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와 성찰]사법개혁을 낙관하지만, 우려도 깊어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기획위원장 2019. 10. 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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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막연히 짐작은 했지만 그 심각함을 절감하지는 못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개인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벅차서 삶이 파괴되기까지 한 사례들이 무수히 많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문제에 대해 그리 길게 그리고 깊게 사유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조국 일가가 연루되었을지 모를 죄를 추궁하기 위해 최정예 검사를 수십 명 출동시킨 검찰의 매우 적극적인 행보는, 다른 권력형 범죄들, 특히 고위급의 전·현직 검찰이 관여된 치명적 사건들에 대해 매우 소극적이었던 것과는 너무나 판이한 모습처럼 보였다. 이에 많은 사람들은 사법권력이 얼마나 균형 없이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실감한 것이다.

그렇게 조국 국면은 확전되었다. 온라인 공간에서 산개된 양상으로 전개된 대중의 싸움은 오프라인 광장의 정치로 이어졌다. 이제 싸움은 집결지로 모여든 인파의 숫자가 중요해졌다.

사법개혁을 부르짖는 촛불대중이 2016~2017년 박근혜 정권을 몰락시킨 촛불대중의 규모에 버금갔다는 점은 조국 반대 세력에는 심각한 위기로 각인된 모양이다. 하여 이른바 ‘반조국연대’는 사력을 다해 반대시위대의 규모를 키웠다. 그 결과 3일 광화문집회는 초대형 규모가 되었다. 이젠 사법개혁을 외치는 시위가 더 크게 벌어질 차례다. 그러면 반대시위도 더 규모에 집착할 것이다. 선출직이 아닌 직위에 한 사람을 임명하는 일이 마치 선거처럼 숫자 게임으로 전환되었다. 주장의 내용이나 과정보다 숫자의 크기가 더 중요해지는 국면이 된 것이다.

그런데 한동안 서로 총력전을 벌일 것으로 추정되는 광장의 숫자 게임은 사법개혁 진영에 더 유리하다. 무엇보다도 거리시위를 계속해온 전광훈과 한기총 등 반개혁세력의 피로감이 너무 크고, 광장정치의 비용이 이미 큰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한기총이 주도한 이단시비의 대상이었던 신사도운동 계열의 변승우 목사를 한기총 공동회장으로 영입한 것은, 그의 극우적 이념성향도 참작되었겠지만, 재정 충원 문제가 더욱 중요하게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거리집회의 비용을 앞으로도 무기한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대다수의 교회가 나서지 않는다는 점은 반개혁진영에 매우 심각한 문제다. 그것은 적지 않은 개신교 신자들이, 그들 대다수는 보수적임에도, 장외정치에 몰두하고 있는 제1야당이나 극우세력에 동조하기를 망설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반조국연대에 적극적인 신자가 적지 않겠지만 개혁에 찬성하는 이들 또한 적지 않다. 그리고 훨씬 다수는 교회 내에서 그런 일로 갈등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이들이다. 이런 사정은 그동안 정치적 발언을 남발해왔던 많은 목사들이 침묵하게 하는 내적 강제로 작용한 듯하다. 실제로 최근 설교들을 검색해보면 전 사회적 화두인 ‘조국 논쟁’이 별로 거론되지 않았다.

조국 일가에 대한 검찰의 혐의는 아마도 장기간의 법정 싸움으로 전개될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강력한 조직력을 통해 든든한 지원세력이 되어왔던 교회가 극우적 혹은 수구적 권력집단에 그리 유효한 지원세력이 아니며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장기간 계속될 것으로 보이는 광장의 숫자 게임이 반조국연대로 결집한 반개혁 진영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개혁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보다는 진일보한 사법에 대한 제도개혁이 실행될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높다.

한데 이러한 낙관적 전망에도 불구하고, 나는 걱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1987년의 뜨겁던 민주항쟁은 민주주의의 진전을 가져왔음이 분명하지만, 동시에 검찰과 언론이 권력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모든 자원을 독점했던 1인의 독재자를 제거한 대신 N명의 독재자가 탄생했다. ‘1987년 체제’에 대한 나의 부정적 회상에 의하면 말이다. 이때 다수의 시민은 그 독재자들의 적극적 공모자였다. 그 결과는 공적인 것의 유실로 나타났다. 나는 그것을 ‘수상한 시민의 탄생’이라고 말한 바 있다. 공적인 것에 대한 성찰이 결여된 자신의 욕구에 몰두하는 시민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국 사태를 보면서 실망한 사람들 중 일부는 조국뿐 아니라 자신도 그 수상한 시민에 다름 아니었다는 성찰적 자각에 이르게 되었다.

한데 최근 전 사회적으로 확전된 갈등 지형에서, 조국반대 진영은 말할 것도 없고, 사법개혁 진영에서도 이런 성찰의 소리가, 그리고 내적인 토론이나 논쟁의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하여 2019년의 사법개혁의 목소리에 동조하면서도, 우려의 잔소리를 댓글처럼 달아 본다.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기획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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