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된지 벌써 74년인데.. 아직도 親日·親美 타령인가"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2019. 8. 24.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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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김기철 학술전문기자의 막전막후]
마오주의자에서 뉴라이트 代父로..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

1971년 가을 서울대 경제학과 2학년생이던 이영훈·김문수는 교련 반대 시위를 쫓아다니다 제적당했다. 앞길 막막한 두 사람은 서울 돈암동에 살던 지도 교수를 찾아갔다. 따뜻한 조언을 기대했을 스무 살 제자에게 교수는 한술 더 떴다. "내가 자네들 나이였다면 교수가 아니라 노동운동을 하겠다." 학교에서 쫓겨난 것도 기막힌데 공장으로 내모는 스승이 야박했을 법하다.

제자 뺨치는 이 '열혈 운동권'이 안병직(83) 서울대 명예교수다. 1965년 서울대 전임교수가 된 그는 마오쩌둥 혁명론에 영향받은 '식민지 반(半)봉건사회론'을 내걸고 한국 자본주의의 몰락과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던 좌파 지식인이었다. 그러다 1980년대 중반 전향했다. 본인 표현으로 "연옥을 통과하는 고통을 겪었다"고 했다. 2000년대 보수의 혁신(革新)을 내건 '뉴라이트 운동' 대부(代父)로 활동했다. 최근 출간돼 논란을 빚은 '반일종족주의' 필자 대부분은 그의 사상적 세례를 받은 제자들이다.

'반일종족주의'는 일제하 강제 동원은 '허구'이고 '헌병과 경찰이 길거리 처녀를 납치하거나 빨래터 아낙네를 연행해 위안소로 끌어갔다는 통념은 거짓말'이라고 직설적으로 받아친다. 대한민국이 이웃을 적으로 모는 근거 없는 '반일(反日)종족주의' 때문에 위기에 처했다고 도발적으로 주장한다. 조국 법무장관 후보자는 '구역질 나는 책' '부역·매국 친일파'라며 공격했고, 필자들은 조 후보자를 모욕 혐의로 고소했다. 이런 논란 와중에 '반일종족주의'는 교보·예스24 등 대형 서점 베스트셀러 종합 순위 1위에 올랐다. 책을 읽은 지식인들의 찬반(贊反) 토론이 소셜미디어에 쏟아지고, 일반 독자들의 반응은 첨예하게 갈린다. "반일·반미에 신물 났는데 속 시원하다" 혹은 "역시 친일파다운 주장"이라며 호오(好惡)는 극단을 달린다.

이 극단의 호오 속에서 21일 안병직 교수를 만났다. 안 교수는 '반일종족주의' 대표 필자인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와 2007년 낸 대담집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에서 이번 책의 주요 이슈를 다룬 바 있다. 어쩌면 이 모든 논란의 '뿌리'이자 '배후 세력'인 셈이다. 근원부터 물었다.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말했다. ‘기적의 대한민국’을 만든 주역을 친일과 친미라는 잣대로 패대기칠 수 있냐고. 미국과 일본에서 기술·자본·제도를 들여와 이룩한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 동시에 그 나라는 자유와 인권을 지키는 민주국가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남조선 혁명'을 꿈꾸던 이론가

―스무 살 제자들에게 왜 노동운동을 권했나.

"당시 '조직운동'을 하고 있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0년 정도 했다. 목표는 '남조선혁명'이었다. 북한이나 외부 도움은 받지 않고 내부에서 체제 전복을 시도했다. 노동 현장을 비롯, 사회 각 분야에 진출한 엘리트 청년 40~50명을 지도했다."

―인혁당이나 남민전은 들었지만 그런 조직이 있는지는 몰랐다.

"제2차 인혁당에서 포섭하려 했다. 하지만 박현채(서울대 상대 2년 선배, '민족경제론'을 주창한 좌파 경제학자) 선배가 말렸다. 인혁당은 이미 수사기관에 드러난 조직인데, 거기에 들어가 잡혀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소속한 단체는 이름이나 강령을 정하지 않았고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일대일 점조직으로 움직였다. 수사기관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됐나.

"1980년 신군부 집권 당시에 발각됐다. 조직원들이 잡혀가 취조당했지만 두 명 정도만 사법 처리됐다. 내 이름도 당연히 나왔다. 하지만 끌려가 취조를 당한 적은 없다. 우린 이미 알고 있었다. 경찰에서 자백하더라도 재판 과정에서 부인하면 무죄로 풀려난다는 걸. 그 엄혹한 시기에도 개인의 기본권은 보장하는 게 자유민주주의국가였다. 공산주의 국가는 허위 자백까지 받아 처형해버리지 않나. 이런 게 몇 년 후 사상 전향을 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신군부가 집권한 5공 시절 부천서 성 고문 사건이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처럼 인권유린 사건이 잇달아 터졌다. 국가 안보를 내세워 개인의 자유와 기본권을 억압하던 권위주의 정권 시절이었다. 안 교수가 몸담은 조직은 어쩌면 운(運)이 좋았던 사례다.

