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만 흥행 '엑시트' 고두심 "국민엄마 말고도 내안에 불꽃 있죠"
47년 연기인생 최고 흥행 거둬
'최고다 이순신' 조정석 믿고 출연
방송3사 연기대상 석권 유일해
그가 맡은 현옥은 가스 테러가 있던 날 가족과 자신의 칠순 잔치에 갔다가 아들 용남 덕에 목숨을 구하는 엄마다. 기죽어 살던 아들의 용감한 활약이 놀랍고 대견하면서도 걱정이 앞서는 모성 연기로, 짧은 출연만으로도 극의 감정선을 단단하게 잡아준다. 2년 전 지적장애아들을 둔 노모로 분한 영화 ‘채비’까지, TV‧스크린을 오가며 100편 가까운 출연작 중 절반 이상 엄마 역으로 살아온 내공을 발휘했다. 그를 지난 27일 서울 강남 카페에서 만났다.
“제가 평화주의자라 뭐든 따뜻한 작품을 해왔는데, 착한 영화는 (흥행이) 잘 안 되잖아요. 이런 흥행은 전혀 예상 못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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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석씨 한다기에 믿었죠
Q : 영화는 어떻게 봤나.
A : “VIP 시사 때 봤는데 긴장이 돼서 몸이 막 앞으로 나왔다. 감동도 있고, 온 가족이 보기에 이만한 영화가 없다. 이상근 감독이 이 첫 장편을 8년에 걸쳐 준비했다잖나. 그게 난 가슴이 아프다. 배우도 안 풀릴 땐 극단적인 생각이 드는데 감독도 쉬운 일이 아니다. 현장에서도 밤새 고민하고 불쌍할 정도로 절어있더니, 영화를 쫀쫀하게 잘 만들었다.”
Q : 전작 ‘채비’나,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 등 신인감독 영화에 자주 출연했는데.
A : “나도 좀 얹혀서 가고 싶은데 아유, 항상 그렇게 된다. ‘엑시트’는 일단 시나리오가 편하게 읽혔다.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없더라. 그리고 이 감독이 얼굴에 ‘성실’이라고 쓰여 있다. 웃으면 얼굴이 빨개지는 게 거짓말은 못할 것 같았다. 정석씨가 한다기에 믿는 구석도 있었다.”(웃음)
A : “스스럼없는 사이여서 편하게 했다. 옛날에 드라마(‘최고다 이순신’)에서 사위로 나왔는데 작품에 진지하게 임하는 자세가 좋아서 쭉 관심 갖고 지켜봐왔다. 늘 한결같고 현장을 부드럽게 만든다. 남매로 나온 (김)지영이랑투닥거리는 장면도 기가 막히게 재밌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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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벌 한복 촬영 버틴 힘은...
각별한 사람들을 말할 때 그는 ‘진지’와 ‘성실’이란 표현을 자주 썼다. 이번 영화에선 가족으로 나온 배우들이 대부분 그랬다. 드라마에서 여러 번 만난 남편 역의 박인환은 “연극을 오래 하셔서 호흡이 편하다. 저보다 커서 카메라 잡힐 때 밸런스도 좋다”고 했다. 드라마 ‘전원일기’부터 오랜 사이인 큰딸 역 김지영은 말할 것도 없다. 고된 촬영을 버텨낸 것도 이런 인연의 힘이었다.
Q : 칠순 잔치를 위해 입은 단벌 한복에 올림머리를 한 채 대부분 장면을 촬영했는데.
A : “한복 입으면 가슴이 조금 조여서 뛸 때 불편하긴 했다. 촬영하다 점점 날씨가 추워져서 속에 겨울옷을 껴입기도 했다. 근데 다 괜찮았다. 머리는 근 40년 다 되게 같이하던 고숙자 선생님이 계셨는데 이번 영화 다 해주시고 촬영 끝나곤 돌아가셨다. 여든 바라보셨는데, 몸이 좀 아프셔서.”
그를 ‘국민엄마’로 만들어준 건 ‘전원일기’다. 1980년부터 22년간 방영한 이 장수 드라마에서 그는 양촌리 이장집 맏며느리를 연기했다. 대가족을 건사하던 헌신적인 어머니였다. 이번엔 청년실업세대 아들을 둔 현실 엄마다.
'전원일기' 무게 여전히 느끼죠
Q : 어머니 역할에도 시대 변화를 느낄까.
