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정부, 진보적 예술인들 '좌파 기생충' 낙인.. 지원서 아웃 [이슈 속으로]

김태훈 2020. 2. 15.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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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쾌거로 본 문화계 블랙리스트 전모 / 2016년 도종환 의원 첫 폭로 / '공권력 조롱·사회 불만세력 부추겨" / 정부에 비판적인 문화인사들 솎아내 / 봉준호 감독·배우 송강호 등도 포함 / '광해' '변호인' 등 배급한 CJ도 '눈 밖' / 박영수 특검, 실세 소환 조사 / 김기춘·조윤선 등 '직권남용' 실형 / 대법, 파기환송.. 사법적 평가 진행형 / '악몽 딛고 한국영화 세계 속에 우뚝 / 정부 차별적 지원 안돼" 교훈 남겨
#1 박근혜정부 출범 첫해인 2013년 말. 손경식 CJ그룹 회장 앞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조원동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 다짜고짜 만나자고 했다. 회동 자리에 갔더니 조 수석은 대뜸 “CJ 이미경 부회장이 자리를 비켜줬으면 좋겠다. 이건 대통령 말씀”이라고 했다. 비선실세 국정농단 사건이 터진 뒤인 2016년 말 국회 국정조사 청문회에 출석한 손 회장은 “우리가 경솔하게 대통령이 왜 그러는지 추측할 수는 없고, 조 수석이 확실하게 말씀해 줘야 하는데 그도 확실하게 말을 하지 않았다”며 난감했던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2 지난 10일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제92회 미국 아카데미 영화상 시상식.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작품상 수상작으로 호명된 뒤 CJ 이미경 부회장이 무대 중앙에 등장해 마이크를 잡았다. “봉 감독의 제작 방식, 웃는 모습, 걷는 모습까지 모두 정말 좋아합니다. 한국의 영화 애호가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이 부회장이 하버드대 출신답게 영어로 소감을 밝히자 행사장 객석을 가득 채운 할리우드 인기 배우들도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정작 국내 영화팬 중에는 ‘저 사람이 왜’ 하는 반응을 보인 이가 많았다. 영화 ‘기생충’의 배급사가 바로 CJ다.
 
봉준호 감독. EPA연합뉴스
봉준호(사진)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한국 영화로는 처음 미국 아카데미 영화상에서 작품상·감독상·각본상·국제영화상 4관왕을 휩쓰는 금자탑을 쌓은 뒤 네이버 등 인터넷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봉준호’를 검색하면 꼭 함께 뜨는 연관검색어가 있다. 다름아닌 ‘블랙리스트’다. 박근혜정부 시절 정권에 비판적인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정부 지원에서 배제하기 위해 만든 명단이 바로 블랙리스트다. 이 사건을 수사해 관련자 여러 명을 구속기소한 박영수 특별검사는 블랙리스트란 외국어에서 느껴지는 차갑고 섬뜩한 어감을 피하기 위해 ‘지원배제명단’이란 표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박영수 특검, 블랙리스트에 ‘칼’ 겨누다
14일 문화예술계와 법조계에 따르면 블랙리스트 사건은 2016년 10월10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더불어민주당 도종환 의원이 국회에서 “박근혜정부 청와대와 문화체육관광부 등이 정권에 비판적인 문화예술계 인사들 명단을 만들어 따로 관리하며 정부 지원에서 제외하고 있다”고 블랙리스트 의혹을 처음 폭로한 것이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작성 주도한 혐의로 조윤선 전 문체부장관이 2017년 1월 17일 오전 서울 강남구 대치동 특검사무실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문체부는 즉각 반박에 나섰다. 그해 10월13일 조윤선 문체부 장관은 국회에 출석해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는 형식을 빌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박근혜정부 비선실세로 지목된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의 국정농단 의혹이 불거지면서 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했다. ‘이게 나라냐’라는 구호 아래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며 주말 저녁마다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는 매번 블랙리스트 의혹에 단단히 화가 난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여럿 참석해 연단 위에 오르곤 했다.

당시만 해도 블랙리스트 의혹이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을 일이긴 하나 형사처벌 대상인 범죄는 아니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진보성향 정권이 같은 진보성향 문화예술인들을 지원할 수 있듯이 보수 정권이 보수성향 문화예술인들을 더 각별히 챙기는 것 역시 정부의 ‘재량’에 속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보편적이었다.

