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신애 대표 "아시아 女제작자 최초 수상..30년 버티니 오스카로 화답"(종합)

장아름 기자 2020. 2. 20.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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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인터뷰]
CJ ENM © 뉴스1

(서울=뉴스1) 장아름 기자 = 아시아 최초로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을 수상한 여성 제작자.

이제 '기생충'의 제작사 바른손이앤에이 곽신애 대표 앞에 붙는 수식어다. "30년을 버티니 (영화가 오스카 수상으로) 화답해준 것 같다고 하더라"며 동료 여성 영화인들의 반응을 전한 곽신애 대표.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여운이 가시지 않던 날, 청와대 오찬을 마친 그와 취재진이 만났다.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는 영화 '기생충'(감독 봉준호) 제작사 바른손이앤에이 곽신애 대표의 인터뷰가 진행됐다.

'기생충'은 한국영화로는 최초의 기록들을 세웠다. 지난해 5월 제72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에 해당되는 황금종려상을 수상했고 이후 제77회 골든글로브 등을 비롯한 북미 유수 영화제 및 시상식을 휩쓸었다.

특히 지난 9일(현지시간)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각본상·국제극영화상·감독상·작품상)을 차지했다. 한국 최초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수상 쾌거를 거뒀을 뿐만 아니라 전세계 최초로 비영어권 영화로 작품상을 수상하는 새 역사를 썼다.

이로써 곽신애 대표는 아시아 여성 제작자로는 최초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제작자라는 타이틀을 얻게 됐다. 그는 1990년대 영화 전문지 키노의 기자로 활동하다 제작사 청년필름, LJ필름의 기획마케팅실을 거쳐 현재는 바른손이앤에이의 대표직을 맡고 있다. 또 그는 곽경택 감독의 동생이자, 정지우 감독의 아내로도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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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 대표는 문재인 대통령 내외와 '기생충' 팀과의 청와대 오찬 분위기에 대해 전했다. 오찬 코스에 등장한 짜파구리의 맛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짜파구리는 '기생충'에서 박사장(이선균 분)네 사모님 연교(조여정 분)가 아들 다송(정현준 분)을 위해 한밤 중 충숙(장혜진 분)에게 만들어달라고 한 요리다. 이에 대해 곽 대표는 "짜파구리는 여러 코스 중에 하나다. 영부인께서 파가 너무 안 팔려서 농민 분들이 갈아엎는다고 하더라. 기존 짜파구리에 파를 듬뿍 넣어서 만들어주셨다. 그런데 접해본 짜파구리 중 제일 맛있었다. 파가 비법이구나 했다"고 말했다.

또 곽 대표는 "(영화처럼) 한우 채끝이 아니고 목살을 넣었다고 하더라. 셰프님이 그거보다 이게 나을 거라고 하셨다. 소고기는 소고기인데 다른 부위를 넣어 만들어주셨는데 코스요리라 짜파구리 양은 조금 나왔다"며 "다들 맛있다고 하더라"고 반응을 전했다. 그러면서 "저희는 배우 10명이 전원 참석했다"며 "스태프들, 녹음 분장 의상 이런 스태프들과 조감독님이랑 해서 열 분이 참석했다"며 "앞으로의 계획이나 근황이어서 특별한 이슈 없이 일반적인 대화를 나눴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영화를 만들면서 청와대 갈 일이) 그런 일이 없었다. 신기해 하고 다들 좋아했다"고 털어놨다.

곽 대표는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흘 정도 지난 후에 대한 소감을 전했다. 그는 "아직은 정리가 잘 안 됐다. 너무 이상한 일을 겪은 것 같다. 우리나라 영화가 상을 받는 것만으로도 신기한 일인데 어느새 4개까지 받았다"며 "제가 (무대에) 올라가는 경우는 작품상이어야만 올라가는 거다. 올라갈 일이 있을까 했었는데, 감독상을 받으시는 순간에 '작품상이다' 이 생각을 했다. 그간 느껴오던 여러가지 것들을 봤을 때 감독상 호명이 신호로 느껴졌다. 옆에 (조)여정씨랑 한진원 작가한테 '작품상이면 어떡해' 했는데 '말도 안 돼' 이런 반응이었다. 그런데 정말 작품상이더라"고 돌이켰다.

곽 대표는 아카데미 시상식 전부터 '기생충'에 대한 현지 영화인들의 반응이 뜨거웠다고 전했다. 그는 "현지에서 참관하면서 체감한, 몸으로 느낀 느낌인데 항상 우리 테이블이 너무 붐비더라. 많은 사람들이 우리 테이블에 찾아와서 사진 찍자고 하고 눈빛도 과하게, 원래 그런가 했다. 그런데 다른 테이블 갔을 때는 그런 표정이 아니더라"고 웃었다. 또 그는 "그때가 브래드 피트와 송강호 배우 사진 찍힌 그날"이라며 "'그때 너무 이상해서 무슨 일이지? 왜 그러지?' 이런 느낌이 있었다. 거기 뿐만 아니라 매번 그래서 우리 팀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느꼈다"고 고백했다.

