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39년간 가정폭력'.."집은 지옥이었고 우린 노예였다" ①

송성준 기자 입력 2020. 1. 21. 17:45 수정 2020. 1. 22.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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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SBS로 제보가 왔습니다.

가정폭력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의 장녀라면서요. 가해자는 친부이고 피해자는 어머니와 남동생 그리고 본인인데 다른 가정폭력 피해자와 가족의 안전한 자유에 대한 작은 도움이 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제보하게 됐다는 겁니다.

제보 내용을 살펴보면서 의문이 들었습니다. 가해자인 아버지는 경찰의 적극적인 수사로 구속이 됐는데 왜 또 언론에 제보를 하지?

대개의 경우 가족의 치부로 생각하고 쉬쉬하며 숨길 텐데 또 친부를 구속시킨다는 게 한국사회의 가족윤리로 볼 때 비난을 받을 소지도 있을 텐데 왜 제보를 할까? 하고 말입니다.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제보를 한 딸은 "아빠가 구속된 뒤 태어나서 처음으로 현재 엄마와 여행 중"이라며 부산에 오는 즉시 연락을 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지난 14일 어머니와 딸을 본가에서 만났습니다. 집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구속됐고 함께 살던 어머니는 현재 '쉼터'에서 보호받고 살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딸은 6개월 전 휴학하고 한국으로 들어와 어머니를 아버지로부터 탈출시키기 위해 그동안 백방으로 노력해 왔다고 합니다. 어머니를 더 이상 방치하면 신변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는 판단에 서둘러 귀국했다는 겁니다.

제보를 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비록 아버지가 구속됐지만 남아있는 가족은 "여전히 살해 등 신변의 위협을 느낀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치밀하고 잔인한 성격상 형을 받고 나면 반드시 보복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피해자이면서도 숨어서 살아야 한다는 두려움이 크다는 겁니다. 특히 우리 사회가 가정폭력에 대해 '개인 가정사'로 치부해 사회적으로 심각한 범죄로 인식하지 않는 경향이 크기 때문에 경종을 울리고 싶다는 겁니다.

그래서 가정폭력은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너무도 큰 상처를 주는 강력 범죄로 인식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함께 아버지에 대한 강력 처벌을 원했습니다.

또 하나 아버지를 격리시키겠다고 마음먹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이번 일을 시작하면서 법률적인 또 행정적인 지원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꼈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가정폭력 피해 가족에게 작은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이 가족은 경찰의 적극적인 수사와 법무부에서 지원하는 '법률홈닥터' 소속 변호사의 조언과 지원이 큰 힘이 됐다며 꼭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습니다.
 
* SBS 보이스(Voice)로 들어보세요.

☞ 아래 주소로 접속하시면 음성으로 기사를 들을 수 있습니다.
[ https://news.sbs.co.kr/d/?id=N1005614328 ]


● "집은 지옥으로 기억되는 장소.. 신체와 말할 자유 박탈당한 공간"
집은 이들 가족에겐 '지옥으로 기억되는 장소'였습니다. 단 10분도 마음 놓고 웃어본 적도 밥을 먹어 본 적도, 말을 해 본 적도 없는 '신체의 자유와 말할 자유가 완전히 박탈당한 공간'이었다고 합니다.

집을 둘러보았습니다. 먼저 아버지가 20여 년 동안 두문불출하며 술 마시고 인터넷 게임에 몰두했다는 방을 가 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술병이 의자에 놓여 있었고 방안에는 게임용 컴퓨터 모니터 3대와 온갖 컴퓨터 부속품으로 가득했습니다. 한 눈에 봐도 광적인 컴퓨터 게임 마니아라는 생각이 확 들었습니다. 안방과 작은 방 장롱과 가재도구 곳곳에도 컴퓨터 부속품으로 가득했습니다. 웬만한 전문가 뺨칠 정도로 부속품이 많았다고나 할까요.

또 특징적인 것은 각 방의 창문이 모두 폐쇄돼 있거나 책장으로 가려져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안방은 창문이 유일하게 하나 있는데 책장으로 막아 빛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빛이 통하지 않는 방에서 시도 때도 없이 무차별 폭행과 폭언에 시달려 왔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화장실에서는 성적인 가혹행위까지 당했다고 합니다.

● "아버지는 20여 년 전부터 컴퓨터 게임에 집착한 히키코모리형 인간"

어머니와 자녀가 전하는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어머니는 1981년 남편과 결혼했습니다. 22살 되던 해 선을 보고 남편 얼굴 세 번 보고 결혼을 하게 됐습니다. 남편이 집이 있고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고 있으니 생활은 힘들지 않겠다는 생각에 친정어머니는 시집을 보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는 결혼한 첫 날부터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습니다. 결혼 당일에도 술을 마시고 식장에 겨우 데리고 올 수 있었고 매일 술에 노래방 도박을 하며 허송세월을 보냈습니다. 술에 취해 귀가하는 날이 일주일에 5일 이상이었고 술에 취하면 밥상을 뒤엎거나 소주잔을 던지고 폭언에 폭행은 다반사였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레코드 가게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고 20여 년 전부터는 아예 모든 경제적 활동을 중단한 채 술과 인터넷 게임에 의존한 채 생활을 해 왔다고 합니다. 집 밖으로조차 나가지 않는 완전히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형 인간으로 변한 겁니다. 하지만 집 안에서는 자신은 왕으로 군림했고 가족들은 모두 노예에 불과했습니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밥은 물론 물도 갖다 바쳐야 할 정도로 일방적 지시를 했으며 밤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담배며 술이며 간식에 이르기까지 온갖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수입이라곤 1층 단칸방 4곳에서 나오는 수입 60여만 원이 전부였습니다.

