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카뮈 소설 '페스트'를 통해 본 코로나19 사태

오랑시가 곧 대한민국이다

데스크 칼럼입력 :2020/03/03 17:01    수정: 2020/10/05 13:48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고전 작품 읽는 걸 썩 즐기는 편은 아니다. 현안들과 마주하는 직업 특성상 ‘바로 활용할 수 있는 책’에 손이 먼저 간다. ‘지금 이곳’과는 동떨어진 얘기를 읽고 있을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는 탓이다.

그런데 가끔 고전에 푹 빠질 때가 있다. 시공간을 뛰어넘는 보편성 덕분이다. 최근 읽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도 그런 작품 중 하나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오랑이란 작은 도시에 갑자기 ‘페스트’가 창궐한다. 도시는 폐쇄되고,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인다. 시 당국도 우왕좌왕한다. 그런 가운데 베르나르 리유를 비롯한 시민들의 노력 덕분에 페스트 시련을 무사히 이겨낸다.

수도방위사령부 56사단 장병들이 3일 오후 서울 성북구 영천교회에서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방역을 하고 있다. (사진=뉴스1)

■ 오랑시의 시련, 2020년 대한민국의 시련

난 이 작품을 스토리보다 인물에 집중하면서 읽었다. 등장인물들이 코로나19 정국을 대하는 인간 군상들과 연결되는 부분이 적지 않아서다.

주인공이자 이 소설 화자인 베르나르 리유는 ‘이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인물’이다. 의사인 그는 소설 속에선 영웅이다. 하지만 그는 인간적인 면모도 함께 갖고 있다.

취재차 오랑 시에 들렀다가 졸지에 고립된 기자 랑베르와 나누는 대화에선 이런 면모가 잘 드러난다. 랑베르 기자는 오랑시에선 ‘이방인’이다. 도시의 시련은 자신와 상관 없는 일이다. 어서 빨리 도시를 탈출해 사랑하는 여인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게 최대 목표다.

그래서 그는 리유에게 이렇게 항변한다. “나는 이 고장 사람이 아닌데요!” 하지만 리유의 대답은 단호하다. “지금부터 선생은 이 고장 사람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리유는 랑베르의 상황을 이해한다. 머뭇거리는 그에게 "빨리 떠나라'고 권유하기도 한다. 행복을 찾으려는 그의 권리 역시 충분히 존중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피를 꿈꾸던 랑베르는, 고민끝에 남는다. 리유와 함께 '페스트와의 전쟁'에 동참한다.

알베르 카뮈 (사진=위키피디아)

그 뒤 랑베르는 다시 묻는다. “왜 그 때 날 잡지 않았냐고?” 이 질문에 리유는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답한다. 비슷한 상황이라면 나도 그랬을 것이란 말도 덧붙인다. 대의를 위해 개인의 행복을 포기하라고 강요하진 않는다.

파늘루 신부도 흥미로운 인물이다. 뛰어난 학자이기도 한 그는 “페스트는 사악한 인간에게 내리는 신의 징벌”이라고 질타한다. 모든 걸 초월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 하지만 그도 나중에는 리유가 주도한 보건대에 참여해 구호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다가 결국 페스트에 걸려 죽는다.

이외에 리유와 함께 보건대로 활동하는 그랑, 파루 같은 인물들도 작은 영웅이다. 부조리한 상황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고 공동의 안전을 위해 노력한다.

그런 점에서 코타르는 좀 다르다. 그는 ‘페스트’ 상태를 즐긴다. 물론 범죄자란 자신의 신분 때문이다. 하지만 혼란을 이용해 돈을 벌고, 또 인생을 즐긴다. 한 마디로 혼란이 곧 기회인 인물이다.

■ 코로나19는 모두의 불행…비난보다는 격려와 협력 절실

코로나19가 장기화되고 있다. 정치권에선 연일 공방이 계속된다. 주로 야당이 정부를 공격하는 모양새다. ‘중국인 입국 전면금지’를 비롯한 초기 아젠다를 계속 밀어붙이고 있다.

언론들도 혹독한 비판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그 과정에 적지 않은 오보(혹은 왜곡보도)가 난무하고 있다. 마스크 사재기를 하던 업자들이 적발됐다는 소식도 들린다.

최근엔 신천지란 돌발변수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또 다른 공방이 전개되고 있다.

물론 훈훈한 소식도 적지 않다. 코로나19가 집중된 대구 경북 지역으로 달려간 자원 봉사자들 얘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안겨 준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깔끔한 일처리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 질병관리본부도 든든하다.

이런 소식을 접하면서 혼자 ‘페스트’와 현실을 오버랩 해 본다. 코로나19 사태가 길어지면서 다양한 인물 군상들과 만나게 된다. 리유나 타로 같은 인물이 있는가 하면, (초기의) 파늘루 신부처럼 종교적 극단주의를 설파하는 인간형도 눈에 띈다.

물론 소설 속 인물에 현실 속 인물을 그대로 대입하는 건 위험하다. 작가가 창조한 것은 실존인물이 아니라 '있을 법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 (사진=뉴스1)

게다가 현실 속 인물들은 어느 쪽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모습이 사뭇 다르다. 정치적인 성향이 개입되는 순간 그 다름은 '틀림'으로 바뀐다.

그래서 코로나19가 휩쓸고 있는 2020년 대한민국에서 누가 사심 없는 영웅인지, 또 누가 코타르 같은 행보를 보여주는 진 각자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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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한 가지만 덧붙이고 싶다. 지금은 코로나19가 휩쓸고 있는 ‘부조리한 상황’이다. 각자 생각하는 바가 다를 순 있지만, 어차피 질병 앞에선 공동 운명체다. 그러니 최소한 코타르 같은 행동은 삼가는 것이 마땅하다.

그게 이 땅을 함께 사용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