곽 대표는 감독상 및 작품상의 쟁쟁한 경쟁작이던 샘 멘데스 감독의 '1917'을 제치고 상을 수상한 소감도 이야기했다. 그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 감독 이름이 들어간 상 네 개 부문은 다 받았다. 봉 감독과 이 작품에 열광했던 사람들이 봉준호가 트로피를 못 가져가면 어떡하지 생각해서 봉준호 이름 칸에 다 투표한 것 같다"며 "'1917'이 그전까지 유력한 감독상 후보였는데 우리가 감독상을 딱 받은 거다. '기울어졌구나 넘어왔구나' 했다. 이후 작품상을 불러서 제가 올라가야 한다. 머리가 하얘지고 그런 걸 겪었다. 개인이 겪는 일 치고 너무 센 일을 겪은 거다. 황금종려상도 너무 셌는데"라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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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여성 제작자로는 아카데미 시상식 최초의 작품상 수상이었다. 그는 "유색 여성 최초라고 하더라. 미국 언론에서 나온 걸 보면 유색인종 여성으로는 처음이라고 하더라"며 "한국에서 아카데미 레이스를 경험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심지어 여성 제작자로도 처음 참여한 것이었다. 무슨 옷을 입어야 하는지부터 모르겠더라. 그래서 다른 여자 제작자가 뭘 입고 왔었는지 찾아보기도 했는데 예뻐보이는 건 엄두도 못냈다. 상황에 안 튀고 어색하지 않게 하면 되겠다는 게 목표였다"고 털어놨다.

그가 생각하는 아카데미 시상식의 수상 의미는 무엇일까. 곽 대표는 "이 상이 주는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생각했을 때 모든 면에서 (수상은) 역사를 뒤집는 것이었다. 기록을 깨거나 뒤집거나 만드는 것이었는데, (수상 전에는) 그래서 '수상이 그만큼 어렵겠구나, 하루아침에 바뀌겠어' 했다"며 "그런데 현지에서 체감하는 건, 언제나 '기생충'에 대한 반응이 1등이었다. (현지 관계자들이) 가장 좋아했고 만날 때마다 손을 꼭 잡고 얘기했다. '원래 그런가?' 했는데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카데미가 보수성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개인들이 투표해서 결과가 모이는 거다.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여러분들은 젊고 비교적 그런 사람들이라면, 안 나타나는 나이들고 보수적인 분들 있을 것 같고, 그분들은 영어가 아닌 걸 안 좋아할 것 같았다"며 "그런데 우리가 상을 받는다는 것은 화제와 힘을 몰아주는 거다. 파워를 짊어주는 거다. 역사가 지워지는 거고 우리만 좋은 게 아니라 아시아권이라든가, 넓게는 비영어 영화들, 좀더 좁히면 아시아인들, 유색인종들, 미국이 아닌 나라의 많은 영화들의 카테고리를 생각할 때 그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줄 것 같더라. 세계 영화에 굉장히 의미있는 자극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전했다.

곽 대표는 보수적인 아카데미 시상식의 변화에 진심으로 존경심을 드러냈다. 그는 "'그런데 정말 상을 주다니' 했다. 그들이 굉장히 용기가 있다고 생각했고 변화가 두려울 수 있는데 선택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는 생각했다. 경의를, 리스펙을 표하고 싶다"며 "처음에는 그 사람들과 제가 되게 멀다고 생각했다. 낯설고 말도 안 되고 문화적 분위기랄까 그런 게 있고 주눅이 든달까 그런게 있었다. 그런데 우리 영화를 인정하고 좋아해주는 게 진실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일종의 우정을 느꼈다. 거리감이 되게 좁아지는 느낌이 들었고, 영화의 가치나 존재나 힘을 믿는 사람들이 여기에도 많이 있구나 했다. 그런 의미에서 동질감을 느끼면서 대단하다 생각했다. 어떤 영화가 좋은 영화고 그런 영화를 지지한다는 건 같은 거니까"라고 덧붙였다.