2016년 12월 출범한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이런 선입관을 뒤엎고 블랙리스트 의혹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특검팀의 검사와 수사관들이 꺼내든 카드는 다름아닌 ‘직권남용’이었다. 일부가 아닌 전체 국민에게 봉사해야 할 공직자는 공평무사가 생명임에도 진보냐 보수냐로 편을 갈라 특정 진영을 지원에서 아예 배제해 버린 건 공무원으로서 권한을 남용한 행위라는 법리를 들이밀었다.
◆유진룡 “김기춘에 분노… 때렸을지도”
그다음 벌어진 일들은 우리 국민의 기억 속에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당시만 해도 현직이던 조윤선 문체부 장관과 김종덕 전 문체부 장관, 정관주 전 문체부 1차관, 청와대 김상률 전 교육문화수석과 신동철 전 정무비서관 등이 줄줄이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이들 중 박근혜정부 청와대의 ‘왕실장’으로 통한 김 전 실장과 당시 박 대통령 신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진 조 장관의 구속수감은 파장이 엄청났다.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이 9일(현지시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이 최고작품상을 수상하자 영화 관계자들과 기쁨을 나누고 있다. 로스앤젤레스=EPA연합뉴스
검찰과 특검 수사로 드러난 블랙리스트 사건 피해자의 면면은 화려하다. 가장 먼저 CJ그룹을 들 수 있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를 제작하고 ‘변호인’을 배급했다는 이유로 박근혜정부 출범과 동시에 철퇴를 맞았다. 두 영화 모두 노무현 전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그렸다는 점이 문제가 됐다. 청와대 경제수석을 앞세운 정권의 핍박을 견디다 못한 CJ 이미경 부회장은 결국 2014년 경영에서 손을 떼고 미국으로 떠났다.
영화 '변호인'의 송강호.
‘거장’ 봉준호 감독도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그가 만든 영화 ‘살인의 추억’과 ‘괴물’, ‘설국열차’가 국가 공권력을 조롱하고 사회 불만세력의 봉기를 부추긴다는 게 이유라고 했다. ‘기생충’에 출연한 배우 송강호 역시 블랙리스트에 포함됐다. 영화 ‘변호인’에서 노 전 대통령 역할을 맡은 것 때문에 정권에 미운털이 박혔다.
유진룡 전 문체부 장관
박근혜정부 첫 내각의 문체부 장관을 지낸 유진룡 현 수림문화재단 이사장의 발언에선 김기춘 전 실장 등 청와대 실세들 위세에 눌려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실행에 옮겨야 했던 문체부 공무원들의 비애가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국정농단 사건 수사가 한창이던 2016년 말 어느 라디오 방송에 출연한 유 전 장관은 “김기춘 실장을 보면 따귀나 뒤통수를 때리는 등 사고를 일으킬 수 있어서 (한자리에 동석하는 걸 피했다)”라고 말했다.

◆‘지원은 좋으나 차별은 안 돼’ 교훈 남겨

형사사법 절차라는 측면에서 보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특검의 기소 후 3년 가까이 지나도록 사법부의 최종 판결이 내려지지 않은 탓이다. 사실 이 사건 재판은 특검 입장에서 보면 순항을 거듭하는 듯했다. 1심은 김기춘 전 실장에게 징역 3년 실형을 선고하는 등 관련자 모두를 유죄로 판단했다.

항소심도 엄격하긴 마찬가지였다. 김 전 실장은 1심보다 오른 징역 4년에 처해졌다. 1심은 집행유예 선고를 받고 풀려났던 조윤선 전 장관도 항소심에선 징역 2년 실형 선고를 피하지 못했다. “정권과 코드가 맞는 문화예술인들한테 더 많은 지원을 하는 건 정부 재량으로서 적법하다”는 피고인들의 항변은 받아들여질 여지가 없는 듯했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왼쪽),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
그런데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올해 1월30일 김 전 실장 등의 항소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내 다시 재판하도록 했다. 원심이 유죄로 판단한 일부 혐의에 대해 재심리를 요구한 것이니 사실상 ‘일부 무죄’ 취지다.

대법원은 “김기춘 전 실장 등이 박근혜 대통령과 공모해 개인 또는 단체의 이념적 성향이나 정치적 견해 등을 이유로 정부 지원에서 배제한 것은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다만 직권남용 혐의를 입증할 구체적 사례로 지목된 일부 행위에 대해선 “직권남용으로 볼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블랙리스트 사건 관련자들의 형량이 2심보다 낮아질 길을 열어준 셈이다. 따라서 항소심까지 실형이 선고된 피고인 중 일부는 파기환송심을 거치며 집행유예 판결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기생충’의 오스카 4개 부문 수상 소식을 접한 대다수 인사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이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반응을 보였다. 비록 이 사건에 대한 사법적 평가는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한 가지 교훈만은 확실해졌다. 문화예술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좋으나 ‘차별적’ 지원은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문화예술계 전반에 대한 장기간의 차별적 지원을 통해 다수 문화예술계 종사자가 불이익을 당했다.” 블랙리스트 사건 정점에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1심 법원 유죄 판결문의 한 구절이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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