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탐사] '적'만 있는 생존투쟁.. "제발 돈 벌 기회 뺏지 마세요"

김유나 정현수 김판 임주언 기자 2020. 2. 20.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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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에 빨려들어간 철수씨 ④ 바닥을 향한 경쟁
오토바이를 탄 배달원들이 지난 17일 서울 마포구 지하철 2호선 신촌역 인근을 지나고 있다. 많은 눈이 내린 날은 배달 주문이 몰리지만 길이 미끄러워 사고 위험도 높다. 김지훈 기자


이상하게 가까운 거리의 콜이 잘 뜨지 않는 그런 날이 있다. 누군가 근처 콜을 싹쓸이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지난 14일 오후 1시 피크시간대도 그랬다. 라이더 A씨는 ‘자토바이가 떴구나’ 생각했다. 자토바이는 자전거로 위장한 오토바이를 말하는 라이더 은어다.

배달의 민족이나 쿠팡이츠는 누구나 쉽게 배송 일을 할 수 있게 자전거 운송도 가능토록 했다. 라이더를 최대한 확보하고 있어야 ‘신속’ 배송이라는 목표를 이룰 수 있어서다. 라이더들은 업체가 주 운송수단을 자전거로 등록한 사람에겐 가까운 거리 콜을 우선 배정하는 경향이 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최근엔 운송수단을 자전거로 등록해 놓고 실제로는 오토바이로 배송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가까운 거리의 ‘꿀 콜’을 손쉽게 얻으려는 목적이다. 라이더들은 이들을 자토바이라 불렀다.

순식간에 검거 작전이 시작됐다. 작전은 2인 1조로 진행된다. 지인을 동원해 가까운 거리의 음식점 주문을 넣어 놓고 자토바이를 유인했다. 라이더가 콜을 잡으면 주문자에게 운송 수단 등의 간략한 정보가 뜬다. 예상대로 자전거 라이더에 배정이 됐다. 이제 위장 여부만 확인하면 된다. 이미 식당 근처에는 라이더 1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음식 픽업을 온 자토바이를 몰래 촬영해 플랫폼 운영자에게 신고했다. ‘검거완료.’

라이더들이 모여 있는 오픈 채팅방에서는 수시로 자토바이를 검거했다는 실적보고가 올라왔다. “오늘도 자토바이 검거했습니다.” “자토바이는 모두의 적입니다.”

말단끼리의 경쟁

요즘 라이더들 사이에 갈등이 번지고 있다. 전업과 파트타임 라이더 사이 갈등은 노골적이다. 배민이 지난해 배민 커넥터(파트타임 라이더)를 대폭 확대하면서 골이 생겼다고 한다.

플랫폼 노동자 정준수(가명·50)씨는 “전업 라이더들은 다 가족들 벌어먹이려고 하루 반나절 넘게 일하고 있다”며 “알바 하듯 나와서 한 콜 타고 놀다 가는 사람도 있지만 누군가는 그 한 콜이 절실하다”고 했다. 배민 라이더 배형태(가명·47)씨도 “본업으로 생각하는 분들과 알바 사이에 균열이 있다. 서로 티는 안 내지만 불만이 많다”며 “그분들(커넥터) 잘못은 아니지만 회사가 그렇게(커넥터를) 늘려 버리니까 지금은 너무 힘들어졌다”고 했다. 조인국(가명·41)씨는 “배달 건수가 10건 늘면 라이더는 100명이 늘고 있는 느낌이다. ‘알바들 때문에 망한다’는 말까지 나왔다”며 “트러블이 생겨서 서로 인사도 안 한다. 다 같이 죽자는 분위기”라고 했다.

정씨는 사업이 망해서, 배씨는 가게가 폐업해서, 조씨는 장사하다 사기를 당해서 플랫폼 노동자가 됐다. 빚이 있고,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있어 벌어야 할 마지노선이 있다. 그들이 못마땅해하는 커넥터는 상황이 다를까.