시상식 이후 곽 대표가 실감하는 한국영화에 대한 변화도 있었을까. 곽 대표는 "현지에서 송강호 배우가 등장하는 다른 영화들을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봉준호 감독 '살인의 추억'도 재개봉을 준비하고 있다. 그전에도 그런 분위기가 있었는데 '기생충'을 본 관객이라면 '이것도 보라'고 리스트를 만들어서 비평가나 개인들이 공유했다. 그런 식으로 소개하는 붐들이 일어나고 있다"며 "아시아계로 활동하는 분들 같은 경우는, 업계에서 차별을 엄청 체감한다고 하더라. 그런데 '기생충'이 오스카에서 완전 메이저였다. 시상식만 놓고 보면 소위 '짱을 먹는 것'인데 자존감과 자신감도 느꼈을 거다. 산드라 오도 한국인이 자랑스럽다고 기뻐했었다"고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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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과 차기작도 함께 할 것인지에 대한 답도 들을 수 있었다. 곽 대표는 "(봉준호 감독과 차기작을) 안 하는 것도 아니고 하는 것도 아니고 뭐라 해야 하나 싶다"고 말하며 웃었다. 이어 "서로 할 것 처럼 얘기하는 것, 썸 타거나 연애할 때 그런 거 있지 않나"라고 말하며 "상대는 나랑 계속 사귈 것 같은데 그런 느낌을 주는, 서로가 그러고 있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또 곽 대표는 공식적으로 함께 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대한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그는 "큰 실수 안 하면, 다음 한국영화 정도는 같이 할 수 있지 않을까"라며 "감독님께서 외국영화는 준비하는 파트너가 따로 있다. 차기작, 한국영화는 하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 공식적으로는 한다고 말할 순 없다. '하게 될 거라고 기대하고 있다, 하면 좋겠다' 정도로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곽 대표는 자신이 제작하는 영화의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감독님과 이심전심으로 '하던대로 해야지' 하는 게 있다. 감독님도 준비하고 계시지만 하던대로 한다고 하셨다. 칸 국제영화제, 아카데미 시상식 전부터 기획해서 고민하던 작품이고 아이템 바뀐 거 없고 그대로 하신다고 하지 않았나"라며 "저도 마찬가지로 같이 개발하고 있던 신인감독도 있고 크지 않은 사이즈의 멜로영화도 있다. 하던대로 하려고 한다. 오스카 상을 받은 것 때문에 오는 기회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기준대로 관통하면 될 것 같다"고 밝혔다.

영화에 대한 곽 대표의 생각도 들어봤다. 그는 "제가 원래 출신이 영화를 오락이라고 생각하기 보다 예술이라고, 과할 정도로 생각한다. 예술로 인식하는 매체(영화잡지 키노) 출신"이라며 "그 이후에 일을 필드에 나가서 마케팅 일을 하는데 제가 고민스러웠던 게 마케팅을 하려면 의미를 찾아야 하고 셀링 포인트를 찾아야 한다. 저한테는 큰 딜레마가 있긴 했다. 그래서 한 세월동안은 흥행작만 보고 좋아했던 영화를 안 보낸 세월을 보내기도 했는데 세월을 더 흐르다 보니 사람이 자기라는 상태에 가장 가까운 걸 해야 하는 것 같더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예를 들어 '극한직업'을 폄하하는 게 아니고 재밌게 보고 좋아했는데 저는 못만들 영화더라"며 "예를 들면 오빠인 곽경택 감독이 연출한 '친구'라는 영화가 있는데 나는 못 만들 영화라고 생각했다. 좋아하긴 했지만 만들 수 있는 영화는 아닌 것"이라며 "내가 제작자로 참여했을 때 그 작품이 좋아질 것인가 마이너스 될 것인가 구분하게 되는 것 같다. 감독들도 그렇게 구분하게 되는 것 같다. 계속 같이 가자고 한 감독이 엄태화 감독인데, 그 감독 같은 경우는 제가 해도 될 것 같고, 제가 해도 해가 안 될 것 같고 시너지가 될 것 같은 게 있다. 어떻게 보면 독립영화와 상업영화 경계에 있는 것"이라고 고백했다.

곽 대표는 40대 중반에 제작자가 된 과정도 돌이켰다. 여성으로서 적지 않은 나이에 제작자가 됐고 녹록지 않은 과정을 버텼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는 "영화를 그만두지는 못했다. 이 영화 업계에서 버티자는 생각이 들었고, 40대 중반인 데다 아이가 어려서 홍보 대행사를 차린다거나 제작사를 차린다거나 회사를 차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전직을 하기엔 경력이 다시 0이 되니까 하던 쪽에서 우선 나를 받는 쪽으로 가자 했다. 고용을 당하기엔 너무 나이가 많은 상태였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주변에서 해주시는 얘기가 있는데 여성 제작자 분들도 저와 비슷한 감정을 갖고 20여 년씩 살아오셨다"며 "그분들이 저보다 필모그래피가 더 좋으시다. 작품으로는 편수도 많고 성적도 좋았다. 제가 그분들께 '어쩌다 이런 일이 생겨버렸어요'라고 말하면 기뻐해주시더라"고 말했다. 이어 "한 영역에서 퍼지지 않고 고비를 겪고, 버텨내면, 계속 열심히 하다 보면 뭐가 됐든, 뭔가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며 "그분들이 '영화로부터 30년만에 화답을 받았다'거나 '대표님은 30년 만에 받은 거라 하늘이 공평한 것 같다'고 하시더라.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동적이었다"고 털어놨다.

aluemchang@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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