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담, <기생충> 이후

2020. 2. 25.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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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지 같은 얼굴에 스며든 빛나는 자긍심. 영화 <기생충> 이 가져다준 마법 같은 시간의 한복판에서 만난 박소담.
로고 장식의 후프 이어링과 화이트 셔츠, 재킷은 모두 Louis Vuitton.
와이드 라펠의 레트로 수트와 화이트 셔츠, 헤링본 패턴의 베스트, 블랙 펌프스, 화이트 미니 백이 달린 트위스트 & 트위스티 백, 볼드한 이어링과 링은 모두 Louis Vuitton.
퍼프 소매의 체크 셔츠와 레인보 스팽글 장식의 베스트, 티어드 스커트, 레더 브레이슬렛, 레이어드한 B 블라썸 파인 주얼리 링, 골드 이어링은 모두 Louis Vuitton.

기분 좋은 예감. 결과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100년을 넘긴 한국영화사는 물론이요, 세계영화사에도 잊지 못할 순간으로 기록될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 감격과 놀람이 뒤섞인 얼굴들 사이에 〈엘르〉 코리아 3월호 커버 주인공이 있다. 세계를 매혹시킨 영화 〈기생충〉의 주역 중 하나로, 선배 배우들과 멋진 앙상블을 이룬 박소담. 2015년 〈검은 사제들〉을 통해 인상적인 데뷔전을 치른 그는 열심히 달려온 20대의 끝에서 봉준호라는 걸출한 창작자를 만나 다시 한 번 자신의 비범한 재능을 펼쳐 보였다. 반지하 집에서 오스카까지, 누구도 계획하지 못한 이 환상적인 경험이 젊은 배우의 내면에 어떤 파장을 일으키고 있을까.

박소담과 〈엘르〉의 만남이 이뤄진 건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기 나흘 전. 갑자기 찾아온 매서운 추위와 코로나 바이러스에 관한 잇단 뉴스에 혹여 중대한 이벤트를 앞둔 배우의 건강에 이상이 생기진 않을지 염려가 스쳤다. 그러나 당장 마주보고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지난해 5월 칸영화제에 참석했을 때부터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의 연속이에요. 얼떨떨해요. 내가 그 공간에 있으면서도 ‘이게 정말 진짜인가?’ 싶어요. 나중에 영상이나 사진으로 볼 때 오히려 더 감정이 밀려들더라고요.” 미국에서 〈기생충〉이 개봉한 뒤 ‘제시카 징글’이 네티즌의 인기를 끌고 패러디를 낳은 것은 일종의 전조였을 뿐(〈엘르〉 팀의 요청에 박소담은 ‘쿨’하게 즉석에서 제시카 징글을 재현해 줬다). 미국배우조합상(SAG)에서 최고상인 앙상블 상을 받고 무대에 올라 최우식과 눈이 마주치고 울컥했던 순간,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려 화제가 된 샤를리즈 테론과 나눈 따뜻한 포옹 등 박소담의 머리와 가슴에 곱씹을수록 신기한 장면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

기하학 패턴의 재킷과 화이트 셔츠, 스트라이프 패턴의 와이드 팬츠, 화이트와 골드가 믹스된 트위스트 & 트위스티 백, 후프 이어링과 블랙 펌프스는 모두 Louis Vuitton.
현란한 패턴의 블라우스와 A 라인 스커트, 모노톤의 베스트, 모노그램 벨트 백, 후프 이어링, 헤드 스카프, 볼드한 후프 이어링, 로고 장식의 펌프스는 모두 Louis Vuitton.
화이트 버튼 장식의 네이비 수트와 화이트 셔츠, 골드 이어링과 링은 모두 Louis Vuitton.
어깨를 강조한 화이트 드레스, B 블라썸 파인 주얼리 이어링, 4개가 한 세트인 모노그램 패턴의 링, 롱부츠는 모두 Louis Vuitton.

