식 가운데 20% 이상을 팔았다. 이 회사 관리책임자인 너태샤 랜델밀스는 셸 회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대규모로 화석연료에 투자해 지구의 안전을 위협하기 때문에 당신 회사에 투자하는 것은 장기저축을 하는 수백만명의 이익과 일치하지 않는다”며 “자본은 기후변화의 원인보다는 해결책 쪽으로 흘러야 한다”고 밝혔다.

미국 루이지애나주 베니스에서 남동쪽으로 80㎞ 떨어진 멕시코만 해상에서 작업 중이던 ‘딥워터 호라이즌’이라는 비피(BP)의 석유시추시설에서 2010년 4월 폭발사고가 나자 소방선 한척이 불을 끄려 필사적으로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다. 미국 사상 최악의 기름유출 사고로 한반도 넓이의 바다가 오염됐다. AP 연합뉴스

금융,​ 좌초자산을 ‘리스크’로 인식

이렇다 보니 기후변화에 큰 영향을 주는 산업은 최근 ‘좌초위기 산업’이라는 오싹한 이름을 얻었다. 화석연료에 기반을 둔 정유, 석유화학, 조선, 자동차 산업과 온실가스 대량 배출 산업인 철강, 시멘트, 플라스틱 산업이 이 범주에 속한다. 이런 산업이 보유한 자원의 매장량이나 시설은 급속히 가치가 사라질 것이란 의미에서 ‘좌초자산’(stranded asset)이라 불린다. 엄청난 규모의 좌초자산 때문에 금융위기가 예상된다는 이유에서 ‘탄소 버블’(carbon bubble)이라는 말도 나온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좌초자산을 “이미 투자되었으나 그 수명이 다하기 전에 더는 경제적 수익을 내지 못하는 자산”이라고 정의한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지난달 기후변화 대응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좌초자산의 규모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분석한 기사를 실었다. 그 준거점은 ‘탄소 예산’(carbon budget)인데 미래 어느 시점에 얼마까지 탄소를 배출할지를 정한 것을 말한다. 파리기후변화협약은 기후변화 때문에 경제활동을 완전히 중단할 수는 없으므로 탄소배출의 한계치를 미리 정해두었다. 2100년까지 지구 기온의 상승을 섭씨 2도에서 막는다는 시나리오 아래 화석연료에 할당한 탄소 예산은 1200기가톤(GT)이다. 현재 화석연료 기업들이 보유한 광산이나 유정에 있는 석탄과 석유, 가스에는 약 2910기가톤의 이산화탄소가 담겨 있다. 이 시나리오에서는 약 59%의 화석연료 매장량이 차례로 좌초자산이 된다.

특히 석탄의 타격이 크다. 매장량 가운데 4분의 3이 쓸모없게 된다. 반면 원유는 확보된 매장량의 71%, 천연가스는 92%가 사용될 수 있다. 석탄보다 사정이 다소 낫다고는 해도 29%의 원유가 좌초자산이 될 때 13개 주요 국제 석유회사에서 잠기는 좌초자산은 3600억달러(약 449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지구 기온을 세기말까지 최대 섭씨 1.5도 상승으로 억제하는 좀 더 강화된 시나리오 아래서는 464기가톤의 배출만 허용된다. 이렇게 되면 84%의 화석연료 매장량이 좌초자산이 된다. 이 경우 석유 및 가스회사에서 날아가는 자산은 8900억달러(약 1111조원)로 급증한다. 확보된 매장량이 많은 업체가 당연히 큰 영향을 받는데, 러시아의 통합에너지 회사 로스네프트, 미국의 엑손모빌, 중국의 페트로차이나, 영국의 비피 등이 그렇다.

물론 화석연료 기업은 풍력,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로 사업을 다각화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실제로 과거 원유 채굴 회사였던 덴마크 국영 에너지 기업 ‘외르스테드’는 세계 최대의 풍력발전 전문 회사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토탈이나 로열더치셸 같은 곳이 신재생에너지에 투자하는 금액은 전체 투자의 1%가 되지 않는다고 이 신문은 보도했다.

삼척 석탄화력발전소 건설 반대 범시민연대 등 강원 삼척지역 주민들이 2018년 청와대 인근 서울 종로구 신교동 푸르메센터 앞에서 집회를 열어 석탄화력발전소 건설 백지화를 촉구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우리나라 제조업의 40.5%가 좌초 위기

한국은 밀려오는 좌초자산의 해일에서 비켜날 수 있을까? 오히려 다른 나라보다 더 큰 타격이 예상된다. 제조업 수출로 경제를 키웠고, 국제 경쟁력 유지를 위해 화석연료와 원자력에 의지해 산업용 에너지를 싸게 공급해온 구조 때문이다. 같은 액수를 생산하더라도 한국은 경쟁국보다 1.5~2배 더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다. 비영리 민간 연구소인 기후변화행동연구소 김재삼 전문위원의 지난해 말 분석에 따르면, 총제조업 가운데 좌초위기로 분류할 수 있는 산업(석유화학, 자동차, 석유정제, 플라스틱, 시멘트, 철강, 조선)의 비중은 2017년 생산액 기준으로 전체 제조업의 40.5%, 부가가치 기준으로는 30.6%에 이른다. 여기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84만3500여명으로 전체 제조업 종사자의 28.5%나 된다. 김 위원은 “좌초위기 산업 종사자들이 대기업-남성-고임금·정규직 노동자라는 특징이 있어 이 산업의 붕괴와 고용 축소는 경제에 큰 충격을 줄 수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부와 산업계는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지난 2월5일 환경부가 공개한 ‘2050 장기 저탄소 발전전략(LEDS)’ 검토안도 비록 최종 보고안은 아니지만 “구체성을 담지 못한 공허한 계획”이라는 비판을 환경단체로부터 받고 있다. 유럽의 여러 나라가 계획보다 앞당겨 탄소배출 제로화를 달성하려 하는 것과 달리, 이 검토안은 가장 적극적인 시나리오조차 2050년에 2017년 대비 75%의 탄소배출 감축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석탄발전과 내연기관 자동차도 2050년까지 유지하도록 설계했다.

경제의 미래는 인공지능이나 플랫폼 등 이른바 4차 산업혁명 기술에만 달린 것은 아니다. 기후변화야말로 환경 이슈에 머물지 않고 산업구조와 고용에 근원적 변화를 몰고 올 거대한 ‘해일’임을 빨리 알아채야 한다. 그래야 위기를 기회로 전환할 지혜도 발휘할 수 있다.

이봉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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