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민의 아웃룩] 케네디와 포드도 '아메리카 퍼스트'였다

이철민 선임기자 2019. 11. 6. 03:1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940년 '유럽 전쟁' 개입 않겠다며 '아메리카 퍼스트 위원회' 결성
오바마는 '뒤에서 리드한다', 트럼프는 '뒤에서 빠지겠다' 차이뿐
자유·민주 가치 공유 없는 미국 일방주의, 중국보다 매력 있지 않아
이철민 선임기자

습관적인 사실 왜곡에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발언엔 종종 수긍할 만한 대목도 있는 게 사실이다. 그는 영국·독일·프랑스 등이 시리아에서 미군에 붙잡힌 자국 출신 이슬람 테러 조직 IS 대원 2000여 명의 본국 송환에 난색을 표하자 "쿠바 관타나모 미군 수용소에 50년간 감금하고 수십억달러를 쓰라고? 노! 당신네 국경에 떨어뜨릴 테니까, 다시 잡아들이는 즐거움을 누리라"고 조롱했다.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테러 집단에 대해서도 "우리가 7000마일 떨어진 그들과 싸우는 동안 바로 이웃인 인도와 파키스탄은 거의 아무것도 안 했다"고 비판했다. 미국에만 부담을 지우는 국제 질서 유지에선 발을 빼겠다는 것이다.

사실 해외 분쟁에 절대로 휩쓸리지 말라는 것은 미국을 세운 국부(國父)들의 유지(遺志)이기도 했다. 조지 워싱턴은 고별사에서 "우리의 진정한 정책은 세계 어느 곳과도 영구적 동맹을 맺지 않는 것"이라고 했고, 존 퀸시 애덤스 6대 대통령은 "해외 괴물을 부수러 나간다면 미국은 세계의 독재국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100년 전 당시 태동한 국제연맹 가입을 놓고도 미국 사회는 크게 분열됐다. 고립주의자들은 "무질서한 세계에서 미국은 발을 빼야 하며 일본·중국·인도인 노동력으로부터 미국을 지키자"고 주장했다. 국제주의자들은 "고립주의 시대는 지나갔는데도 미국이 외부와 절연(絶緣)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망상"이라며 "과수원의 과실(果實)을 지키려면 동맹을 통해 울타리를 크게 쳐야 한다"고 맞섰다. 트럼프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아메리카 퍼스트'란 표현도 이 두 대전(大戰) 사이에 나왔다.

소련이 헝가리혁명·프라하의 봄·폴란드 자유 노조 짓밟아도 미국 개입 안 해

유럽이 2차 대전에 휩싸인 1940년 '유럽의 전쟁'에 끼어들어선 안 된다는 전국 조직인 '아메리카 퍼스트 위원회'가 결성됐다. 이 위원회 멤버에는 뒤에 대통령이 된 존 F 케네디(민주)와 제럴드 포드(공화)도 있었다. 이 조직은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자 해체됐다.

이후 역대 미 행정부는 글로벌 전쟁의 참화를 막고 해외 위협으로부터 미국인의 삶을 지키기 위해 군국주의 독일과 일본의 재부상을 막고 중동의 석유를 지키는 국제 질서 구축에 나섰다. 미국의 역사학자인 로버트 케이건은 "미국은 어떻게 하면 글로벌 전쟁을 막을 것이냐는 냉정한 자기 이익에서 행동했고, 이렇게 구축한 질서는 미국에 100배의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냉전 시절 미국은 소련이 헝가리 혁명(1956년)과 프라하의 봄(1968년), 폴란드의 자유노조 운동(1980년)을 짓밟아도 개입하지 않았다. 이 나라들은 미국인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소련 영향권에 속한 나라들이었다.

'미국인의 삶 보호'라는 해외 개입의 원칙이 깨진 것은 1991년 냉전(冷戰)이 끝나 미국 중심의 단극(單極) 체제가 되고 아들 부시 대통령 때 9·11 테러로 '테러와의 전쟁'에 돌입하면서였다. '미국 예외주의(exceptionalism)'라는 사명감에 젖은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들이 미국의 뜻대로 전 세계를 바꾸기 위해 급격히 군사력 사용을 확대했다. 동시에 미 유권자들의 해외 개입 피로감도 높아갔다. "뒤에서 리드한다(leading from behind)"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독트린은 이 맥락에서 나왔다. 그는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이 화학무기로 수많은 자국민을 살해했을 때에도 크루즈 미사일 한 방 쏘지 않았다. 미 대선이 있었던 2016년 5월 퓨리서치 여론조사에선 지지 정당에 상관없이 미국 유권자들의 70%가 미국의 해외 개입 축소를 원했다. 트럼프의 승리는 이런 분위기의 산물(産物)이었다. 작년 7월 트럼프는 "인구 60만명의 나토(NATO) 회원국인 몬테네그로가 러시아의 공격을 받았다고, 왜 (나토 조약에 따라) 우리 아들이 그 나라를 지키러 가야 하느냐"는 뉴스 앵커의 질문에 "나도 같은 생각"이라며 "그들이 러시아에 호전적이 되면 우리가 3차 대전에 뛰어들게 된다니"라고 맞장구를 쳤다. 미 애틀랜틱 몬슬리는 파리 기후협약 불참이든 이란 핵 합의 파기든, TPP 거부든 밑바탕엔 "젠장, 우리는 미국이잖아"란 생각이 담겼다고 분석했다. '미국은 그래도 된다'는 예외주의의 또 다른 표현이다.

"세계는 엉망이어도 미국은 안전할 수 있다"는 환상

오랜 동맹국과도 철저히 득실(得失)을 따져 거래하고 일방적으로 '뒤에서 빠지겠다(leaving from behind)'는 지금의 미 외교 노선은 트럼프 이후에도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미국인들의 정서를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엔 몇 가지 치명적 오류가 있다. 뉴욕의 외교협의회(CFR) 회장인 리처드 하스는 "현재 미국 국방비는 외교, 정보수집, 핵무기 유지비를 포함해 8000억달러이지만, GDP 대비 비중은 냉전 때(근 10%)에 훨씬 못 미치는 3~4%이며, 이를 통해 막은 실현되지 않은 재앙은 측정할 수도 없다"고 밝혔다. 또 사이버 공격이나 교묘한 선거 개입, 지구온난화 등의 문제엔 거리나 국경이 없다.

미국 외교 노선이 좀 더 현실적이 되더라도, 그 근본이 '일방적' '동맹국 착취'라면 나라들의 산법(算法)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공해인 남중국해를 제멋대로 군사화하고는 "중국은 큰 나라이고, 당신들은 작은 나라"(2010년 양제츠 당시 중국 외교부장)라는 중국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치가 공유되지 않는 세계에서 미국은 중국보다 더 매력적이지도 않다. "세계는 엉망이어도, 미국은 안전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이다. 케이건은 "자유주의 세계 질서는 관리하지 않으면 잡초와 덩굴이 압도해 버리는 정원과 같다"고 했다. 2차 대전은 프랑스와 영국에서 "왜 그걸 지키려고 죽겠느냐"고 했던, 자치도시 단치히(그단스크)에 대한 독일의 함포 사격에서 시작했다.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