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드업 코미디, 코미디의 새 장 열까

김태훈 기자 2019. 11. 16.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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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제가, 그런 별명이 있어요. 연예계의 칭기즈칸이다. 정복하지 못한 남자가 없어요.”

본격 ‘스탠드업 코미디’를 표방하며 무대에 오른 박나래(34)의 입담은 거침이 없었다. 지난 10월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OTT)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스탠드업 코미디쇼 <박나래의 농염주의보>에서 그는 특히 성과 연애를 소재로 ‘수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웃음을 전했다. 이전까지 방송을 통해 누리던 인기가 위협받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 주변에서 “방송 그만할 생각이냐”는 핀잔도 들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박나래는 11월 16일 처음 방영하는 KBS 2TV의 파일럿 예능프로그램 <스탠드업>에서도 MC를 맡아 오랜만에 지상파 방송에 진출하는 스탠드업 코미디의 선봉장 역할을 하게 됐다.

박나래의 스탠드업 코미디쇼 프로그램 <박나래의 농염주의보> 한 장면. / 넷플릭스 제공

스탠드업 코미디는 보통 코미디언 혼자서 마이크 하나만을 들고 말로 사람들을 웃기는 코미디 장르를 뜻한다. 둘 이상의 출연자가 나와 대화를 주고받는 식의 만담이나 특정 상황에서 벌어지는 코믹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콩트 등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좌중을 휘어잡을 만한 ‘말빨’에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처하는 즉흥적인 순발력, 준비한 농담을 더욱 실감나고 웃음기 넘치게 풀어나갈 연기력이 뒷받침돼야 하기 때문에 인기 연예인이라 할지라도 쉽게 도전할 분야는 아니다. 게다가 정치나 종교, 사회적 관습 등을 풍자해 웃음을 끌어내야 할 경우가 많아 자칫하면 기존의 이미지를 망치는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다.

■<박나래의 농염주의보> 인기 최정상

그럼에도 현재 인기 최정상을 달리는 박나래를 비롯해 중소 규모의 극장에서 관객을 바로 앞에 두고 스탠드업 코미디쇼를 이어가는 코미디언들이 늘고 있다. 한동안 불모지에 가깝던 국내의 스탠드업 코미디가 방송 및 공연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1980년대 컬러TV 보급 이후 주병진·김병조·김형곤 등 유명 코미디언들이 마이크 하나로 대중의 웃음을 끌어내던 시기도 있었지만 ‘풍자’를 받아들이지 못한 군사정권하의 경직된 분위기 탓에 이후 오랜 기간 국내의 스탠드업 코미디는 암흑기를 맞았다. 이후 방송의 코미디 프로그램 유행이 계속해서 바뀌는 와중에 “사장님 나빠요”라는 유행어로 유명한 KBS <폭소클럽> ‘블랑카’ 정철규 등이 명맥을 잇긴 했으나 여전히 코미디계의 주류로 올라서진 못했다.

지상파에서 찾기 힘들어진 스탠드업 코미디를 다시 시청자들 앞으로 이끈 데는 넷플릭스가 한몫했다. 스탠드업 코미디의 ‘본토’ 미국의 유명 코미디언들이 진행하는 코미디쇼를 국내 시청자들도 쉽게 즐길 수 있게 됐고, 2018년 방송인 유병재의 <B의 농담>, <블랙코미디> 등이 인기를 끌면서 이 장르는 차츰 주목받기 시작했다.

심의규정과 대중 정서 때문에 지상파에 나오기 힘들었던 ‘찐한’ 풍자와 농담을 만날 수 있는 창구가 열린 셈이다. 박나래도 <농염주의보> 방영 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방송에서 하지 못했던 게 뭘까 고민하다 연예인으로서 성적인 얘기를 쿨하게 터놓고 할 수 있는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성을 주제로 해보겠다고 결심했다”면서 “호불호가 갈리는 주제이기도 하지만 도덕적으로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놀자고 말하는데 놀 수 있는 무대가 많이 없지 않나”라고 말했다.