고등학교 시절, 뮤지컬 〈그리스〉를 보고 배우가 되길 꿈꿨다는 박소담. 한예종 연기과에 들어가 일찍부터 독립영화, 단편영화 작업을 하면서 꽉 채운 4년을 보냈다. “휴학 한 번 없이 동기 중에서 제일 먼저 졸업했어요. 친구들이 저보고 독하다 했죠(웃음).” 그해 때마침 신인 여자배우를 찾는 작품이 몰리면서 오디션 기회가 잇따랐고, 그렇게 줄지어 출연하게 된 작품이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베테랑〉 〈사도〉 〈검은 사제들〉이다. 단숨에 무서운 신예로 등극한 그는 각종 영화제 신인상을 휩쓸고 TV 드라마에도 출연했다. 그러나 쏟아지는 관심 속에 쉼 없이 이어진 도전과 냉정한 평가는 차츰 마음을 힘들게 했고 결국 슬럼프가 왔다. “쉬려고 쉰 건 아니었어요. 이 일 자체가 잠깐만 쉬더라도 잊히기 쉽기 때문에 뭔가를 계속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어요. 그러다 회사도 없고 일도 없던 때, 이렇게 된 거 한번 쉬어보자 했는데 그제야 깨달았어요. 아, 내가 좀 많이 지쳤었구나.” 그렇게 1년의 공백기를 보내며 모든 것을 내려놨을 때, 기적처럼 찾아온 작품이 바로 〈기생충〉이었다. “제가 오디션을 보지 않고 따낸 첫 역할이었어요. 믿을 수 없었죠.”

그리고 이후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 꼭 필요했던 휴식 뒤에 찾아온 기회, 박소담은 말 그대로 펄펄 뛰어놀았다. “대본을 처음 받고 읽었을 때부터 감독님이 날 이렇게 잘 알고 있나 싶었어요. 대사를 굳이 외우려 하지 않아도 입에 잘 붙더라고요.” 〈기생충〉에서 가장 거침없고 능동적인 캐릭터인 ‘기정’은 실제 박소담과 꽤 닮은 구석이 많다. 신인 때부터 남다른 강단이 느껴졌던 그는 지금도 칸이든 아카데미든, 어느 자리에서나 긴장한 내색 없이 순수한 기쁨을 드러낸다. “이런 얘기가 〈기생충〉 팀에서도 많이 나왔는데, 하루는 (송)강호 선배님이 말씀하셨어요. 소담이가 저렇게 항상 건강하고 자신감 있는 건 부모님 덕분인 것 같다고. 이 일을 해나가면서 고민이나 힘든 부분이 있으면 부모님이랑 얘기를 많이 하는 편이거든요. 강호 선배님 말씀에 많이 공감했어요. 솔직히 그날 좀 울었어요.” 모든 어머니는 다 위대하지만, 박소담의 눈에 비친 어머니는 더욱 특별했던 것 같다. 영향을 받은 중요한 인물을 묻는 질문에도 어머니 얘기가 나온다. “지극히 평범한 분이지만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엄마가 가장 강하다는 생각을 해요. 저희 3남매를 키우신 것도 그렇고, 엄마가 누군가와 척을 지거나 큰소리를 내는 걸 본 적 없어요. 언젠가 나도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살았는데, 어느덧 서른이에요. 직업상 이미 평범한 삶을 살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좀 건강하게 살고 싶어요. 엄마가 아니더라도 배우로서 건강하게.”

작품을 통해 인연을 맺은 ‘새로운 가족’ 또한 박소담의 삶에서 나날이 의미를 더해가고 있다. 스스럼없이 송강호 배우를 아버지라 부르고, 이정은 배우를 롤 모델이라 칭하는 그에게 〈기생충〉이 선사한 인연은 어떤 트로피와도 바꿀 수 없는 행운이다. “이 모든 걸 혼자 겪었으면 정말 많이 긴장했겠지만, 항상 우리 팀이 함께였기에 힘을 얻었어요. 저에게 〈기생충〉은 무엇보다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해준 작품이에요. 앞으로 살아가면서 고민이 있을 때 전화할 수 있는 언니, 오빠들이 한꺼번에 이렇게 많이 생긴 게 정말 든든해요. 더 열심히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 이 순간, 지구상에서 가장 뛰어나고 매력적인 창작자임이 분명한 봉준호 감독에 대해서도 묻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비전과 탁월한 스토리텔링 능력, 상상력을 구현해 내는 치밀함, 세계 영화인들을 매료시킨 여유와 유머 감각까지 이 모든 걸 옆에서 지켜본 느낌은 어떨까. “현장에서도 이미 감독님은 너무 위대해 보였어요. 뭔가 제게 설명하기 위해 태블릿을 꺼내면 그 안에 담긴 콘티들이 ‘파바박’ 떴지요. 이 모든 게 감독님 머릿속에 있다니, 정말 놀라웠어요. 그런데 배우들이 더 신기해 하는 건, 동네 형 같은 감독님의 친근한 면모예요. 시상식에서도 옷만 차려입었을 뿐, 우리가 촬영장에서 본 모습 그대로예요. 한결같은 모습이 더 대단하게 느껴져요.”

