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소성’의 가치, 장삿속 ‘한정판’엔 없다

정소영|패션칼럼니스트

후배가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했다. 패션 에디터의 특성이 그러하듯 그 또한 테니스 채를 사는 일보다 테니스 복과 신발을 사는 데 열과 성을 먼저 쏟았다. 다양한 정보를 끌어모은 끝에 테니스 화를 골랐는데 로저 페더러가 유니클로로 후원사를 옮기기 직전 나이키와 협업해 출시한 ‘코트 베이퍼 RF’ 시리즈 제품이었다. 지구에서 가장 희귀하고 예쁜 두 개의 종이 결합된 유일한 테니스화라나 뭐라나.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신발의 생김새가 아니다. 이미 단종된 제품이기도 하거니와, 출시 당시 한정판으로 판매되었던 이 신발을 웹서핑을 통해 태평양 건너의 판매자로부터 원래 가격보다 2배 이상을 주고 손에 넣었다는 점이다. “테니스 화가 테니스만 잘 칠 수 있으면 그만이지 시간과 돈을 들여 그렇게까지 사야 할 일이냐”며 그의 엄마는 자식의 등짝을 후려쳤다.

“지드래곤의 영감을 담아 탄생했다”는 한정판 ‘에어 포스 1 파라노이즈’ 제품.   나이키 제공

“지드래곤의 영감을 담아 탄생했다”는 한정판 ‘에어 포스 1 파라노이즈’ 제품. 나이키 제공

지난 11월8일 나이키와 지드래곤의 협업상품이자 역시나 한정판인 ‘에어 포스 1 파라 노이즈’를 사기 위한 사람들이 매장 앞에 400m의 긴 줄을 이뤘다. 바로 구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제품을 살 수 있는 자격을 얻는 추첨에 응모하기 위해서 말이다. 해당 운동화는 국내에서만 818켤레를 출시한 것으로 홍보됐으나, 이날 판매 수량은 159켤레였고 당첨 확률은 1.78%였다. 그러니까 몇 시간을 대기하고도 100명 중 98명은 에어 포스 1 파라 노이즈를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던 것이다. 재밌는 건 그다음이다. 브랜드 로고가 빨간색, 노란색, 흰색의 3가지 버전으로 제작된 이 신발의 가격이 30배 이상 치솟은 것이다. 정가 21만9000원인 이 신발은 현재 300만원부터 700만원대까지 거래되고 있다.

이미 패션계에선 한정판을 구매한 뒤 웃돈을 얹어 되파는 일이 ‘리셀 테크’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가장 대표적인 제품인 운동화의 경우 리셀 시장이 현재 20억달러 규모를 형성하고 있다. 미국의 한 투자회사는 2025년에는 60억달러 규모까지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주식처럼 운동화 시세를 매일 알려주는 사이트는 이미 미국에선 1조원대의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운동화는 예술 문화 및 패션이다. 명작이라 할 운동화를 경매할 것’이라며 세계적인 미술품 경매사인 소더비도 운동화 전용 경매에 뛰어들었으니 더 말해 무엇 할까. 첫 경매에 부쳐진 나이키의 ‘와플 레이싱 플랫 문 슈’는 5억1700만원에 낙찰되었다. 1972년 출시된 이 운동화는 나이키의 공동창업자 빌 바워먼이 개발한 러닝화로 뮌헨 올림픽 예선전에 나가는 육상 선수들을 위해 12켤레만 한정판으로 제작됐다.

한정판이라는 말은 마음을 설레게 한다. 희소성을 가진 물건을 구매하면 특별해지는 기분이 든다. 이런 심리에 ‘리셀 테크’까지 접목되어 한정판은 천정부지로 가격이 치솟기도 한다. 하지만 사는 자, 파는 자 모두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일까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몇 년 전 H&M과 세계적인 디자이너 브랜드 발망의 한정판 협업 제품 발매일이 떠올랐다. 당시 패션 에디터 자격으로 사전 구매를 할 수 있었는데, 막상 공개된 제품은 화제성에 비해 상당히 실망스러워 빈손으로 돌아섰다. ‘되팔기’로 수익을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리셀러들은 밤샘 줄서기를 마다하지 않고 제품을 쓸어갔으나 ‘리세일가’는 오히려 원래 가격보다 떨어져 버렸다. 생각보다 형편없었던 디자인과 질에 대중이 호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셀 테크의 어두운 면을 보여준 예다.

[정소영의 아는 패션]‘희소성’의 가치, 장삿속 ‘한정판’엔 없다

유명 화가들의 그림이 소더비 경매에서 몇 백억원을 호가하며 팔리는 이유는 단 한 점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대를 앞서가는 예술적 값어치가 있기 때문이다. 희소성은 어디에서든 빛난다. 하지만 ‘리미티드 에디션’이라는 솔깃한 단어를 앞세워 의미 없이 만들어낸 제품에 대중은 더 이상 설레고 싶지 않다. ‘한정판’이란 훗날 유물처럼 받들 만한 가치 있는 제품들에 훈장처럼 주어지는 이름이었으면 좋겠다. 패션의 분야이든 아니든 간에 말이다.


Today`s HOT
개혁법안 놓고 몸싸움하는 대만 의원들 영국 찰스 3세의 붉은 초상화 총통 취임식 앞두고 국기 게양한 대만 공군 연막탄 들고 시위하는 파리 소방관 노조
로드쇼 하는 모디 총리 2024 올림픽 스케이트보드 예선전
조지아, 외국대리인법 반대 시위 이라크 밀 수확
총격 받은 슬로바키아 총리 광주, 울산 상대로 2-1 승리 미국 해군사관학교 팀워크! 헌던 탑 오르기 미국 UC 어바인 캠퍼스 반전 시위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