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하지 않은, 그저 함께하는 소박한 ‘가족 전통’이 날 깨웠어

오지영

오지영의 ‘영국 시골살이’

올여름부터 신랑 조(Joe)는 내게 심각한 제안을 해왔다. 200만원 남짓으로 구입하여 우리가 직접 개조한 중고 승합차 ‘캠퍼밴’을 타고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말이다. 그게 가능하기나 하냐며 콧등으로도 안 듣는 나에게 어느 날 구글이 그랬다며 “밤낮으로(한시도 쉬지 않고) 달리면 5일이면 간다”고 말했다. 이 희망적인 숫자에 진짜 해볼 만하다 싶었는지 조는 이내 정신이 팔려버렸다. 아이들이 ‘쉬’가 급하다고 문을 두드릴 때까지 화장실에 들어앉아 남의 유튜브 세계 여행기를 시청하기도 하고, 한겨울의 시베리아 국도 상황을 인공위성 기록으로 살펴보기도 했다. 뭐, 꿈이야 꿀 수 있는 거니까, 하고 웃어넘기기엔 조의 전적이 꺼림칙하달까.

지난여름 가족모임에서 남편 조의 사촌형 리스는 조카들을 모델로 한 자작 동화를 선보여 인기 만점 삼촌이 되었다. 리스 삼촌(사진 오른쪽)의 동화 구연 솜씨도 일품이다(왼쪽 사진).

지난여름 가족모임에서 남편 조의 사촌형 리스는 조카들을 모델로 한 자작 동화를 선보여 인기 만점 삼촌이 되었다. 리스 삼촌(사진 오른쪽)의 동화 구연 솜씨도 일품이다(왼쪽 사진).

상상도 안되는 그 길. 집에 혼자 있을 때 애들 지구본을 꺼내 손가락으로 쭉 따라가 보았다. 영국에서 유로터널로 프랑스까지 건너가 독일, 폴란드, 벨라루스, 러시아까지. 러시아 모스크바까지는 그럭저럭 가겠고 볼거리도 꽤 되겠다 싶었다. 그런데 그다음부터 러시아 국토가 말도 안되는 반칙처럼 상상 이상이었다. 손가락을 거리 측정 도구 삼아 지구본에 대가며 이동해 보니 이 겨울에 가면 ‘시베리아에서 얼어 죽을 놈’이 딱 우리겠다 싶었다.

조는 바이올린을 배우고 있는 딸아이부터 꾀기 시작했다. 러시아 전통음악을 몇 곡 연습해서 여행하는 동안 버스킹으로 돈도 벌자고. 한복을 입고 하면 더 재미있겠다며. 요즘 돈의 맛에 슬슬 노출되고 있는 아이는 돈 벌자는 말에 마냥 신이 났다. ‘그 추위에 바이올린 켜다가 손가락 동상 걸려. 잘라야 할지도 몰라!’ 이렇게 찬물을 확 끼얹고 싶었다.

리스 삼촌은 조카들과 놀아줄 때도 상상력이 충만하다. ‘사악한 마법사’가 된 삼촌을 무찌르기 위해 원정에 나선 아이들.

리스 삼촌은 조카들과 놀아줄 때도 상상력이 충만하다. ‘사악한 마법사’가 된 삼촌을 무찌르기 위해 원정에 나선 아이들.

그렇게 조는 꿈을 꾸었고 나는 말도 섞지 말자는 심산으로 한두 달을 보냈다. 겨울방학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오자 조는 차량용 히터기를 백업용으로 두 개 더 구입하겠다고 했다. 몇 달 동안 나의 ‘어이없다! 웃음’과 ‘말해 뭐해? 침묵’을 조는 ‘예스(YES)’로 해석하고 있었단 말인가. 정말 더 이상 안되겠다 싶어 ‘노(NO)’를 명확히 외친 그날 밤 조는 “매우 실망”이라며 자리를 떴다. 그리고 그다음날부터 독감을 크게 앓았다. 심각한 편도선염으로 음식도 못 삼키고 말도 잘 못해 NHS(영국 국민보건서비스)에서 그 처방받기 힘들다는 항생제까지 타왔다.

