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관승의 리더의 여행가방] 미니정보: '올랭피아'의 화가 마네와 모네의 우정

손관승·언론사 CEO출신 저술가 2019. 11. 27.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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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올랭피아(Olympia)는 마네와 모네의 깊은 우정을 상징하는 그림으로도 유명하다.

1867년 '새로운 그림의 기법'에서 졸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나는 감히 올랭피아를 걸작이라 말하고 이 말에 책임을 질것이다. 올랭피아는 화가 자신의 피와 살이다. 다시는 이만한 작품을 내놓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 속에 그의 모든 재능을 쏟아 부었으니까"에밀 졸라 덕분에 궁지에서 벗어났지만 마네 사후에는 미망인 쉬잔이 경제적 사정으로 상대적으로 인기가 적은 프랑스 대신 미국에게 팔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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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올랭피아(Olympia)는 마네와 모네의 깊은 우정을 상징하는 그림으로도 유명하다.

마네는 1863년에 출품한 ‘풀밭 위에서의 오찬’보다 먼저 구상되었다고 하며 2년 동안 자신의 화실에 묵혀두었다가 1865년 프랑스 국전인 살롱에 발표하면서 화제와 논란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이 작품이 발표되었을 때 보수적인 평론가와 언론들은 음란하고 상스럽다며 마네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악평과 혹평이 잇따랐을 뿐 호의적인 의견은 찾지 힘들었다.

이 그림에 비난이 집중된 또 다른 이유로는 형체를 평면적으로 처리한 대신 기교와 구성은 소홀히 한 채 에로틱한 밤의 세계만 그렸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평론가 귀스타브 제프루의 분석도 비슷하다.

"역마살이 낀 자유분방한 여인으로, 마네가 하룻밤 풋사랑을 나눈 술집의 바람기 있는 여인이다.
여인의 눈빛은 신비롭고 얼굴은 매정한 어린이 같다."

이 그림은 그러나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1538년)로부터 주제를 얻은 것이다. 마네는 1856년 이탈리아를 두 번째 여행했을 때 우피치 박물관에서 그 그림을 모사한 뒤 티치아노의 주제를 새롭게 해석하고자 하였다.

여신을 상징하는 비너스 대신에 벌거벗은 모델을 침대에 누이고 옆에는 흑인 하녀를 세웠다. 모델은 빅토린이었다.

그런데 프랑스 보수층에서 비난한 데는 올랭피아라는 이름도 한몫을 하였다. 그 이름은 당시 프랑스 화류계에서 흔한 이름이지만 동시에 교황 이노센트 10세 동생의 미망인이며 후일 교황의 애인이 되어 권력을 행사했던 여인 올랭피아 말다치니 팜필리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교황과 올랭피아의 관계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어서 가톨릭이 압도적인 프랑스 지도층들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올랭피아에는 고야의 ‘벌거벗은 마하’ 그리고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 앵그르의 ‘노예와 함께 있는 오달리스크’의 요소’도 뒤섞여 있다. 마네는 다양한 데서 영감을 얻었고 그 요소들을 자신의 구성요소로 사용했다.

혹평이 극에 달했을 때 마네는 브뤼셀에 가있던 보들레르에게 편지를 보내 고통을 하소연 하였고,
보들레르는 ‘자네가 훌륭한 화가임을 내 입으로 선언한다’며 그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회신을 하였다.

위기에 빠진 마네를 구해준 사람은 작가 에밀 졸라였다. 그는 마네의 솔직함 높이 평가하였다. 1867년 ‘새로운 그림의 기법’에서 졸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감히 올랭피아를 걸작이라 말하고 이 말에 책임을 질것이다. 올랭피아는 화가 자신의 피와 살이다. 다시는 이만한 작품을 내놓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 속에 그의 모든 재능을 쏟아 부었으니까…"

에밀 졸라 덕분에 궁지에서 벗어났지만 마네 사후에는 미망인 쉬잔이 경제적 사정으로 상대적으로 인기가 적은 프랑스 대신 미국에게 팔려고 하였다.

그러자 모네는 당대 프랑스 최고의 작가 작품은 루브르에 있어야 한다며 모금운동을 펼친 끝에 마침내 올랭피아는 프랑스에 남게 되었다. 무명 시절 자신의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선배 예술가에 대한 진정한 감사함의 표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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