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놈과 외로운 놈, 그 사이 오정세

2019. 10. 24.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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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짜' 달린 직업이라더니, 알고 보니 안경사. 소리만 냅다 지르면 다 되는 줄 아는 남자. 남들의 인정이 너무도 고픈, 아내에 대한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남자.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에는 '노규태'라는 남자가 있다. 한 번쯤은 만나봤던 찌질한 남자의 집약체. 모자라서 가여운 이 남자를 대체 어찌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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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 벗어볼 수 있을…까요?” 질문은 조심스러웠으나, 당사자는 흔쾌했다. 아니, 실은 더 적극적이었다. “그럼 다리 털을 밀어볼까요? 여기서는 털이 없는 게 어울릴 것 같은데.” 헤어스타일을 의논할 때도 그는 조용히 듣다가 가만히 휴대폰에 저장해 온 사진 몇 장을 내밀었다. “이런 머리는 어떨까요?”라면서.

보기만 해도 감탄이 나오는 외모가 아님에는 분명한 그는 보기만 해도 감탄이 나오는 배우보다 스태프들을 여러 번 감동시켰다. 카메라 앞에서 거리낄 것이 없는 이 남자는 그날의 주인공이되,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어떤 건지 제대로 아는 스태프 중 하나였다. 이 남자와는 뭐든 더 시도해보고 싶은 재미가 있었다. 이름 석 자는 낯설지언정 지난 20여 년간 어디에선가는 꼭 한 번쯤 만났을 배우, 오정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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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 남자가 심상치 않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이하 <동백꽃>) 때문이다. 드라마 소개말부터 보자. “편견에 갇힌 맹수 동백을 깨우는, 촌므파탈 황용식이의 폭격형 로맨스”, “생활밀착형 치정 로맨스”, “로맨스(4) 휴먼(4) 스릴러(2)는 거들 뿐인 4:4:2 전술드라마”…. 소개 멘트부터 미친 듯한 이 드라마에는 또 한 명의 ‘미친’ 캐릭터가 나온다.

변호사 아내를 두고, 우리는 ‘사짜’ 부부라고 말하는 안경사. 옹산에 건물 여럿 가진 유지이자, 온갖 대소사 쫓아 다니는 (혼자만) 차기 군수. 자신의 건물에 세 들어온 비혼모 동백(공효진)에게 반하지만, 그녀의 마음도 잃고 땅콩도 잃고, 상처만 남은 남자 (오죽하면 ‘노키드존’ 아니고 ‘No규태존’이 생겼을까?), “나 오빠 존경하는데?” 한마디에 홀딱 다른 여자에게 가고, 고소했다 고소 당하고 “아임 쏘리!” 외치는 사고뭉치.

“드라마 첫인상이오? ‘작.가.님.미.친.사.람.’(하하) 오랜만에 너무 재미있는 책(대본)이었어요. 매번 대본 나올 때마다 절 포함한 다른 스태프들까지 ‘일을 해야지’ 하는 게 아니라 너무 재미있어서 ‘빨리 보고 싶어’ 하는 느낌이 현장에 가득 차 있어요. 정말 재미있게 촬영하고 있고. 사실 규태라는 인물만 떼어놓고 보면 자칫 위험할 수 있는 상황도 많고, 나쁜 인물로 비칠 수 있거든요. 안 좋은 시각으로 보면 한없이 나쁜 캐릭터일 수 있는데….”

드라마에서 동백을 향한 노규태의 애정 표현은 성추행의 경계를 가뿐히 넘나든다. “‘바람을 피웠다, 안 피웠다’고 하지, ‘바람을 많이 피웠다, 적게 피웠다’라고 말하지 않잖아?”라는 대사처럼 아내를 두고 어쨌든 바람을 피운다. 자기 마음 몰라준다고 가게를 빼라 마라, 갑질도 한다. 나쁜 놈과 못난 놈, 그 사이 어디쯤의 노규태는 오정세를 통해 미워할 수만은 없는 남자로 다시 태어난다.

“저는 규태라는 인물을 ‘외.로.움’ 세 글자로 시작했어요. 규태가 A라는 사람이 좋아서 사랑에 빠졌다가, 또 B라는 사람이 좋아서 사랑에 빠지는 게 아니라, 외롭기 때문에 사람이건 물건이건 동물이건 마음을 훅훅 주는 친구이지 않을까? 물론 그렇다고 그 행동들이 다 타당하고 괜찮은 게 아니라 혼나야 마땅한 행동이지만. ‘얘는 왜 그럴까’를 생각하는 시작점이 저한테는 외로움이라는 단어였던 것 같아요.”

오정세에게는 그만의 ‘동백꽃 OST’가 있다. 규태의 테마곡, 동백과 용식이의 테마곡도 있다. 감독에게 오정세가 직접 요청한 규태의 책 리스트도 있다. 이를테면 <홀로서기> <외로움은 나의 친구> 같은 류의 책들이 규태의 책장에 꽂혀 있으면 좋겠다고 먼저 제안했다. 책 제목이 화면에 노출되지 않더라도, 이런 아이디어들이 규태를 연기하는 원동력이자 시작점이 됐다.