리스 삼촌이 만든 동화책 덕에
작가가 꿈이 되어버린 아이들
리스 삼촌을 이렇게 키운 건
다재다능 다정다감한 큰어머니
영감 주고받는 부모와 자식관계
직접 보여준 그들 덕에
메마른 내 엄마 감성도 다시 촉촉

나는 애들을 봐서라도 좀 더 현명해지자고 내린 결단인데 독감까지 겹쳐 풀이 더 죽은 남편을 보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다른 ‘희망’을 줘야 할 것 같았다. “나중에 한국에서 러시아로 가보자. 여름에 현지에서 캠퍼밴 빌려서 시베리아 들판을 달려 보지 뭐. 아님 시베리아 횡단기차도 좋고.” 일단 지금은 아니라는 의미에서 ‘나중’과 ‘여름’이라는 조건을 달면서 조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자 조는 여전히 간절한 표정으로 한마디 던졌다. “누가 알아. 엄마와 아빠의 나라 사이에 어떤 세계가 있는지 피부로 직접 경험해 본 유년 시절의 기억이 우리 아이들을 모험가나 소설가로 이끌어 줄지?!”

그래, 정치에만 ‘명분’이 중요한 게 아니었구나. 무모해 보였던 부정(父情)이 맹모삼천지교 정신으로 보였다. 자신의 꿈이 ‘작가’로 바뀌었다고 공표한 아이는 부쩍 창작 활동에 열심이다. 선생님의 허락하에 쓸 수 있다는 스테이플러로 콕 집어 ‘책’을 자주도 만들어 온다. 첫 장에는 자랑스럽게 ‘Written By(~에 의해 쓰여진)’ 뒤에 자기 이름을 써두었다.

이 모습은 ‘매일 바뀌는 게 애들 꿈 아니냐’며 무심히 흘려 보내던 나를 돌아보게 했다. 몇 년 전 잘 다니던 직장 때려치우고 별 후회 없이 남편을 따라 영국으로 건너온 나의 결단에는 아이들이 가장 큰 이유였다는 사실도 기억났다. 첫째 아이는 (일찍 시작하는 영국 교육과정에 따르면) 이미 초등학교에 들어가 글을 익히기 시작할 나이였고, 둘째 아이는 엄마의 손길이 많이 가는 두 살이던 그때 말이다.

아이들에게 캠핑은 모닥불에 구워먹는 마시멜로의 맛으로 기억될 것이다.

아이들에게 캠핑은 모닥불에 구워먹는 마시멜로의 맛으로 기억될 것이다.

유학까지 다녀와 사회생활 잘해 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부모님과, 맞벌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한국사회 분위기 속에서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들 양육만 책임지기에는 내 스스로가 실패자처럼 보일 것 같은 걱정이 있었다. 영국에서는 그런 시선에서 자유롭게 우리 아이들 한 순간 한 순간을 지켜보며 키울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이 컸다. 그런데 초심은 차츰 변해갔다.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피곤한 소음처럼 들리기도 했고 집안일에 허덕이느라 애들 눈을 보고 대화할 여유도 점차 사라졌다. 매일 가는 놀이터는 언제쯤이나 졸업할 수 있을까. 나의 엄마 감성이 그렇게 퇴색해가고 있었다.

사실 아이의 꿈이 작가로 바뀐 데에는 조의 사촌형인 리스(Rhys) 삼촌의 역할이 컸다. 그는 올여름 가족 모임에서 일약 조카들의 스타로 떠올랐다. 다섯 명의 조카를 모델로 해서 직접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 손수 바인딩까지 한 동화책 <고양이와 마법사 생쥐>로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오직 다섯 권밖에 없는 이 책 첫 장에는 “너를 위해서 썼어. 즐겁게 읽기를 바라!”라는 감동적인 메시지까지 담았다.

가족들이 다 모인 가운데 삼촌이 근사하게 목소리 변조까지 해가며 동화책을 읽어주니 어린 관객들은 낄낄깔깔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첫째 아이는 자신이 꿈에도 바라던 ‘인어공주’ 캐릭터로 등장해 ‘거북이’나 ‘문어’가 된 여자 사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거기에 자신이 삼촌에게 예전에 그려줬던 외계인 캐릭터가 동화책에 깜짝 출연하자 신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 이날의 환희와 감동이 ‘삼촌처럼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발전한 것이리라.

아이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해 준 게 고마워서 “작품(동화책)이 수준급”이라고 거듭 칭찬하니 리스 삼촌은 머뭇거림 없이 “다 엄마 덕분”이라고 답했다. 어머니는 자기의 멘토이자 본받고 싶은 분이라며. 45살 솔로 아들에게 ‘멘토’로 불리는 엄마라니. 그 비결이 궁금해졌다.

