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미투, 헛소문..체육계 첫 미투 이경희는 재가 됐다

민정희 2019. 11. 2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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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이경희 코치가 쏘아 올린 '체육계 첫 미투'

지난 2011년, 탈북 체조인 이경희 씨는 리듬체조 국가대표 코치에 임명됩니다. 그리고 3년 뒤인 2014년, 이 코치는 대한체육회에 대한체조협회 전무이사 김 모 씨로부터 3년 동안 성추행을 당했다며 탄원서를 제출했습니다. 대한체육회는 감사에 들어갔고, 김 씨는 면직 처리됐습니다. 수사기관은 아니지만, 대한체육회에서 어느 정도 김 씨와 관련된 의혹을 확인했다는 뜻일 겁니다.

이 코치는 2017년 5월 김 씨를 강간미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도 고소했습니다. 친고죄 규정이 폐지된 2013년 이전의 범죄여서 피해자 본인인 이 코치가 직접 고소한 것입니다. 그러나 6개월 뒤 검찰은 이 사건에 대해 '공소권 없음'과 '혐의 없음' 결론을 내렸습니다. '공소권 없음'의 이유는 그 옛 법에 따를 때 범죄 일시로부터 1년 이내에 고소했어야 했는데, 기간이 지났다는 것입니다. 또, 기타 혐의는 입증할 수 없다고 검찰은 판단했습니다.

당시 이 코치가 수사를 받았던 과정도 험난했습니다. 이 코치는 검찰에서 조사 받을 때 '자동차 안에서 성폭력 당했던 경험을 재현해보라'는 등의 '인격 침해'를 당했다고 주장합니다. 이후 국가인권위원회는 이 코치 사건을 수사했던 검사에게 서면 경고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 코치에 대한 성폭력 수사는 여기서 멈췄지만, 당시 이 폭로는 체육계에서 공공연하지만 은밀하게 이뤄지던 성폭력을 공개하는 그야말로 '신호탄'이 됐습니다.

감사가 시작되자 "이 코치와 나는 연인관계" 주장


이 코치가 겪었던 어려움, 비단 성폭력 뿐이었을까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 코치는 미투 이후 가해자의 끊임없는 2차 가해에 시달렸다고 말합니다. 김 씨가 2014년 대한체육회의 감사가 시작되자, 허위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김 씨는 "이 코치와 연인 사이였고, 결혼까지 생각했으며, 집에도 드나드는 상당히 깊은 관계였다"고 말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당시 대한체조협회 전무이사와 체조코치로 직장상사와 부하 관계였을 뿐 연인관계가 아니었고, 잠자리도 한 적이 없을 뿐더러, 결혼을 생각한 적은 더더욱 없었음에도 말입니다. 김 씨는 이 코치도 잘 아는 체조 관계자에게 이렇게 허위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또, 이 코치의 피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태릉선수촌 관계자에게는 "이 씨와는 결혼할 사이로 갈 때까지 갔다"라는 등, 허위 사실을 말하고 다녔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4년 후인 지난해에도 자신이 고소당한 강간미수 사건이 불기소처분된 것과 관련된 방송 프로그램이 방영되자 "방송사와 짜고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교묘한 편집을 해 방송했고, 지속적으로 언론플레이를 했다"라는 문자 메시지를 지인 20여 명에게 보내기도 했습니다.

성폭력과 2차 가해에 시달렸던 이 코치는 지난해 봄, 김 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다시 검찰에 고소했습니다. 하지만 체육계 관계자들이 진술을 꺼리면서 다시 김 씨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습니다. 이 코치는 서울고등검찰청에 재수사를 해 달라며 항고했고, 결국 서울동부지검이 명예훼손 혐의에 대해 재수사를 시작했습니다.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이 코치 "올림픽 금메달을 딴 기분"


1년 반 동안 수사해 온 검찰은 최근 2차 가해를 한 김 씨를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약식기소했습니다. 법원도 지난 8일, 김 씨의 명예훼손 혐의를 인정하고 벌금 300만 원의 약식명령을 내렸습니다.

물론 액수가 크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법원이 미투 폭로 이후 허위 사실로 끊임 없이 2차 피해에 시달리고 있는 피해자들의 상처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 코치는 이에 대해 어떤 입장을 나타냈을까요? 변호인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의 내용입니다.

"올림픽 금메달을 딴 기분입니다. 4년 동안 죽을 만큼 힘들었고, 정말로 기죽고, 몸과 마음이 재가 되었고, 티 안 내고 살려고 애쓰는 내가 봐도 불쌍했는데, 법적으로 인정해줘서 이 나라가 고마워집니다."

"힘들긴 하지만 명예훼손 벌금이 나와서 대단히 만족하고 기뻐요. 통일된 것보다 한이 풀린 기분입니다."

끝나지 않은 싸움…'체육계 미투'는 현재 진행 중

이 코치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코치가 원했던 것은 사실 명예훼손 혐의보다 김 씨의 성폭력 혐의가 수사기관에서 확인되고, 김 씨가 처벌을 받는 것입니다. 당시 법상 1년 이내에 고소를 안 했다는 이유로 검찰은 '공소권 없음' 처분을 했지만, 이 코치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검찰의 1차 수사 과정에서 중요한 부분이 간과됐다고 보고 다시 고소를 하기로 한 겁니다. 핵심은 김 씨의 행동이 '상습적'이었냐 여부입니다. '상습적으로' 성폭력을 저지른 사실이 인정된다면, 1년 안에 고소를 하지 않은 사건이라도 검찰이 수사를 할 수 있고, 혐의가 입증될 경우 재판에 넘길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코치가 검찰의 1차 수사 당시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이 코치는 김 씨가 자주 끌어안는 등 상습적으로 성폭력을 저질렀다고 검찰 수사 과정에서 여러 차례 말했지만, 검찰이 당시 상습 혐의를 적용하지 않고 이에 대한 수사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이 코치는 이런 점을 토대로 지난 4월 22일 김 씨를 상습강간미수와 상습강제추행 혐의로 다시 검찰에 고소했습니다.

성폭력, 2차 가해, 수사, 재판...탈북 체조인인 이경희 씨가 지난 9년 동안 겪었던 일들은 모든 게 낯설고 힘들었습니다. "4년 동안 몸과 마음이 재가 됐다"는 이 코치의 말이 이를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다시 수사에 나선 검찰이 이번에는 꼭 진상을 명확히 밝혀주길 이 코치는 바라고 있습니다.

민정희 기자 (jj@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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