A : “어느 시대든 헌신하는 어머니들은 있다. 내가 고루하다. 어머니 세대의 생각을 많이 갖고 산다. ‘전원일기’ 영향도 있지. 어떨 땐 그 작품의 무게 때문에 확 뛰지 못하는 게 있다. 그런 모습도 다 ‘고두심’이다.”
데뷔 초에 이런 영화를 만났다면 윤아 같은 액션도 거뜬했을 거라는 그다. 1970년대 MBC 예능 ‘명랑운동회’ 일화를 꺼냈다. “제가 지면 못 살아요. 그 방송에서 ‘전원일기’ 팀이랑 현대그룹이 배구 경기를 했는데 이겨보려고 응원할 때 너무 소리를 질러서 정주영 할아버지가 놀라셨어요. 저 처자가 (‘전원일기’) 김 회장댁 맏며느리 맞느냐고요.(웃음)”
무역회사 급사로 살다 배우 도전
제주도에서 고전무용을 하다 1972년 MBC 5기 공채 탤런트로 연기를 시작한 그는 지상파 방송 3사 연기대상을 모두 수상한 유일한 배우기도 하다.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대상을 포함하면 일곱 번이나 수상했다. “잘났어 정말”이란 유행어를 낳았던 ‘사랑의 굴레’는 1989년 KBS, 30대에 백발의 가야금 명인을 연기한 ‘춤추는 가얏고’로는 1990년 MBC 연기대상을 받았다. 백상은 1993년 ‘아들과 딸’, SBS에선 2000년 ‘덕이’로 수상했다. 2004년엔 KBS의 ‘꽃보다 아름다워’, MBC ‘한강수 타령’으로 각 방송사 대상 2관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4년 전 ‘부탁해요 엄마’로 세 번째 KBS 연기대상을 안았다.
그는 “‘춤추는 가얏고’ 때도 당장, 내일 할머니가 돼도 좋으니까 오늘 꼭 할머니를 표현해야겠다, 그랬다. 그런 열정적인 작품이 더러 있었다”고 했다. “공부도 1등은 못 해봤지만, 운동장 단상에서 장학금 받는 애들이 늘 부러웠다. 난 못 받아봤으니 주는 사람이라도 되자, 하면서 (모교 제주여중‧고교에) 두심장학회를 열었다”면서 “그런 불씨가 내 안에 있다”고 말했다.
47년 연기인생 아쉬움은...
Q : 지금껏 연기해오며 아쉬움이 있다면.
A : “젊을 때 영화를 많이 못 했다. 요즘 후배들처럼 날씬하고 길게 생겼으면 더 많이 했을 텐데 그런 시기를 놓쳤다. 박원숙 언니가 영화 찍던 시절이 짧지만 있었다. 남해에 언니 집 가보니까 그때 사진들이 좋은 게 많더라. 배우 같은 느낌으로. 영화배우는 ‘배우’ 같은데, 탤런트는 좀 넘나드는 느낌이라 해야 하나, 그렇잖나.”
자신을 비워야 남을 울릴 수 있다
“우리가 이제 정리할 나이잖아요. 잘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라 쌓인 것들을 조금씩 정리해야겠다고 계속 마음먹고 있어요. 최근엔 김창열 화백에게 받은 ‘물방울’ 그림을 조카한테 준댔더니 화단에서 난리가 났대요. 그 비싼 그림을 그냥 준다고. 근데 못 줄 게 뭐 있어요. 필요한 사람한테 주는 게 맞죠.”
Q : 이달 방영하는 새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선 공효진‧강하늘과 호흡을 맞춘다. 젊은 배우들과 작업이 많은데, 선배 연기자로서 남기고픈 얘기라면.
A : “진실하게 자기를 항상 다스려야 한다. 안 좋은 게 쌓이면 걸러내고, 좋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려 하라. 인기라는 게 정말 물거품 같다. 계속 오를 것 같지만 다 안개고, 구름이고, 바람이다. 겉멋만 들어서 날 좋아해주겠지? 삼천만의 말씀이다. 오래 사랑받고 싶으면 사랑받게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눈을 보면서 대사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잖나. 미움도 빨리빨리 풀어라, 그런다. 미우면 어떻게 눈을 보며 연기하겠나. 다가오지 않으면 먼저 다가가면 된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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