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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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일본 정부가 대표적인 혐한(嫌韓)언론인 산케이신문을 통해 한국 기업들이 이란, 시리아 등 친북한 국가들에게 전략물자를 부정 수출했다는 입장을 내비쳤습니다. 전날 산케이신문 계열 온라인 매체인 FNN프라임과 후지TV는 올 5월 조원진 대한애국당 의원이 산업통상자원부로부터 제출받은 ‘전략물자 무허가 수출 적발 현황’을 인용해 2015년부터 올해 3월까지 한국 정부의 승인 없이 한국 업체가 생산해 불법 수출했다 적발된 전략물자가 156건에 이른다고 보도했습니다.

이 같은 선제적 의혹 제기에 이어 산케이는 일본 정부관계자 취재 결과, 문건 내용과 같은 사실이 확인됐다며 별다른 새로운 사실이 없음에도 1면 톱기사로 이 문제를 대대적으로 다뤘습니다. 생물·화학 무기 등 대량살상 무기제조에 전용 가능한 물자를 시리아와 이란, 파키스탄 등 북한 우방국에 부정수출한 여러 한국기업을 한국 정부가 행정처분한 이력이 있다는 점을 부각했습니다. 파키스탄과 이란, 시리아에 생화학 무기 관련 물자를 불법으로 수출하는 행위는 전략물자 관리에 관한 4대 통제체제 중 하나인 ‘호주 그룹’에서 철저히 경계하는 사항 중 하나라며 마치 한국이 북한과 음흉한 뒷거래를 한 것을 기정사실화하는 듯한 분위기입니다.

주목되는 것은 지난달 30일 산케이를 통해 불화수소 등 3대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의 한국 수출 규제로 경제보복을 하겠다는 방침을 흘렸던 일본 정부가 최근 들어 또다시 산케이 계열사들을 통해 안보문제와 관련한 확인되지 않는 설을 흘리며 경제보복 조치를 정당화하고 나서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본 정부의 의중과 정보가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전체적으로 일본 측의 대(對)한 경제공세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초기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 등과 무역전쟁을 벌이는 모습을 벤치마킹했고 최근 들어선 한국을 ‘안보 문제국’으로 몰기위해 북한식 ‘살라미 전술’을 추종하는 모습이 뚜렷합니다. 일본이 한국에 도발을 시작할 때만 해도 ‘한·일 간 신뢰 관계 손상’을 주요한 이유로 내세우며 수출규제 조치가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하지만 “무역을 정치의 도구로 썼다”는 비판이 제기되자 안보 문제를 내세우며 확인되지 않은 의혹을 조금씩 내놓고 있습니다. 마치 아베 신조(安倍晋三)일본 총리의 벤치마킹의 대상이 트럼프에서 김정은으로 바뀌고 있다고 평할 수 있을 듯합니다.

지난 1일 일본 정부가 전격적으로 불화수소 등 3대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의 한국 수출 규제를 발표하면서 불거졌을 때만해도 한·일간 경제 전쟁의 시작은 일본이 가장 좋아하는 방식대로 진행됐습니다. 기습공격으로 방심하고 있던 상대의 급소에 치명적인 일격을 날리는 전형적인 일본식 선전포고가 나온 것입니다. 청일전쟁(풍도해전)과 러일전쟁(뤼순 습격), 태평양 전쟁(진주만 기습)에서부터 지난해 닛산자동차 일본인 경영진들이 카를로스 곤 전 르노·닛산 얼라이언스 회장을 부패혐의로 단칼에 제거한 사건까지 익숙하게 봐왔던 장면들이 반복된 것입니다.

