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t 돌 뚜껑이 몰래 품고 있었다..1500년 가야 무덤 미스터리
도굴되지 않은 원형의 63호분 첫 발굴
창녕 토기 뚜렷..인골 유무는 확인안돼
"가야 매장문화 등 보여줄 중요 사료"
크레인이 넓고 큰 화강암 뚜껑 돌을 들어 올리자 촘촘하게 돌로 쌓아올린 직사각형 석실이 드러났다. 1500년 만에 처음으로 빛을 쬔 잿빛과 갈색 토기들이 흙먼지 속에서 기지개를 켜는 듯했다. 일부는 깨졌지만 일부는 잘록한 목과 단단한 받침까지 온전한 형태가 가늠됐다. 무덤 주인이 저승에서도 풍요롭고 편한 생활을 하라고 매장 때 함께 묻은 부장품들이다. 무덤 주인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어줄 일종의 ‘타임캡슐’이다. 5세기 중후반 경남 창녕군 목마산 중턱에 조성된 이래 단 한 번도 손을 타지 않은 교동‧송현동 63호분의 내부가 이렇게 세상에 공개됐다.
거대한 화강암 7개로 석실 보호
이날 현장에선 63호분 석실을 덮고 있던 뚜껑돌 7개 중 2개를 들어 올리는 작업이 이뤄졌다. 각각 무게가 2.8t, 3.8t에 달했다. 뚜껑 돌 하나하나는 길이 2.5~3m, 너비 1m, 두께 최대 80㎝로 거대하다. 정 연구사는 “이 화강암은 인근 화왕산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운반하고 무덤 위에 덮었는지는 미스터리”라고 말했다. 두번째 돌 아랫부분에 붉은 색 주칠이 선명했다. 귀신을 쫓기 위해 칠한 것으로 보인다는 설명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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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쯤 세력 떨치다 신라에 흡수
금관가야‧대가야 등과 함께 세력을 형성했던 비화가야는 훗날 신라에 흡수 병합되면서 남은 기록이 사실상 없다. 정확히 언제 성립되고 말살됐는지조차 알 수 없다. 때문에 고고학적 발굴만이 역사를 말해줄 수 있다. 문제는 일제강점기였던 1910년 고분 조사가 시작된 이래 도굴이 극심했다는 점이다. 가야 고분은 일반적으로 돌로 무덤 벽을 쌓아 올린 후 그 위에 뚜껑 돌(개석)을 덮은 뒤 진흙이나 작은 돌로 밀봉하고 바로 흙을 덮는 형태다. 도굴꾼은 봉분을 파 들어간 뒤 뚜껑 돌과 측벽 사이 틈새를 이용해 석실로 들어가 유물을 털어갔다. 실제로 63호분 위에 자리한 39호분은 이런 식으로 털려 내부에 남은 유물이 거의 없었다. 대신 도굴꾼이 남기고 간 흙투성이 고무 대야 등이 덩그러니 뒹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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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굴꾼 거쳐 간 39호분엔 고무대야만…
63호분과 대조적인 39호분의 내부도 관심을 끌었다. 약 1.5m 길이의 큰 돌(판석)을 세우거나(양 장벽과 남단벽), 눕혀서(북단벽) 매장주체부의 네 벽을 만들었다. 이와 유사한 구조는 성주 성산동 고분군 등 대구·경북지역과 일본 나가노의 키타혼죠(北本城) 고분 등 나가노, 후쿠오카 지역에서 확인된다. 당시 비화가야와 주변국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자료다.
창녕=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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