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제 패망·미군 점령…현대 일본이 겪는 ‘정체성 혼란’ 제대로 파헤쳐

김시덕 | 문헌학자

소설가 무라카미 류의 현대 일본론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의 일본인 위령비. 2차 세계대전 종전을 이틀 앞둔 1945년 8월23일 소련 통치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중국 만주 지역에 잔류하고 있던 일본인들을 시베리아로 데려가 노동에 종사시켰다. 이때 울란바토르의 많은 건축물들이 이들 일본인 억류자에 의해 건설됐다.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의 일본인 위령비. 2차 세계대전 종전을 이틀 앞둔 1945년 8월23일 소련 통치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중국 만주 지역에 잔류하고 있던 일본인들을 시베리아로 데려가 노동에 종사시켰다. 이때 울란바토르의 많은 건축물들이 이들 일본인 억류자에 의해 건설됐다.

오늘은 무라카미 하루키와 혼동하는 분들도 많을 소설가 무라카미 류의 소설 세 편을 소개한다. 1994년 출판된 <5분 후의 세계(五分後の世界)·책표지 왼쪽>, 1996년 출판된 <휴가 바이러스 - 5분 후의 세계 2(ヒュウガ·ウイルス―五分後の世界 2)·가운데>, 2005년 출판된 <반도에서 나가라(半島を出よ)·오른쪽>다. 이들 소설은 1945년 8월15일 패전과 1952년 4월28일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 탄생한 현대 일본이 지금껏 겪고 있는 정체성 혼란을 잘 그려내고 있다.

[김시덕의 명저로 읽는 일본의 쟁점](6)일제 패망·미군 점령…현대 일본이 겪는 ‘정체성 혼란’ 제대로 파헤쳐

무라카미 류가 태어난 1952년은 일본을 둘러싼 국제 관계가 큰 전환을 맞이한 해였다. 그해 1월18일에는 한국 이승만 대통령이 속칭 이승만 라인(Syngman Rhee line)을 설정하고 일본 어선을 나포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군에 점령돼 있던 일본 시민들은, 대한민국이라는 이웃의 신생 독립국 대통령이 일본과의 합의 없이 일본 측에 불리한 정책을 시행해 수백명의 일본인을 억류하고 그중 수십명을 죽게 했다는 사실에 반감을 품었다.

당시 일본 시민들은 자신들이 제국주의 국가들 간 전쟁에서 패해, 수십만에서 수백만의 일본인이 아시아 대륙에 남겨졌고, 일본 본토는 미국 식민지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약육강식의 18~19세기에 여러 나라가 모두 제국주의 정책을 펼쳤는데 왜 일본에만 핵폭탄이 투하됐고, 왜 독일과 일본만 ‘전범’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의식이 그 배경에 있었다.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나 공산주의자 기타 잇키 등 일부 시민들의 저항이 꺾이면서, 대다수 일본 시민은 적극적·소극적으로 지배계급의 제국주의 정책에 찬성하게 된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발효되면서 일본의 식민지 상태는 끝나지만, 그 후로도 서양 열강에 대한 피해의식과 미국에 점령당했다는 식민지의식은 일본 사회에 깊게 자리하게 된다. 1956년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은 소련과의 공동선언을 통해 쿠릴열도 남부의 4개 섬 가운데 일부 또는 전체를 소련으로부터 양도받으려 했으나, 만약 이를 실행한다면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하지 않겠다는 미국 측 압박으로 실패한다. 소국주의(小國主義)를 주장한 정치인 이시바시 단잔의 내각이 1956~1957년 사이 짧게 존재한 뒤에 들어선 1957년의 기시 내각을 이끈 기시 노부스케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자금을 받았음이 훗날 미국 측 문서에 의해 드러난 친미파였다. 한국에서는 흔히 현 일본 총리인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의 우익적 성향을 강조하고는 하지만, 기시 노부스케의 우익적 움직임은 당시 미국의 묵인 내지는 적극적 간여에 의해 가능했다.