커넥터 박정규(가명·40)씨는 지난해 11월 다니던 의류 회사에서 나와 라이더가 됐다. 그는 “회사가 어리고 늦게 입사한 후배를 팀장으로 올렸다. 나가라는 무언의 메시지였다”고 했다. 초등학생 딸이 있어 회사에서 받던 월급 300만원만큼은 꼭 벌어야 했는데 일자리가 없었다. 주변 지인들이 “투잡으로 라이더가 괜찮다더라” 추천해줬다. 배민 커넥트와 쿠팡이츠 양쪽에 파트타임 등록을 했다. 그는 “이렇게 하는 게 다 생계유지를 위해서”라고 했다. 부친의 병원비, 두 아이 양육비를 벌기 위해 물류센터에서 나온 고종필(가명·40)씨도 더 많은 콜을 수행하려고 업체 두 곳에 파트타임 등록을 했다. 주말에도 습관적으로 콜을 찾는 그는 “애들이 좋아하는 치킨 한 마리 값이라도 벌려고”라고 했다.

경쟁을 부추기는 플랫폼

“또 똥 콜 떴네.” 황정민(가명·25)씨가 배달 앱에 뜬 황금색 복주머니 아이콘을 가리켰다. 현재 위치인 신촌에서 4.3㎞ 떨어진 서울역 샌드위치 가게 콜이 표시됐다. 복주머니는 배달 가능한 거리보다 다소 멀거나 기피지역 등에 추가 할증 금액을 붙여서 부르는 호출이다. 배민은 최근 복주머니가 붙어있는 ‘똥 콜’을 앱 화면 상단에 배치했다. 라이더들이 기피하는 콜을 처리하기 위해 돈을 더 붙여 상위에 노출시키는 것이다. 분초를 다퉈 더 많은 콜을 수행해야만 하는 라이더는 그게 성가시다.

복주머니는 시간이 지날수록 불어난다. 500원에서 시작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액수가 커진다. 라이더들은 불어나는 복주머니를 한참을 바라보다가 적당한 액수에 타협한다. 그래서 똥 콜이 많으면 플랫폼 업체는 손해다. 이를 해결하려면 라이더가 많아야 한다. 노동자끼리의 경쟁은 이 지점에서 비롯됐다.

플랫폼 업체 주 수익원 중 하나는 가맹 가게의 광고비다. 광고비를 최대한 올리려면 더 많은 가게를 플랫폼에 입점시켜야 하는데, 가게가 원하는 건 신속·정확 배달이다. 이때도 더 많은 라이더가 필요하다. 그래서 배달 경험이 없는 대학생이나 일반인들도 쉽게 플랫폼 노동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한 게 커넥터다. 커넥터 모집 광고 ‘내가 원할 때 달리고 싶은 만큼만’은 남는 시간에 부스러기 일감이라도 하려는 사람을 향한 구애다.

배민 라이더 숫자는 지난해 1월 1000명을 넘었고 연말 2283명으로 늘어났다. 1년 만에 2배 이상 증가다. 부업 개념인 커넥터는 지난해 7월 도입 이후 7개월 만에 1만4000명을 뛰어넘었다.


배달 노동자끼리 자연히 경쟁이 붙는다. 더 많은 콜을 효율적으로 잡아야 하는 라이더에겐 동료가 곧 경쟁자다. 플랫폼 노동자의 증가가 수익 하락으로 이어지고, 노동자끼리의 반목이 생기는 구조다.

“더 일하게 해달라”는 역설

“인형에 눈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60시간만 일하라고 하면 그걸 누가 붙이고 있겠어요. 건당 수수료를 받는 사람들한테 시간 규제를 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김호영씨·가명·41)

배민이 배달 시간을 제한하는 2060정책을 발표하자 나온 반응이다. 부업 개념인 배민커넥터는 주간 배달수행시간을 최대 20시간으로, 지입 라이더는 최대 60시간으로 제한하겠다는 정책이다. 우아한청년들은 “과도하게 장시간 배달을 수행할 경우 사고 위험이 증가한다”고 정책 도입 배경을 설명했다.

그런데 라이더는 그게 싫다고 한다. 5년차 라이더 최민수(가명·44)씨도 “개인 사업자라면서 근무 시간을 왜 제한하는지 모르겠다”고 불평했다. 김씨는 “인권 이런 거 필요없다”는 말까지 했다. 건당 수수료를 받는 라이더들이 오히려 장시간 노동을 자처하고 있는 모양새다. 생계를 위해 일감을 따내야 하는 노동자들은 노동시간보다 당장 떨어지고 있는 수익이 더 걱정이다. 생계비를 줄일 수 없는 가장 라이더들은 경쟁이 심화되면 더 오래 오토바이를 탈 수밖에 없다.