● "결혼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행복했던 기억 없어"

어머니는 오전 11시부터 밤 11시까지 주방 보조로 일하며 생활비와 두 자녀 앙육비를 책임졌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것부터 남편 수발, 경제활동이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어머니의 몫으로 돌아왔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뒤에도 어머니는 편히 쉬지 못했다고 합니다. 남편의 술 시중부터 담배 심부름 심지어 자다가도 이불을 덮어달라고 깨우기가 다반사였고 조금만 기분이 안 좋아도 분풀이를 아내에게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폭언과 폭행이었고 시간이 갈수록 강도도 심해졌습니다. 그리고 살해 협박도 점점 자주 심하게 했다고 합니다. 집에서 어머니에게 허용된 유일한 말은 "예" 였습니다. "예" 이외의 대답을 하면 남편은 바로 주먹과 손에 잡히는 도구로 폭행을 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지난 40년 가까운 결혼 생활 중에 단 한 번도 행복한 기억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결혼 30년 만에 그것도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신 2015년에야 단 이틀 친정에 다녀온 것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 "가정 폭력은 자녀 아동학대로 이어져…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다"

가해자 아버지는 두 자녀에게도 폭언과 폭행을 서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심한 아동학대 수준이었습니다.

아들이 전한 탄원서 내용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에 대해 '그 인간'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아버지의 학대에서 가장 가벼운 단계는 입에 담기도 힘든 욕설과 책, 또는 공책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이 단계를 '운이 좋은 날'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다음 단계는 직접 손이나 발로 폭행을 했고 분이 풀리지 않으면 다음 날 아침까지 '엎드려뻗쳐' '원산폭격'(뒷짐 지고 땅에 머리 박기)을 시키고 몽둥이로 마구 패기를 일삼았다고 합니다.

더구나 날이 추울수록 집 앞마당에서 속옷만 입고 체벌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손에 잡히는 모든 용구가 폭행의 도구였고 멍과 피딱지로 딱딱해진 엉덩이와 허벅지, 그리고 안티프라민은 아들이 집을 탈출하기 전까지 언제나 함께했던 당연한 것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아들은 '죽음의 공포'도 느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의 목을 잡고 2층 난간 밖으로 내밀어 1층 마당으로 던지려 한 적도 자주 있었다고 했습니다. 또 어느 날 밤에 바닷가로 데려가 목을 잡은 채 머리를 바다에 집어넣었다가 꺼내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만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의 컴퓨터 게임을 위해 학교를 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아버지의 RPG 게임의 레벨업과 장비와 돈을 모으는 일을 보조하도록 했고 실수를 하는 날에는 어김없이 주먹이나 발 도구로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폭력이 행사되는 기준은 아버지의 '기분'이라고 아들은 밝혔습니다.

고3 때 아들은 결국 출석 일수가 모자라 퇴학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20살 되던 해 가출해 지금은 허름한 단칸방에서 세상과 단절한 채 그 역시 '히키코모리'형 인간으로 살고 있습니다.

아들은 가장 기억에 남는 폭력을 기억했습니다. 아버지의 폭력에 못 이겨 가출을 했다가 잡혀 왔던 날 안방으로 끌려가 깜깜한 방에서 두 손과 두 발을 밧줄에 묶고 입에는 재갈을 물린 채 전기선을 채찍처럼 이용해 몇시간 동안 맞았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용서해 달라고 싹싹 빌었지만 그럴수록 폭력은 더 심해졌고 입도 뻥긋하지 말라며 온갖 욕설로 다그쳤다고 합니다.

아들은 학교에서도 왕따 취급을 받았다고 합니다. 가출한 뒤 주로 지하철 화장실이나 빌딩 계단에서 잠을 청하며 외로움을 견뎠다고 합니다.

그는 스스로를 '망가진 인형'이라고 표현했습니다.

● "아들은 스스로 망가진 인형에 비유…희망을 봤으면 좋겠다"

저와 인터뷰를 할 때 어머니에게 가장 힘든 게 무엇이었냐? 고 질문했습니다. 어머니는 펑펑 울면서 아들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아들은 지금 거의 폐인이나 다름없이 세상과 단절된 채 홀로 살고 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찾아가려 해도 "오면 죽겠다"고 "내버려 달라"고 한다고 합니다. 아버지 구속을 위해 탄원서를 쓸 때도 " 엄마 내가 죽으려 해도 엄마 때문에 못 죽으니까 내가 몇 살까지 살다가 죽을까요?" 이러더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숨 쉬고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를 고소한 딸도 "남동생만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며 동생은 자살 시도를 한 게 최소한 3번 이상이라고 전했습니다. 불과 35살밖에 안 됐지만 스트레스와 삶의 무기력 때문에 이가 몽땅 빠졌고 사람의 몰골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누나의 간절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동생이 살면서 희망을 좀 봤으면 좋겠는데 그럴 수 없겠죠. 제 동생은 계속 숨어 살아야 될 거고. 엄마도 그렇고"

그렇다고 딸도 아버지의 폭행을 비껴간 것은 아닙니다. 아들과 똑같은 체벌을 받았습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결국 딸도 20살 되던 해 집을 떠나 아버지의 공포에서 벗어났습니다.
온 가족이 아버지의 가정폭력 때문에 풍비박산이 난 겁니다.

딸이 아버지에 대한 회고는 "공포 그 자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노예였다"고도 했습니다. 매주 평균 4~5회 정도는 맞고 밤새 벌을 서는 날들의 연속이라고 했습니다. (계속) 

▶ 2편 바로보기 ☞ [취재파일] '39년간 가정폭력'…"집은 지옥이었고 우린 노예였다" ②   
[ https://news.sbs.co.kr/d/?id=N1005614464 ]

송성준 기자sjso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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