이렇듯 자주 외교를 꾀했던 정치인들이 좌절하고 미국의 승인을 받은 우파 정치인들이 득세하는 현대 일본 정치는, 현대 일본 사회의 풍조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인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미국이 이식한 민주주의 시스템, 주일미군, 미국적 생활 스타일이 현대 일본 사회 구석구석에 침투한 과정에 대해서는 모리 마사토의 <‘친미’ 일본의 탄생(「親米」日本の誕生)>(가도카와, 2018)에 잘 묘사돼 있다. 미국적 생활 스타일을 가장 가까이에서 경험할 수 있는 주일미군 기지촌인 나가사키현 사세보에서 태어난 무라카미 류는, 1976년 발표한 데뷔작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限りなく透明に近いブル-)>에서 주일미군 기지촌의 느낌을 잘 묘사하고 있다.

‘5분 후의 세계’ 핵폭탄 투하에도 저항하다 분할통치 상황들 묘사
‘휴가 바이러스’ 냉전 종결 후 지하 일본군 사이 퍼진 전염병 그려
‘반도에서 나가라’선 북한 특공대가 후쿠오카서 독립국 건설 다뤄

뒤이어 그는 1994년 3월 소설 <5분 후의 세계>를 발표하면서, 기지촌으로 상징되는 현대 일본의 미국 종속이라는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5분 후의 세계’란, 오키나와 전투와 히로시마·나가사키 핵폭탄 투하를 경험한 뒤 연합군에 항복해버린 일본을 가리킨다. 소설은 ‘5분 후의 세계’인 현대 일본에 살던 질 나쁜 주인공이 우연히 ‘5분 전의 세계’로 타임 슬립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 ‘5분 전의 세계’는 오키나와 전투와 두 차례의 핵폭탄 투하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저항을 계속한 끝에 연합군이 일본 본토를 점령하여 서독·동독처럼 분할통치하고 있는 세계이다.

연합군이 일본을 분할통치한다는 계획은 실제로 1945년 7월6일 JWPC385/1로서 입안되었다. 처음에는 미군이 단독으로 일본을 점령하고 그 후 소련군이 홋카이도와 혼슈 동북쪽 지역인 도호쿠, 미군이 혼슈의 대부분, 중화민국군이 시코쿠, 영국군이 규슈와 혼슈 서쪽 끝을 분할통치하고 도쿄는 4개국 군이 공동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JWPC385/1 계획이 입안된 한 달 뒤인 18일과 22일에는 미군이 일본을 단독 통치한다는 SWNCC70/5 및 150/3 계획이 입안됐다. 소련령 일본에서 수백만명의 일본인을 시베리아로 데려가 시베리아를 개발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던 스탈린은, 분할통치가 무산되자 1945년 8월23일 만주 지역에 잔류하고 있던 일본인들을 시베리아로 데려가 노동에 종사시켰다. 예를 들어, 몽골공화국의 수도 울란바토르의 많은 건축물은 이들 일본인 억류자에 의해 건설됐다. 한편 1946~1952년 사이 영연방군은 JWPC385/1 계획과 유사한 형태로 일본을 점령했다가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 일본이 정식으로 독립하자 철군했다.

즉 ‘5분 전의 세계’란 JWPC385/1 계획이 실현된 세계인 것이다. 이 세계에서는 1946년 8월에 종결된 제2차 세계대전 후 연합군에 의해 분할통치된 일본 각지에서 연합군 간의 전쟁 및 일본인 학살로 인해 일본인 인구가 1000만명 아래로 줄어들고, 덴노(天皇) 일가는 스위스로 망명하고, 1947~1949년에는 미군과 소련군이 도호쿠 전쟁을, 1949~1953년에는 미군과 중공군이 서부 규슈 전쟁을 벌이면서 일본 열도 전체가 혼란에 빠진다. 또 미국, 영국, 중화인민공화국이 1950년부터 수많은 이민자를 일본 열도로 이주시키면서 열도의 지상에는 대부분 혼혈과 외국인 이민자가 거주하게 된다. 이에 저항하는 세력은 언더그라운드, 즉 지하 동굴로 숨어들어 별도 국가를 만들고, 마치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콩이 그러했듯이 유엔군과의 전쟁을 이어간다.