노동가치 하락은 플랫폼 노동자의 삶에 이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씨는 “예전에는 일당 채우려면 10시간 정도 했어야 하는데 지금은 12시간을 빠듯하게 해야 겨우 맞춘다”며 “자꾸 정책이 불리하게 바뀌어서 근로 의지가 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고종필씨도 “경쟁자가 많아지다 보니 수입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별다른 대안이 없는 이상 일단은 배달 플랫폼에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배형태씨는 “(최근 경쟁이 많아지면서) 점심시간이 돼도 콜이 잘 안 보이고 이러니까 그냥 일을 포기하고 퇴근해 버리는 일도 생겼다”며 “그러다보니까 멘털적으로 흔들리게 된다”고 말했다. 조인국씨는 “말단의 말단으로 내려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런 생각을 갖고 일하게 된다”고 했다.

정흥준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요새 배달은 젊은 사람들이 잠깐 하고 나가는 뜨내기 일자리가 아니다. 중요한 생계형 일자리로 바뀌고 있다”며 “(그러나) 경쟁자들이 몰리면서 하루에 11~12시간 주 6일을 타지 않으면 300만~350만원을 못 버는 상황이 됐다. ‘바닥을 향한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플랫폼으로의 종속

강수현(가명·33)씨가 배달을 위해 접속한 휴대전화 애플리케이션은 가끔 ‘업데이트’를 요구하며 스스로 꺼진다. 플랫폼에서 일감을 받기 위해선 업데이트를 할 수밖에 없는데 이 과정에서 애플리케이션은 ‘바뀐 시스템에 동의하냐’고 묻는다. 바쁘게 배달을 하는 도중에 무엇이 어떻게 바뀌는지 자세히 살펴볼 겨를도 없다. 하던 일을 마저 하기 위해 일단 ‘동의한다’는 항목에 체크하고 업데이트를 한다. 강씨는 “뜬금없이 동의를 할 수밖에 없는데 사실상 강제 동의가 아니냐”면서 “이런 방식으로 많은 정책들이 새로 도입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라이더들은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는데도 업체에 종속돼 간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토로한다. 쿠리어(쿠팡이츠 배달)로 활동하고 있는 민홍기(가명·35)씨의 휴대전화 화면에는 그의 평점이 적혀 있다. 고객의 평가 외에도 배달 요청 수락률, 배달 완료율, 약속시간 내 도착률 등이 한눈에 보인다. 업체는 지난 1월부터 평점이 높은 라이더에게 주문을 우선 배정한다. 지시를 잘 수행하면 평점이 올라가고, 일감 받을 확률이 커진다. 똥콜 몇 개를 취소했더니 평점이 떨어졌다. 고객이 배송지를 잘못 적어 점수가 깎이기도 했다. 이후 민씨 일감이 뚝 떨어졌다. 주문이 많은 가게 앞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민씨에게까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돌아오지 않았다. 민씨는 “나보다 평점이 높은 사람들이 콜을 가져가니까 가는 사람만 계속 가게 된다”며 “옆에서 콜을 놓친 사람들은 속이 탈 수밖에 없다. 평점을 두고 기사들끼리 싸움을 붙이면서 사람을 길들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AI(인공지능)까지 등장했다. 배민이 최근 AI가 자동으로 라이더의 동선을 고려해 배차를 추천해주는 모드를 추가로 제공하겠다고 발표하자 라이더 커뮤니티는 술렁였다. 한 라이더는 “말이 추천 배차이지 결국 똥콜이 남지 않도록 강제로 배차하려는 속셈이 아니겠냐”고 의심했다. 1년 정도 플랫폼 노동을 하고 있는 박찬우(가명·23)씨는 “플랫폼이 내 머리 꼭대기에 앉아서 나를 놀리는 기분이 든다. 이런저런 제도들이 계속 바뀐다. 라이더들은 생각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정책을 바꾸고 일방적으로 통보한다는 인상이 강하다”고 했다.

김병주(가명·51)씨는 “업체는 저희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할 수 없게 돼 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알면서도 그냥 넘어가는 부분이 많다. 항상 종속된 느낌을 받고 있다”고 했다.

김유나 정현수 김판 임주언 기자 spri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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