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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Weekend Interview] 1990년대 인기그룹 인공위성 리더 출신 양지훈

김시균 기자
입력 : 
2020-02-14 17:09:58
수정 : 
2020-02-15 06: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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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가수서 대기업 직원으로, 여행작가로
`무모하게` 산 덕분에 지금의 행복 얻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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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큰 인기를 끌었던 국내 최초 아카펠라 그룹 '인공위성' 멤버 양지훈 씨가 아내와 같이 운영하는 서울 마포구 한 라이브 카페에서 기타를 연주하고 있다. 양씨는 그룹이 해체된 후 회사원, 미국 길거리 가수, 여행 작가 등 가슴이 시키는 대로 다양한 삶을 살아왔다. [이충우 기자]
1990년대 대한민국을 휩쓴 아카펠라 그룹이 있었다. 1993년 데뷔한 '인공위성'이다. 아카펠라 개념조차 생소하던 시절, 풋풋한 서울대 재학생들로 꾸려진 6인조 그룹이었다. '원조 엄친아' 그룹 인공위성은 40만장이 팔린 1집 음반 타이틀곡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를 앞세워 가요계를 평정했다.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렇게 알 수 없는 기분을/ 모든 것이 우릴 위해 있어/ 그대가 나와 함께 있다면…."

인공위성의 등장은 한국 가요계에 '사건'이었다. 무반주 합창을 선보인 아카펠라 그룹은 최초였고, 서울대 멤버로만 구성된 그룹도 전례가 없었다. 매일같이 팬레터가 쌓여갔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방송 출연 제의도 잇따랐다.

그러나 인기는 한철이었다. 4집이 나올 무렵 가장 오래 활동했던 원년 멤버 양지훈마저 대기업에 취직해 회사원이 됐고 인공위성이라는 이름은 사람들 머릿속에서 잊혀갔다.

그 이후 양지훈은 30대 내내 회사원으로 살았다. SK텔레콤, 제일기획, 네이버 등이 그가 거친 직장이다.

양지훈에게 회의감이 밀려든 건 나이 마흔 때였다. 이렇게 사는 것이 맞나 싶었다. '날 위한 시간'은 지금껏 없었다. 자유롭지 않았고 즐겁지도 않았다. 결국 2011년 양지훈은 사표를 낸다. 미련 없이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갔고 팝송 명가로 꼽히는 할리우드 뮤지션스인스티튜트(MI)에 진학한다.

그는 이제 서울로 돌아와 음악 프로듀서, 인디 가수, 여행작가 등으로 일하며 인생 3막을 펴고 있다. 아내와 차린 라이브카페에서 매주 음악 팟캐스트도 진행하는 그는 "나이 마흔에 용기를 내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즐겁게 살진 못했을 것"이라며 허허 웃었다. 과연 그사이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최근 서울 합정역 인근에서 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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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그만둬야 할 만큼 절실했나. ▷애초에 뼈를 묻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음악으로 먹고 살기 힘들겠다는 생각에 막연한 두려움을 안고 회사원이 됐다. SK텔레콤, 제일기획, 네이버 등을 다녔는데 직장인 10년 차에 다다를 무렵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게 뭐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20대 때 아카펠라로 많은 인기를 모았지만 내가 진짜 좋아하는 건 1970~1980년대 미국 팝송임을 깨달았다. 더 늦기 전에 정말 제대로 팝을 해보고 싶었다. 돈도 꽤 벌었던 터이고, 두려움도 적었던지라 주저 없이 사표를 낸 뒤 할리우드 MI에 등록했다.

―현지에서 독립 뮤지션 길로 뛰어든 셈인데.

▷아내와 같이 LA에 있을 땐 그저 편하게 지냈다. 재즈 하면 버클리음대인 것처럼, 팝송 하면 LA에 있는 할리우드 MI다. 2011년 3월부터 1년 반 코스로 보컬을 전공하고, 독립 아티스트 학과를 부전공으로 배웠다. 그때부터 5년을 미국에서 살았는데 귀로만 듣고 영상으로만 보던 옛 가수 공연과 인생 팝송들을 실황으로 정말 원없이 접했다. 즐거웠다. 학교에서 혼자 내 음악을 프로듀싱하고 음반을 내고 홍보하는 법도 배웠다. 팝송 6곡을 묶어 정식 앨범도 냈다. 하지만 아내가 직장 발령 기간이 끝나 한국으로 돌아간 이후 3년간은 독수공방하면서 가난한 뮤지션으로 살아야 했다. 회의감이 깊어지던 중 '로드트립'을 결심하게 됐다. 미국 곳곳을 떠돌면서 버스킹(길거리 음악)이라도 해보자는 의도였다.

―어떻게 실행으로 옮겼나.

▷막연하게 내 페이스북에 미국 대륙을 일주하는 지도를 그려 짤막한 글과 함께 올려봤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하나둘 같이 일주해보자는 사람들이 나타나더라. 네이버 여행+에서 온라인에 여행 이야기를 연재하자는 제안도 들어왔다. 판이 달라진 거다. 어떻게든 실행에 옮겨야 했다. 50일 일정으로 총 1만2500마일, 거의 2만㎞에 이르는 코스였다. 하루 400㎞씩 렌터카로 누볐고, 그걸 묶어 낸 책('미국을 달리다')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여행작가가 됐다.