언더그라운드의 일본 게릴라들은 1957년 쿠바로 건너가서 카스트로를 도와 쿠바 혁명을 성공시키고, 1967년에는 베트콩의 구정 공세를 지원한다. 이처럼 지하 일본군이 세계 곳곳에서 미국을 괴롭히자, 미군은 일본 혼슈 나가노의 지하에서 8차례에 걸쳐 소형 전술핵무기를 폭발시킨다. 이로 인해 지하의 자장이 뒤틀리면서 ‘5분 전의 세계’와 ‘5분 후의 세계’가 이어져 <5분 후의 세계> 주인공인 오다기리가 타임 슬립하게 된 것이다. ‘5분 전의 세계’의 지하 사령부에서는 오다기리처럼 타임 슬립해오는 사례가 잇따르자 여러 가지 시뮬레이션을 설정해 다른 세계의 상태를 추정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5분 후의 세계’, 즉 실제 일본은 시뮬레이션 8번에 해당한다.

“오키나와를 희생하고 무조건 항복한 경우엔 최종적으로 미국 가치관의 노예 상태가 된다고 하는 예측이 나왔습니다. … 즉 미국인이 갖는 어떤 이상적인 생활 양식을 도입하여 그것 자체를 이상하다고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 문화적인 위기감은 끝없이 제로에 근접해가기 때문에, 예를 들면 일본인만이 갖고 있는 정신성의 좋은 부분을 미국이 이해하지 않을 수 없는 형태로 발신한다고 하는 가능성은 없어지게 됩니다. 그렇지요, 미국에서 크게 유행되고 있는 생활 스타일이 그대로 일본에서도 유행된다, 거기에 가까운 상황이 된다는 것이지요.

정치적으로는 미국 안색을 살피고 미국이 바랄 것 같은 정책을 펼 수밖에 없게 된다, 외교 면에서는 특히 그 경향이 강해서 일본의 정치력, 정치적 영향력은 국제적으로 제로, 아니면 마이너스가 됩니다. 마이너스라고 하는 의미는 일본 외교력의 무능, 외교 정책 결정력이 없음이 국제적인 트러블의 원인이 되는 일도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번역 이창종, 웅진출판, 1995) 신랄하지 않은가. 이처럼 <5분 후의 세계>는 무라카미 류라는 저명한 소설가가 펼친 알기 쉬운 현대 일본론으로서, 현대 일본의 기원과 현재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일독할 가치가 있는 소설이다.

<5분 후의 세계>와 함께 읽으면 좋을 작품이, 미국 소설가 필립 딕이 쓴 <높은 성의 사나이(The Man in the High Castle)>(1962)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추축국이 승리해 미국 서해안을 일본이, 동해안을 독일이 정복한 상태를 그린 침략문학(Invasion Literature)이다. 침략문학이란 19세기 말 영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장르로서, 자기 나라가 외국의 침략을 받는다는 설정하에 스토리를 전개하는 전쟁문학이다. 미국의 필립 딕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미국에 승리했다는 설정의 침략소설을 썼고, 일본의 무라카미 류는 미국이 일본에 더욱 철저하게 승리했다는 설정의 침략소설을 쓴 것이다.

