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궁가'에 토끼춤 추며 떡도 나눈.. 명창의 따뜻한 송년

김경은 기자 2019. 12. 30.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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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숙선]
10년째 국립극장 송년 완창무대.. 올해는 제자 3人과 함께 올라
스승 정광수제 '수궁가' 불러.. 객석에 호박시루떡 돌리기도
"인생사 희로애락 담긴 판소리.. 셰익스피어 희극에 견줄 만해"

"야, 이 멍청이들아. 너거 눈꾸멍들이 썩었디야아아!"

600석 원형 공연장이 배 속에서 뽑아 올린 사설로 요동쳤다. 지난 28일 서울 남산 국립극장 하늘극장. '송년 완창(完唱) 판소리―정광수제 수궁가'에서 덫에 걸려 죽을 뻔한 토끼가 꾀를 내 풀려나고는 망연해하는 아이들을 향해 깔짝깔짝 뛰면서 외치는 순간이다. 주인공은 명창 안숙선(70). 1984년 시작돼 35년 전통의 국립극장 완창 판소리 시리즈 중 하나로, 1986년 처음 이 시리즈에 선 안 명창은 최다(29회) 출연 기록을 세웠고 국립극장에서 판소리 다섯 바탕을 모두 부른 유일한 소리꾼이다. 2010년부터 연말이면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해온 송년 완창 판소리는 올해로 딱 10년째가 됐다. "판소리 한 바탕 전체를 다 듣는 소중한 자리"(유영대 고려대 교수)답게 분주한 세밑, 영하의 추위에도 전석 매진이었다.

지난 23일 서울 세곡동 자택에서 만난 안숙선 명창. "소리로 내가 생각하는 인생의 그림을 그리고, 사람 사는 모습도 만들어 낸다"는 그는 아직도 "더 깊은 소리를 내지 못해 한스럽다"고 했다. "쉬지 않고 연습해야 해요. 질러대기만 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이면에 얽힌 본질을 파헤치고 싶어요." /이진한 기자

동편제 소리의 큰 봉우리였던 정광수 명창의 '수궁가'는 밀고 부수고 쫄깃쫄깃 맛깔스러운 자진모리를 필두로 격조 있고 고풍스러운 소리가 특징이다. 지금 사는 세상이 너무 고달파 딴 세상에 가 보지만 비정한 현실을 깨닫고 돌아오는 토끼의 살 떨리는 모험을 그렸다. 토끼는 조선 후기 핍박받는 인물, 토끼 간을 탐내는 용왕은 자기만 알고 병든 지배계층인 셈이다.

이선희·남상일·서정민 등 안 명창의 제자 셋이 앞부분을 나눠 불렀다. 승상은 거북, 승지는 도미, 판서는 민어다 보니 공연 내내 무대는 바닷물 넘실대는 용궁, 만선한 어부가 자랑스레 부려놓은 어물전이 따로 없었다. 정광수의 수제자인 안숙선 명창은 토끼가 수궁에서 살아 돌아와 뭍에 껑충 발 딛는 대목부터 불렀다. 그가 나오자 공기부터 달라졌다. 대낮에 시작한 공연은 어느새 어둑해져 있었으나 안 명창은 토끼춤 추듯 귀여운 발림으로 무대를 휘어잡았다. 150㎝의 작은 몸집에도 소리를 꾹꾹 눌러서 처음 공력 그대로 끝까지 갔다. 수궁을 벗어난 토끼가 자길 속인 별주부에게 냅다 욕하는 장면, 굶주린 독수리에게 또 붙잡히지만 천연덕스럽게 시조를 읊으며 발 빼는 장면에선 와르르 웃음이 터졌다.

28일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송년 완창 판소리-정광수제 수궁가' 무대에 선 안숙선. /국립극장

중간휴식 시간, 공연장 바깥에선 맛있는 좌판이 벌어졌다. 네 시간 넘는 공연에 출출해진 관객들에게 안 명창이 직접 가져온 호박시루떡을 나눠줬다. 판소리 '흥부가'에서 흥부의 아이들이 "뜨거울 때 먹어도 맛있고 식어도 맛있다"며 부자가 되면 먹고 싶다 칭얼댄 바로 그 음식이다. 매년 송년 판소리를 할 때면 그는 떡을 해왔다. "답답한 일 있어도 툭 털고 다 같이 만사형통하면 좋잖아요." 안 명창이 소녀처럼 웃었다.

국립극장 연습실에서 남산을 바라보며 다리를 일자로 쭉 찢는 일흔 명창의 모습에 후학들은 입을 다물지 못한다. "소리를 더 잘하고 싶어서 주민센터에 가 익힌 요가 덕분"이다. 별명이 '노래벌레'다. 1980년대 국립극장 지하에서 밤늦도록 개 짖는 소리, 새 소리, 귀곡성을 만들다 귀신으로 오해받은 적도 있다. "소리에 빠져서 소리와 함께 뒹구는 내 모습도 괜찮을 것 같았다"는 그는 "셰익스피어 5대 희극에 견줄 만한 것이 있다면 나는 단연코 우리 판소리 다섯 바탕을 꼽는다. 인생사 희로애락이 담긴 이 소리가 언제 세상에 나왔나 궁금하고, 어쩌다 맘에 쏙 들게 부르면 와, 보물을 얻은 듯한 기쁨이 있다"고 했다.

명창도 앓는 소리를 냈다. "잎사귀가 처음엔 연둣빛인데 여름엔 푸르다 못해 무서울 정도로 초록이 기승을 부리잖아요? 그러다 낙엽으로 변해 떨어지는, 그 모습이 지금의 내가 아닌가 싶어요." 그러나 소리는 "불에 김을 굽듯이 차곡차곡 주위를 돌아보면서 하는 것." 안 명창은 "늙거나 젊거나 소릴 해달라 하면 그저 기쁘다"며 "내년에도 떨어지지 않는 안숙선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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