“이 작품은 욕심이 너무 많이 나서 제가 할 수 있는 것들, 생각나는 것들은 다 시도해보고 싶었어요. 그러면서도 제일 고민됐던 게 대본이 너무 재미있다 보니. 그대로 연기하면 내가 과연 제대로 구현하고 있는 걸까, 의심이 들고. 좀 더 살을 붙여볼까, 이렇게 더해볼까 하면 이 시나리오가 훼손되는 것 같고. 그 사이에서 답을 찾기가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럼 난 뭘 해야 할까?’ 고민하다 보니 인물의 저 밑부터 단단하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죠. 디테일을 더 많이 신경 쓰려고 했어요. 다 보여지지 않더라도 그런 정서들이 쌓이면 인물을 더 잘 만들어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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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배우의 결과물만을 본다. 메소드니 생활 연기니 하는 평가가 존재하듯 배우마다 작품에 임하는 태도는 다 다를 테고, 작품 따라 몰입도도 다를 거다. 그 안에서 어떤 노력을 했는지 우리는 짐작으로만 알 뿐이다. 배역이 크든 작든 끊임없이 작품을 해온 오정세는 이상하리만큼 배우라는 일에 지친 적이 없다. 애매하든 이상하든 새로운 시도는 뭐든 재미있어 하는 쪽. 본인이 지치는 건 오케이, 다만 보는 사람이 식상할까 봐 안테나를 세우는 편이다.

“배우로서 이런 경험, 저런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게 저한테는 피로감보다는 에너지의 원천이 돼요. 제 생각과는 다른 이상한 작품이 나와서 숨고 싶을지언정 배우로서 길게 보면 그런 경험이나 작품들이 저한테는 살이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죠. 나이 들수록 겁이 나는 지점도 분명히 있어요. 겁도 나고 주저주저하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발을 담그는 것 같아요. ‘어? 저거 나 못하는 건데? 망치면 어떡하지? 어라? 벌써 들어왔네?’ 이런 느낌(웃음).”

애드리브 5조5억 개, 애드리브 장인. 오정세에게 붙는 수식어다. 그와의 첫 번째 인터뷰 때도 그랬다. 대략적인 상황만 주어진 콘티 안에서 그는 개그맨 시험이라도 보듯 매 장면 기발한 애드리브를 말 그대로 ‘때려 박아’ 대폭소 인터뷰 영상을 만들었다. 그저 타고난 끼인 줄만 알았다면 오산이다. 오정세는 화보 콘셉트의 한 줄 한 줄, 인터뷰 상황 하나하나를 꼼꼼히 공부해 자신만의 대본을 만들어 오는 사람이다.

“요즘 현장에서 보면 카메라를 무서워하지 않는 젊은 친구들이 있어요. 저는 기본적으로 현장의 기에 지는데, 젊은 친구들 중에 정말 부러울 정도로 안 불편해하는 친구들이 있거든요. 전 아직도 무서워요. 그렇기 때문에 뭘 많이 준비하는 것 같아요. 많이 고민하고 생각해야 그나마 현장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의 발판이 되니까. 오늘도 그래요. ‘최대한 안 못해야지, 잘해야지’ 하는 마음이 분명히 있죠. 근데 아무리 해도 결국 못했어, 쥐구멍에 숨고 싶어. 그럴 때 이제 받아들일 마음이 된 거예요. ‘열심히 했는데도 병신이 됐네? 그래 저 병신도 내 모습이지’ 이렇게요. 하하.”

배우 말고 인간 오정세의 일상은 꽤나 단출하다. 술도 즐기지 않고, 취미도 딱히 없다. 사람이나 상황을 관찰하는 걸 좋아하고, 좋은 색깔이나 음악, 단어 같은 걸 저장해두려고 한다. 특정 배우가 부럽지는 않아도 문득 부러워지는 가수는 있다. 잘 다듬어지지 않았는데도 들으면 무엇인가 가슴을 ‘쿵’ 하고 치는 사람. 그럴 때 ‘나도 저런 배우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타의로 배우를 못 하게 된다? 글쎄요. 그것도 제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하하. 남들이 안 써줘도 전 배우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상업이 됐든 독립이 됐든, 스크린이든 아니든, 배우로서 어딘가에서는 계속 연기를 하고 있을 거예요. 딱 지금처럼.”

10월 초 어느 공휴일. 선명한 핑크빛 석양이 하늘을 물들이는 가을날에 오정세를 만났다. 그는 인터뷰가 끝난 뒤, 그가 말했던 규태의 테마곡을 들려줬다. 정우의 ‘외로움’이라는 곡. 이날 인터뷰 녹취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나고 있었다.

“여기에요 여기, 이곳에 있어요. 이렇게 매일 혼자 있지요. (중략) 가장 어린 아이예요. 제일 여린 아이구요. 아주 작은 아이예요. 나는 네 외로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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