리스 삼촌의 어머니는 독일 함부르크의 명문가 출신이다. 영국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조의 큰아버지와 웨일스의 한 바닷가 마을에 신혼살림을 차렸고, 지금은 영국 동네마다 사라져가는 우체국을 둘째 아들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여름 가족 모임이나 크리스마스 연휴가 되면, 자신의 아들들이 가지고 놀던 기차놀이 장난감이나 레고블록, 스머프 마을 세트, 손가락 인형 극장 등을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 아이들과 놀아주며 잠깐의 시간도 허투루 쓰는 법이 없는 분이다. 수준급으로 다루는 악기가 많음에도 가족들과 연주할 때는 꼭 ‘리코더’를 잡는 겸손한 연주자이자, 취미로 연극을 하는 아들의 무대 의상을 직접 만들고 영상기사로까지 활약하는 재주꾼이시다.

이 큰어머니의 제안으로 우리는 매년 10월 마지막 주, 핼러윈이 낀 주말에 웨일스 큰댁을 방문하고 있다. 지난달 세 번째 방문을 했는데 매번 스케줄은 비슷하다. 먼저 큰댁 정원에 피어 있는 늦가을 꽃들 감상하기. 큰어머니는 애들의 손을 이끌고 각각의 꽃 이름과 생김새를 차근차근 알려 주시는데 올해는 꽃 이름과 송이 수 맞히기 카드를 직접 만들어 오셔서 퀴즈 대결까지 벌였다. 저녁 식사 전에는 아이들과 함께 직접 디자인하고 조각한 ‘핼러윈 호박등’을 거실에 밝힌다. 등 하나에도 으스스한 분위기가 사니 애들은 가히 흥분 상태가 된다. 둘째 날에는 동네 역에서 증기기관차를 타고 웨일스 가을 숲을 가로질러 종착역으로 간다. 그곳 카페에서 내 엄지손가락보다도 통통한 마시멜로가 가득한 코코아 한 잔을 마신다. 해가 질 무렵에는 망원경을 챙겨 솔개들의 서식지로 향한다.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하늘에서 떠도는 솔개들의 모습에 한동안 시선을 뺏기고 집에 돌아와서는 큰어머니만의 레시피로 만든 ‘햄구이’ 만찬을 즐긴다. 마지막 날에는 동네 동물원 탐방. 웨일스의 자연이 그대로 펼쳐져 있는 소박한 규모지만 매끈한 뱀들을 직접 만져볼 수 있고, 몇 년 전 동물원을 탈출해 웨일스 전역을 뒤집어 놓았던 스라소니 커플과 성격 괴팍하기로 유명한 암사자를 볼 수 있어 인기가 높은 곳이다.

큰아버지는 이 스케줄이 해마다 이맘때면 두 아들과 즐겼던 추억이라고 했다. 그야말로 ‘가족 전통(Family tradition)’ 중 하나라는 것이다. 가족 전통이라. 단어 한번 거창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큰어머니가 책 한 권을 내미셨다. 내 나이 때 자신의 아이들에게 읽어주려고 쓴 자작 동화책이라는 설명이었다. 쓱 펼쳐보니 글과 그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재능이 정말 대단하시다는 나의 감탄에 큰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게 아이들은 영감을 주는 보석 같은 존재거든.”

서로 영감을 주는 부모와 자식 관계라니. 대놓고 부러워졌다. 요즘 부쩍 육아로 힘들어했던 스스로를 돌아보게 했다. 하루하루 사는 일에만 바둥거렸구나. 큰어머니 덕분에 나의 엄마 감성도 다시 촉촉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조의 고물 캠퍼밴 야심도 이런 거 아니겠어. 아빠는 아이 덕분에 용기를 내어 인생여행 한번 해보자고 하는 거고, 아이는 그 여행으로 미래의 꿈을 그리고 말이야. 그렇지만 조, 내가 정 용기가 안 나서 캠퍼밴으로 한국까지 못 가더라도 너무 실망하지는 말아줘. 덕분에 내가 큰 깨달음 하나는 얻은 것 같으니까 말이야!’



[다른 삶]거창하지 않은, 그저 함께하는 소박한 ‘가족 전통’이 날 깨웠어

◆필자 오지영


영국 유학생활 후 서울에서 12년간 홍보인으로 일했다. ‘직장맘’으로 쫓기듯 살다가 2017년 영국 이민자가 되어 ‘외국인 전업주부’ 타이틀을 달았다. 남부 햄프셔주의 시골에 살면서 남편(사진 왼쪽)과 함께 개조한 소박한 캠퍼밴으로 구석구석을 여행 중이다. 딸 둘 밥 안 굶기고 ‘인생 취미’ 하나 만드는 게 현재의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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