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니윤을 추모하며..조영남 "풍자·유머 자유자재였던, 유일한 한 사람" [인터뷰]

이유진 기자 8823@kyunghyang.com 2020. 3. 11.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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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토크쇼, 스탠드업 코미디를 국내 첫 도입해 붐을 일으킨 코미디언 쟈니윤이 8일(현지시간) 오전 4시 먼 이국 땅에서 향년 84세로 영면에 들었다. 사진 경향신문 DB

“자가용 비행기도 타봤고 외국의 한 여왕과 연애도 해봤습니다. 그러나 전 조국과 고향이 좋습니다.”

1989년 TV토크쇼 50회를 맞은 자니윤이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 ‘고국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1인 토크쇼, 스탠드업 코미디를 국내 첫 도입해 붐을 일으킨 코미디언 자니윤이 8일 오전 4시(현지시간) 먼 이국 땅에서 84세의 나이로 영면에 들었다.

자니윤은 국내 고교 졸업한 후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 성악과로 유학길에 올랐다. 대학 졸업 후 1977년 산타 모니타 코미디 클럽 무대에 섰던 그는 NBC ‘투나잇쇼’ 호스트이자 유명 방송 진행자 자니 카슨에게 발탁돼 아시아인 최초로 ‘투나잇쇼’ 무대에 올랐다. 재치 가득한 언변을 인정받아 30회 넘게 출연하기도 했다.

국내 입성은 그를 눈여겨본 이남기 대표(당시 KBS PD, 현 JIBS 대표)에게 발탁되면서다. 그는 1인 토크쇼의 원조 ‘자니윤 쇼’를 선보였고 국내에서는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쇼 구성과 정치, 사회적 풍자로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자니윤 쇼’ 이후 국내 방송계는 진행자의 이름을 건 토크쇼의 붐이 일기도 했다.

스포츠경향은 보조MC로 자니윤과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가수 조영남과 그를 발탁한 이남기 JIBS 대표의 말을 빌어 그를 추억한다.

이 대표는 “당시 ‘1인 토크쇼’는 미국에서 매우 유행했지만 국내에는 전무했다. 도입이 필요했던 적재적소 시기에 자니윤을 만났다”고 전했다. 그는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87년에 열린 ‘88서울프레올림픽쇼’에서 자니윤을 처음 봤다.

이 대표는 “자니윤이 서울올림픽을 세계적으로 알리기위해 글로벌 스타들과 내한해 대형공연을 치뤘다. 그는 인맥을 동원해 밥 호프, 브룩 쉴즈,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등을 초청해 공연을 열었다. 공연을 보니 그는 한국어 실력도 좋았고 유머감각도 국내 시청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어 토크쇼를 제안했다”며 ‘자니윤 쇼’의 탄생 배경을 밝혔다.

‘자니윤 쇼’ 자니윤과 보조MC를 맡아 진행했던 가수 조영남. 사진 경향신문DB

미국 생활 중 자니윤의 활약을 익히 알고 있던 가수 조영남이 보조MC로 출연했다. 배철수 밴드가 토크쇼 세션으로 참여했다. 수많은 국내외 스타들이 자니윤 쇼의 문을 두드렸다. 조영남은 “모든 섭외가 프로그램의 독보적인 인기 덕분”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제일 인상에 남았던 스타가 프랑스 배우 소피 마르소였다. 그는 당시 젊은이들의 꿈이자 우상이었는데 ‘자니윤이 진행하는 토크쇼’라는 한 마디에 섭외가 됐다”고 말했다.

신랄한 정치·세태 풍자로 시청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준 것도 ‘자니윤 쇼’가 남긴 족적이다. 그는 ‘한국에 와보니 정치가들이 코미디언보다 더 웃긴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방송 진행 중 성적 농담, 영어구사 등으로 비난 여론이 일기도 했다. 그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에 살면서 정말 고생했다. 인기인이 되기위해 미국시민권이 필요했고 한국 국적을 버렸다. 그러나 내 일상에는 거짓이 없다. 한국의 흙냄새, 특히 충북 음성군 고향 마을을 사랑한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제작진과 동료 조영남과는 ‘자니윤 쇼’가 막을 내리고 그가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연락이 끊겼다. 그러다 그는 2014년 박근혜 정부에서 한국관광공사 감사로 임명됐다가 건강상 문제로 사임했다. 2017년에는 한 방송사의 취재로 그가 미국 요양 보호소에서 병마와 싸우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충격을 주기도 했다.

방송을 본 조영남 역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저 형이 저렇게 될 인물이 아닌데 왜 저렇게 됐을까’라는 생각에 여기저기 연락해서 근황을 알아봤다. 그랬더니 모든 재산을 영화 투자에 쏟아붓고 빈털털이가 됐다는 말이 들리더라. 젊은 시절에도 영화에 대한 꿈이 큰 분이셨다”고 회상한다.

자니윤은 1982년 영화 ‘내 이름은 브루스’의 대본, 감독, 주연을 맡아 이름을 알렸다. 조영남의 말에 의하면 특히 일본에서 ‘중박’ 정도의 흥행 성적을 올렸다고. 조영남은 “영화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 한 것 같다. ‘자니윤 쇼’를 진행할 때도 앉으면 늘 영화 이야기를 꺼냈다”고 설명했다.

조영남은 “풍자와 유머의 적절한 선을 오갈 수 있는 토크쇼의 귀재는 과거에도, 현재도, 자니윤 하나”라고 단언한다. 그는 “나 역시 ‘조영남 쇼’를 진행해봤고 나름 한다고 했지만 자니윤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다. 그가 있었기에 지금의 문화강국 한국이 있지 않았을까?”라는 말로 자니윤을 추모했다.

이유진 기자 88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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