―사상 전향 과정에서 연옥을 통과하는 고통을 겪었다고 했다.

“한국 자본주의가 1970년대 말 무너질 줄 알았다. 그런데 1980년대 무역 흑자를 내면서 승승장구했다. 내 시각이 잘못된 거였다. 1985년부터 2년간 일본 도쿄대에서 한국을 비롯해 대만, 싱가포르 등 신흥공업국 경제를 다시 들여다봤다. 후발 저개발국도 선진국이 몇 백 년에 걸쳐 축적한 기술과 제도, 자본을 들여와 고도성장을 이룩할 수 있다는 ‘중진(中進)자본주의’론에 도달했다.”

―그들 보기에는 변절자 아니었나.

“나 혼자 생각을 바꿀 일이 아니었다. 내가 가르치고 노동 현장으로 보낸 수많은 제자까지 책임져야 했다. 일일이 만나 설득했다. 우리가 그동안 잘못 생각한 것 같다고. 박현채 선배는 나를 비난하지 않았다. 하지만 민주화운동을 함께해오다 서먹서먹한 사이가 된 이도 많다. 노동운동을 하고 있던 김문수는 얘기를 듣더니 ‘선생님, 너무 변했습니다’라고 했다. 그도 소련 붕괴 후 껍질을 벗는 고통을 겪으며 제도권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후배 제자 30명쯤을 학계로 이끌었다.”

그는 2001년 정년까지는 서울대 민교협 초대·2대 회장을 맡으면서 소위 ‘민주화 진영’에 남아 있었다고 했다.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자신의 누이가 정신대에 반강제로 끌려간 아픈 역사가 있다. 아버지 징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 굴레에 묶여 있을 것인가. 결국 판단 기준은 국익이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친일파’ 욕먹으며 한국 경제성장사 연구

안 교수는 1987년 서울대 후문 근처에 낙성대경제연구소를 세워 후학들과 함께 한국 자본주의 발전을 실증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1700년부터 현재까지 인구, 경지 면적, 임금 등 기초 경제통계를 정리한 ‘한국의 장기통계’ ‘근대 조선공업화의 연구’ ‘한국경제성장사’ 등을 출간했다. 안 교수는 이런 연구를 토대로 19세기 후반 조선 경제는 몰락했고, 일제 식민지 시기 일본에서 유입된 제도·기술·자본으로 근대화가 이뤄졌으며 해방 후에도 이런 유산 위에 대한민국 경제성장이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일부에선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는 ‘낙성대학파’를 ‘식민지근대화론’이라 비판한다. 안 교수와 제자들을 ‘친일파’라고 욕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조선총독부가 1910년대 토지 조사 사업을 시행한 이유가 조선 농민의 땅을 수탈하기 위한 것이라고 배워왔다. 안 교수를 비롯한 경제사학계, 그리고 ‘반일종족주의’는 현행 국사 교과서가 허위를 가르쳐왔다고 비판한다.

“토지 수탈은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이다. 토지 조사 이후 왕실 소유지와 황무지, 산림이 총독부로 귀속된 것은 당연하다. 당시는 총독부가 국가였으니까. 하지만 경남 김해처럼 일제강점기 토지 조사 관계 자료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을 보면, 민유지가 국유지로 수탈된 것은 단 1건도 없다. 농민들은 땅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겼고, 총독부도 무리하게 땅을 빼앗으면 식민지 통치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총독부가 토지 조사 사업을 한 이유는 효율적인 식민 지배를 위해 세원(稅源) 확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근대적 토지소유권제도가 확립됐고, 지세(地稅) 징수가 이뤄졌다. 1910년대 지세율(地稅率)은 토지 가격의 1.3%로 연간 토지생산액의 5% 미만이었다. 대만의 2분의 1, 일본의 5분의 1 수준이다. 식민지 조선의 기본 세원은 지세와 관세(關稅)뿐이었다. 이 때문에 총독부 재정은 만성 적자였다. 그 적자를 메워준 것이 일본 정부 보충금(補充金)이다. 이 보충금은 일제 말기까지 계속됐다.”

‘반일종족주의’는 강제 동원이 ‘허구’라고 한다. 대부분 자발적 취업이고, 임금도 높았다는 주장이다. 임금은 거의 못 받고,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는 피해자 증언과 다르다. 이런 노무동원을 조선 청년의 ‘로망’이라고 말하는 건 지나친 미화 아닌가.

“징용 이전의 노무동원은 회사의 모집(1939년 9월), 총독부의 관(官) 알선(1942년 2월) 등 기본적으로 자발적 지원이다. 우리 집의 경우, 누님이 정신대에 지원하지 않으면 아버지를 징용하겠다고 협박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정신대에 지원했다(정신대는 노무동원으로 위안부와는 구별된다). 정신대는 사실상 강제하는 경우가 많았다. 동원된 노무자들은 임금을 받았다. 일본은 메이지 이후 부역노동 관행이 없어졌기 때문에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 노무동원은 있을 수 없었다. 임금 수준도 태평양전쟁 때는 노동력이 모자랐기 때문에 상당히 높았다. 국제 노동 이동은 세계사적으로 중간착취가 가장 큰 문제인데 관 알선 및 징용은 중간 브로커가 임금을 착취할 여지가 거의 없었다. 관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동원된 노동자 중에는 도망하는 경우가 아주 많았다. 농사만 짓던 조선인들이 탄광이나 공장의 노동 강도를 견디기 어려웠던 측면도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단지 일본으로 가기 위해 동원에 응한 경우가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 대법원의 미쓰비시 징용 배상 판결은 어떻게 보나.