레이스 소재의 티어드 미니 원피스와 테이핑 장식의 부츠 컷 팬츠, 플랫폼 부츠, 와이드 스트랩이 특징인 트위스트 & 트위스티 백. 레이어드한 B 블라썸 파인 주얼리 링은 모두 Louis Vuitton.
오렌지와 화이트 컬러 블록의 미니드레스, 로고 장식의 브레이슬렛과 후프 이어링은 모두 Louis Vuitton.
현란한 프린트의 미니 트렌치코트와 윙 칼라 화이트 셔츠, V 모티프 이어링, 옐로·레드·블랙 컬러의 트위스트 백, 화이트 부티는 모두 Louis Vuitton.

온전히 빠져들어 감상했던 영화가 끝난 뒤 극장을 나오면 잠시 현실 풍경이 생경하게 느껴진다. 〈기생충〉이 창조한 마법 같은 시간을 통과한 이들에게도 이런 어지럼증이 있진 않을까. “촬영 때부터 배우끼리 그런 얘기를 많이 나눴어요.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일하고 나면 바로 다른 작품을 하기가 쉽지 않다고요. 조급해 하지 말고 천천히 잘 보고 가라고 선배님들이 말씀해 주셨어요.” 그러나 기분 좋은 에너지를 충전한 박소담에게 긴 숨 고르기는 필요 없을 듯하다. 꼭 해보고 싶었던 액션 장르인 〈특송〉을 만나 이미 신나게 촬영을 마쳤고, 〈기생충〉보다 먼저 찍었던 장률 감독의 영화 〈후쿠오카〉도 개봉을 앞두고 있다. 그리고 박소담의 진정한 ‘포스트-기생충’ 작품은 하명희 작가가 쓰고 박보검이 함께 출연하는 tvN 드라마 〈청춘기록〉이 될 듯하다. “요즘 청춘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 많이 담고 있는 작품이에요. 저도 동생이 두 명이나 있다 보니 젊은 친구들의 어려움을 많이 느끼거든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찾고 꿈을 찾아간다는 게 쉽지 않잖아요. 작가님이 다루는 이야기가 되게 현실적으로 다가왔어요.” 서른 살 박소담의 청춘도 녹록지 않았다. 해외여행 한 번 제대로 못 해본 채 사회에 뛰어들었고, 배우로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해 박수갈채를 받으리라는, 허무맹랑한 꿈은 꿔본 적도 없다. “그런 꿈을 꿀 여유조차 없었어요. 오디션을 봐서 배역을 따내고 연기하기 바빴어요. 그래서 이 모든 게 실감이 잘 안 나요. 너무 빨리 겪지 않았나, 조금 두렵기도 해요.”

인생이란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지만, 시작된 흐름을 막을 수 없는 것도 분명하다. 커버 촬영을 위해 루이 비통의 2020 S/S 컬렉션을 입은 그녀를 바라보며 봉준호 감독의 빼놓을 수 없는 뮤즈인 배두나를 비롯해 루이 비통이 사랑하는 개성 강하고 아름다운 여배우들의 잔상이 머릿속을 스친 건 에디터뿐이 아닐 것이다. 〈기생충〉의 눈부신 성과는 또 다른 장벽을 허물 기대감을 부추긴다. 이미 주역 배우들을 향한 해외영화계의 관심과 제안이 뜨겁다는 소문이다. “솔직히 해외 진출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아예 없어요. 그런데 미국 프로모션 때문에 뉴욕에 갔을 때 외국 매체와 인터뷰를 많이 했는데, 다들 그 질문을 하는 거예요. 이렇게 많은 분이 관심을 가져주니 도전하는 게 당연한지. 좋은 기회가 와서 하게 되면 좋겠지만, 그 전까진 영어 공부도 그렇고 스스로 준비가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준비가 안 돼 있으면 아무리 좋은 기회가 와도 잡을 수 없으니까요.” 〈기생충〉이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큰 감동은 열정이 지닌 무한대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것 그 자체 아닐까. 촬영장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아카데미 결과를 예측하는 질문에 “섣부른 추측은 안 하기로 했어요. 최대한 많이 보고 즐기고 오려고요”라고 말을 아끼던 박소담. 깜짝 놀랄 드라마의 연속이었던 시상식과 새벽까지 이어졌다는 축하 파티가 끝난 후, 홀로 침대에 누운 박소담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궁금하다.

레이스와 셔링 장식의 드레스, B 블라썸 파인 주얼리 링과 이어링은 모두 Louis Vuit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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