―기억나는 일화가 있나.

▷LA에 있는 한 북부지역에서였다. 완전 백인촌인데, 야외 마트 앞에서 팝송 버스킹 공연을 벌였다. 비유하자면 베트남 친구가 부산 거리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르는 느낌이었으려나. 그날 유독 기타 연주가 잘 안 되고 힘도 빠져 정리하려던 차였다. 그때 한 백인 할머니께서 다가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만 살려고 마을을 마지막으로 한번 돌아보고 있었어요. 그러다 어디선가 신기한 노랫소리가 들려오더군요. 날 구해주러 온 당신은 천사인가요?"

할머니 마음을 울린 노래는 내가 미국에서 낸 첫 앨범 타이틀곡 'Drive into the sunset'이었다. '석양이 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아, 해가 뜰 때까지 달려갈 거야'라는 가사가 있는데, 이게 그분에게 삶의 의지를 다잡게 해준 것이었다. 차를 몰고 숙소로 돌아가는 도로 끝에 주홍빛 석양이 내려앉고 있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그 경험이 현재 삶에 영향을 줬나.

▷10대 초반, 불면증을 심하게 앓아 굉장히 힘든 시기를 겪었다. 잠을 못 잔 이유가 눈을 감으면 세상이 깜깜해지는 게 두려워서였다. 그러다 보니 뜬눈으로 계속 있었고, 자연히 '사람은 왜 죽지' 같은 허무한 생각을 자주 했다. 당시 구원자가 돼준 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1970~1980년대 팝송이었다. 당시 귀로 듣던 팝송이 날 구원해줬던 것처럼 이제는 내가 만들고 부르는 팝송이 누군가를 구원해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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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펠라 그룹 인공위성의 2집 앨범.
―감성적인 소년이었는데 경영대에 진학했다. ▷난 부산 출신 1971년생이다. 91학번으로 재수해 서울대 경영대에 들어갔다. 음악인을 꿈꿨으나 먹고살기 어렵다는 주변 사람들 말에 설득됐다. 서울대에 들어가 혼성 합창단 활동을 했다. 그때 만든 소모임 '베거스' 멤버가 인공위성의 시발점이 됐다. 데뷔 멤버(양지훈, 고봉준, 조창익, 김형철, 박형규, 이상준) 중에 아카펠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논의한 끝에 아카펠라를 하기로 했다. 그때 롤모델은 영국 그룹 '킹스 싱어즈'였다.

―인공위성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과정은.

▷1993년 '청춘 스케치'라는 방송 프로그램이 있었다. 전국 대학교 음악 동아리가 모여 1등을 가리는 프로그램이다. 무반주 합창이라는 아카펠라 자체가 한국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때인데, 비틀스 명곡 '오블라디 오블라다(Ob-La-Di Ob-La-Da)'를 아카펠라로 불러 1등을 했다. 여기저기서 음반을 제작하자고 연락이 오더라. 하지만 우린 계약에 관심이 없었다. 공부가 중요했다. 중간고사·기말고사도 쳐야 하는데(웃음). 그러다 만난 게 동인기획 대표였던 임진모 선배(음악평론가)다. 그래서 그해 그룹 인공위성이 결성됐다. 100회 이상 방송에 출연했다. 하지만 1~2년 뒤 친구들이 하나둘 공부하러 떠나갔다.

―2001년에 그룹이 해체되는데.

▷멤버를 바꿔가며 총 8년을 활동했다. 우리가 뿌린 씨앗이 국내 아카펠라 확산에 기여한 점은 뿌듯하게 생각한다. 정규 앨범 4집과 캐럴 앨범 1집을 냈고, 2001년 해체한 후 제각기 사회로 흩어졌다.

―한국 나이로 쉰이다. 지금 삶은 어떤가.

▷2016년 한국에 돌아와 아내와 80일 동안 북유럽 5개국 투어를 했다. 그 경험을 매경 여행+에 연재했고 '아이슬란드를 달리다'라는 책도 냈다. 그해 11월엔 '옥탑방부엉이'라는 라이브 카페 겸 식당을 차려 아내와 운영하고 있다. 평일 저녁 8~10시 인디 뮤지션들이 자유롭게 공연할 수 있다. 내가 직접 팝송을 부르기도 하고, 아내와 '지훈 아울의 20세기 팝송 연대기'라는 팟캐스트를 한다. 음악 프로듀서로서 곡 작업도 계속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지금 나는 제일로 행복하다. 내가 왜 이리 생겨먹었는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든 걸 훌훌 털고 미국으로 떠난 뒤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무모했지만 한편으론 용감했다고 본다(웃음).

▶▶ He is…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0대 초반부터 미국 팝송에 미쳐 살았다. 서울대 경영대 시절인 1993년 한국 최초 아카펠라 그룹 '인공위성'을 만들어 큰 인기를 누렸다. 이후 음악판을 떠나 SK텔레콤, 제일기획, 네이버 등 대기업에 다녔다. 나이 마흔에 미국으로 가 팝송을 공부했고 2만㎞ 미국 버스킹 여행을 하면서 여행작가가 됐다. 현재는 라이브 카페를 운영하며 음악 프로듀서, 팝 뮤지션, 여행작가 등으로 인생 3막을 펼치고 있다.

[김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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