<5분 후의 세계>가 출판된 1994년은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1991년으로부터 3년 뒤이지만, 소설 속에서는 아직 냉전 종결 분위기가 읽히지 않는다. 1996년에 출판된 <휴가 바이러스 - 5분 후의 세계 2>에서는 소비에트 연방 해체와 함께 냉전이 끝나면서 유엔군과의 갈등 관계가 완화된 지하 일본군이 ‘휴가 바이러스’라는 전염병에 대처하는 내용이 전개되는데, 이는 한 해 전인 1995년 3월20일 발생한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사건에 대한 무라카미 류의 문제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 규슈 북부 후쿠오카시의 후쿠오카돔. 일본 작가 무라카미 류는 2005년 출간한 소설 <반도에서 나가라>에서 급박한 국제정세 속에 북한 특공대가 후쿠오카돔을 시작으로 후쿠오카 일부를 점령하는 이야기를 통해 일본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을 그려냈다.

일본 규슈 북부 후쿠오카시의 후쿠오카돔. 일본 작가 무라카미 류는 2005년 출간한 소설 <반도에서 나가라>에서 급박한 국제정세 속에 북한 특공대가 후쿠오카돔을 시작으로 후쿠오카 일부를 점령하는 이야기를 통해 일본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을 그려냈다.

뒤이어 2005년 출판된 <반도에서 나가라>는, 냉전 후 급박하게 전개되는 국제 정세를 틈타 북한 특공대들이 후쿠오카돔을 시작으로 후쿠오카 일부를 점령하고 독립국을 세운다는 설정이다. <5분 후의 세계>에서 JWPC385/1 계획에 따라 규슈를 점령하는 것이 영국군이었다면, <반도에서 나가라>에서는 그 주체가 북한 특공대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반도에서 나가라>의 흥미로운 점은, 2005년 출판된 이 소설이 2011년 3월11일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에 대한 예언 같다는 사실이다. 2011년 3월3일부터 본격화되는 북한 특공대의 수상한 움직임은 9인의 특공대가 야구 경기가 진행되기 전 후쿠오카돔을 점거하고 후쿠오카 독립을 선포, 12만명의 추가 부대가 북한에서 일본으로 이동 중이던 4월11일에 일련의 사건을 통해 북한의 선발 특공대가 전멸함으로써 후쿠오카 점령이 끝난다는 흐름으로 전개된다. 소설 속 3월3일은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한 3월11일로부터 8일 전이며, 무라카미 류가 소설 속에서 묘사하고 있는 일본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은 동일본 대지진에 이어 발생한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사고 때 현실로 드러났다.

일본인들 패전 뒤 ‘서양 열강과 미 식민지 의식’ 뿌리 깊이 새겨져
무라카미 류 ‘침략문학’ 3편은 일본인들의 피해의식 정확히 포착
소설 속 정부 무능·무책임…현실의 ‘동일본 대지진’서도 드러나

전쟁문학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감히 말하건대, 훗날의 사람들은 20세기 후반 한국 시민들이 국제 관계에서 느끼는 피해의식을 잘 포착하고 대외 팽창에의 열망을 자극한 것이 저명한 역사학자나 정치학자의 연구서가 아니라 김진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이현세의 <남벌>이었다고 판단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 의미에서, 무라카미 류의 세 편의 소설은 미군 점령과 함께 탄생한 현대 일본이 겪고 있는 정체성 혼란을 훌륭하게 파헤친 작품이자, 일본의 미래까지도 예언한 작품으로서 기억될 것이다.

■ 필자 김시덕

[김시덕의 명저로 읽는 일본의 쟁점](6)일제 패망·미군 점령…현대 일본이 겪는 ‘정체성 혼란’ 제대로 파헤쳐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문헌학자이자 인문저술가이다. 2010년 일본에서 간행한 <이국정벌전기의 세계―한반도·류큐열도·에조치>(가사마쇼인)로 일본 고전문학학술상을 외국인 최초로 수상했다. 2011년 2인 공저 <히데요시의 대외 전쟁>(가사마쇼인)은 일본 도서관협회 추천도서로 선정됐다. 10여종의 단행본, 공저, 번역서 등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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