“국제조약이나 협약을 지키지 않으면 국제사회에서 따돌림당한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정리된 문제에 법원이 독단적으로 개입한 데서 문제가 시작됐다. 전임 양승태 대법원장은 이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대법원 판결에 관여했는데, 현 대법원장이 사법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만용을 부렸다.”

헌병과 경찰이 길거리의 처녀를 납치하거나 빨래터 아낙네를 연행해 위안소로 끌어갔다는 통념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했다. 하지만 강제로 끌려갔다고 증언한 위안부 피해자가 많다. 이 증언을 일방적으로 부정할 수 있나.

“피해자들이 헌병이나 경찰에 의해 끌려갔다고 주장하는 건 이해할 만하다. 일본군 위안소는 기본적으로는 풍속산업의 일종이다. 풍속산업에선 납치, 폭행 및 강간 등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일본군이 조선총독부 및 조선군사령부와 협조해 위안부를 동원한 건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헌병·경찰이 위안부를 강제로 끌고 갔다는 자료는 지금까지 나온 적 없다. 총독부와 조선군 지원 아래 위안소를 운영할 민간 업자들을 모집하고 업자들이 위안부들을 모집했다. 모집의 기본 수단은 ‘전차금(前借金·선금)’이었다. 인신매매(人身賣買)다. 인신매매를 통해 위안부를 동원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이런 ‘불편한’ 얘기는 당연히 우리의 얼굴을 찌푸리게 만든다. ‘평화의 소녀상’이 들어선 이후 위안부 피해자라고 하면 ‘어린 소녀’를 떠올리게 된 최근엔 더 그렇다.

친일·친미의 판단 기준은 國益

안 교수와 인터뷰하는 동안 자연스레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관제(官製)민족주의’ 비판이 떠올랐다. 최 교수는 지난 3월 한국국제정치학회 학술회의에서 “일제 식민 지배 역사 청산은 사실적이지도, 가능한 일도 아니다”라고 했다. 대한민국은 식민지 시대서 물려받은 인적(人的), 제도적 유산으로 이룩한 나라라며 “식민 잔재를 청산한다는 말은 한국의 국가와 사회 몸체를 청산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했다. 최 교수는 “정부가 일제 식민 잔재 청산을 말하거나 행동한다면 ‘위선’”이라며 “가능하지 않은 것을 옳다고 말하고, 그것을 위해 행동하려 하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목적을 위한 기획일 뿐”이라고 했다. 최 교수도 ‘친일파’인 것일까.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3·1절 기념사에서 “친일 잔재 청산은 너무 오래된 숙제”라며 다시 과거사 청산을 들고나왔다.

“해방된 지 74년이 지났는데, 무슨 잔재가 남아 있다고 아직까지 친일 청산을 얘기하나. 대한민국은 1950년대 이승만 대통령이 주도한 한·미 동맹 아래 미국의 원조와 지원을 통해 기틀을 닦고 박정희 대통령은 1960년대 한일협정을 통해 일본의 기술과 자본을 들여와 세계사에 유례없는 고도성장을 이룩했다. 친미(親美)와 친일(親日)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힘이다. 대한민국 국익(國益)을 기준으로 판단해야지 ‘친일파’ ‘친미파’로 낙인찍는 선동은 그만하자.”

보수의 반성을 내건 뉴라이트 운동은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사실상 소멸됐다.

“아쉽다. 그래서 새로운 사상운동의 중요성을 더 느낀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도 민족주의와 포퓰리즘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자유주의 시각에서 한·미 동맹 토대 아래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를 지켜나갈 시민운동이 필요하다.”

여든셋 노(老)학자 안병직은 여전히 혈기 충만했다.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을 주장한 이론가이자 ‘혁명가’로 살았던 30~40대와 중진 자본주의로의 사상적 전환, 그리고 ‘뉴라이트’ 대부로 활동한 70대부터 현재까지 바뀐 건 별로 없었다. 그는 몇 년 전 산에 오르다 넘어져 오른쪽 고관절 골절로 수술받고 골수암 치료까지 받았다. 지금은 왼쪽 손을 지팡이에 의지한 채 오른쪽 다리를 내딛는다. 그는 말했다. “‘기적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미국·일본의 역할을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 선진국들이 오랫동안 쌓아온 기술과 자본, 제도를 들여와 불과 수십 년 만에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우린 ‘친일 청산’ ‘반미(反美)’ 타령이나 하고 있다. 이젠 대한민국을 위한 친일, 친미를 당당하게 이야기할 때 아닌가.” 그는 ‘친일파’로 불리는 것쯤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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