새로운 프로그램 <스탠드업>이나 이미 공개된 <농염주의보> 등은 모두 실제 다수의 관객이 참여하는 녹화장에서 실시간으로 관객들의 반응을 접하며 쇼를 이끌어가는 모습을 담은 방송 프로그램이다. 방송을 위해 압축해 편집된 이들 프로그램과는 달리 현장에서 바로 코미디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스탠드업 코미디쇼는 더욱 생동감 넘치는 웃음을 만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서울 강남과 홍대 등의 공연장에서 스탠드업 코미디쇼를 열고 있는 코미디얼라이브의 정재형 대표(31)는 아직까지는 스탠드업 코미디에 익숙지 않은 관객들과 만나며 여러 시행착오도 겪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 국내 관객들을 만나온 바로는 기존의 콩트 형식에 가까운 코미디, 그러니까 혼자서 표현하는 콩트를 선호하는 모습도 보이고 성대모사 같은 개인기도 틈틈이 섞어서 웃음을 끌어낸다”고 말했다.

정 대표는 지상파 공채 개그맨 출신으로 개그프로그램이 점차 위축되는 상황을 맞으면서 새롭게 관객들을 만날 길을 찾던 중 새로운 길을 개척해보겠다는 심정으로 스탠드업 코미디에 도전했다. “처음 나서서 스탠드업 코미디쇼를 한번 만들어보자고 했을 때 잘 될지 두려웠던 것도 사실”이라는 그는 “개그맨 출신뿐만 아니라 일반인 중에도 스탠드업 코미디쇼 무대에 오르겠다고 찾는 분들도 꾸준히 있어서 서로에게서 함께 배워가며 좀 더 국내 관객들에게 반응이 좋은 웃음 코드를 찾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정재형 대표와 알파고 시나씨도 주목

공연장에서 열리는 스탠드업 코미디쇼는 공연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5~7명의 코미디언이 각자 10분 남짓한 시간 동안 마이크를 잡고 관객을 들었다 놨다 하며 웃음을 끌어낸다. 관객들은 술이나 간단한 식사를 즐기기도 하면서 무대에 올라온 코미디언의 입담을 듣고 웃음을 터뜨린다. 흔히 스탠드업 코미디가 가진 인상처럼 사회 풍자나 짙은 성적 농담 정도에만 소재가 국한되진 않는다. 하나의 주제에 얽매이기보다는 코미디언마다 가진 개성을 최대한 표현하는 쪽에 가깝다.

터키 출신 언론인이자 방송인인 알파고 시나씨(29)도 해외에서 온 자신만의 독특한 정체성과 경험을 바탕으로 관객들을 웃긴다. “엄마가 한국에 오기 전에 세 가지 당부를 했어요. ‘술 마시지 말고, 도박하지 말고, 한 여자만 만나 결혼하거라.’ 내가 이걸 지키는 이유는요, 종교적인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엄마가 말한 대가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야 천국 가서 72명의 여종을 만날 수 있단다.’”(웃음) 다른 문화권에서 살았던 경험이 웃음의 소재가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한국 문화를 낯설게 보고 그 지점에서 관객의 마음을 흔들 수도 있다. 외모와는 달리 유창한 한국말을 쓰는 그가 ‘한국생활백서’라는 이름으로 한국만의 특별한 문화를 풍자하는 것만으로도 관객들은 웃는다.

코미디쇼를 위해 많은 시간을 들여 준비하고 연습하지만 전문적인 코미디언은 아니었던 알파고에게 스탠드업 코미디는 도전하는 삶의 일부분이다. 그는 “한국에 와서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고 느꼈던 게 ‘장르가 다양하지 않구나’ 하는 점이었는데, 그래서 스탠드업 코미디라는 비주류 문화를 주류로 정착할 수 있게 돕는다는 점만으로도 기분이 상쾌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더 나아가 가수나 배우에 비해 특히 코미디언은 사회적인 대우가 그리 높지 않은 현실도 좀 더 개선하고 싶다”는 바람도 밝혔다.

하지만 아직은 문화적 차이 때문에 보다 활성화되려면 풀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대중의 정서에 맞는 코미디 요소를 더욱 적극적으로 찾아내는 것은 물론 더욱 쉽게 접할 기회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17년간 미국에서 스탠드업 코미디를 해온 교포 코미디언 대니 초는 “스탠드업 코미디가 특정 소재나 주제만으로 웃기는 것이 아니어서 미국에선 9·11 테러를 소재로 코미디를 해도 받아들여질 정도인데, 한국은 정서가 달라 처음에는 여기에 맞춰 적응해야 했다”며 “골목마다 코미디 클럽이 있어 쉽게 접할 수 있는 미국처럼 정착되려면 20~30년은 더 걸릴 거라 보지만 코미디언들의 경험이 쌓이는 만큼 노력의 결과도 나타나리라 본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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