주요20개국(G20)정상회의 직후라는 예상 밖 시점에, 자유무역을 주창하고 법과 질서를 준수하는 것을 유독 강조하는 일본 정부가 강경한 경제보복 카드를 꺼내들었다는 점에서 과거의 기습공격 사례들과 겹치는 면이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면밀한 분석 끝에 한국 경제의 핵심인 반도체 산업의 아킬레스건을 노렸다는 점도 전형적인 일본 스타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일본 특유의 싸움걸기는 제3자의 시각에선 비겁한 방식이지만 일본인들로선 승률이 높다고 판단해 애용하는 나름 검증된 전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본이 예상 밖으로 외교문제 해결을 위해 경제문제를 공격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초기엔 일본의 공세가 트럼프식과 유사하다는 시각이 많았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에 꺼내든 관세카드를 벤치마킹해 외교 분쟁에서 수출규제를 무기화했기 때문입니다. 힘의 논리 앞세워 불시에 전통적으로 우호관계에 있던 국가의 뒤통수를 치는 수법도 유사했습니다.

규제강화 조치 이후에는 처음 내세웠던 ‘한·일 간 신뢰 관계 손상’이라는 공세의 명분이 궁색해지면서 일본의 공격은 북한식 살라미 전술과 유사한 모습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전략물자 수출관리에 “부적절한 사안이 있었다”며 확인되지 않는 설을 조금씩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아베 총리의 측근인 하기우다 고이치 자민당 간사장 대행을 앞세워 “군사 전용이 가능한 물품이 북한으로 흘러갈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고, 자민당 간부들이 잇달아 “불화수소를 한국에 수출했는데 행방이 묘연하다. 행선지는 북한이다”등의 발언을 했습니다.

이어선 정부 입김이 강하게 반영되는 공영방송 NHK가 정부 관계자의 발언을 인용해 사린가스 반출 가능성까지 내놨습니다. “사린 등 화학무기로 전용될 수 있는 물자가 한국으로부터 다른 나라로 건네질 위험을 배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강변한 것입니다.
한국의 전략물자 불법수출 의혹을 부각한 산케이신문
한국의 전략물자 불법수출 의혹을 부각한 산케이신문
다소 황당한 ‘사린가스 제조설’에 이어선 ‘최근 4년간 불법 유출 156건’주장이 부각돼 확대되고 있습니다. 산케이신문 뿐 아니라 니혼게이자이신문도 “만약 한국에서 동남아시아와 중동 등을 통해 북한 등 대량 살상 무기의 보유·개발이 우려되는 국가로 수출된 사실이 판명되면 일본 뿐 아니라 미국, 유럽 등 각국의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가 강화될 것”이라며 “설사 징용피해자 판결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불법 수출문제에 대한 대응은 별건”이라고 거들고 나섰습니다.

일본이 이처럼 북한식 살라미 전술을 이용하는 것은 세계무역기구(WTO) 소송전을 포함한 국제 여론전에 대비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안보 문제를 내세워 자신들의 경제규제 조치를 정당화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한국을 ‘안보 문제국’으로 몰아가고, 오는 21일 열리는 참의원(상원)선거에서도 유리하게 활용하려는 목적도 있습니다.

냉정하게 살펴보면 일본과의 경제 전쟁은 한국에겐 극복하기 쉽지 않은 시련인 것은 분명합니다. 아직 양국 간 경제력과 국력의 격차가 현격하고 산업구조도 한국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는 구도로 짜여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일본에 ‘카운터펀치’를 날릴 수단도 마땅치 않은 상황입니다. 일본이 공식적으로는 한국에 대한 수출 혜택을 없애는 것이지 한국에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라는 식의 주장을 펴고 있는 점도 걸림돌입니다. 한국으로선 이에 문자적으로 꼭 맞게 상응하는 대응책을 꺼내기 힘든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세계무역기구(WTO)제소를 우선 고려하고 있지만 제3자가 누구든지 수긍할 수 있는 소송 명분을 명확하게 찾는 것도 쉽지 않을 수도 있고 승소를 담보할 수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소송이 진행되면 오랜 기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는데 불화수소 재고가 몇 달을 버틸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효율적인 대응책이라고 하긴 어렵습니다. 해외 주요국들 중에서도 굳이 일본과 척을 지면서까지 한국 편을 들어줄 국가를 찾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여기에 일본이 시나리오별 매뉴얼 대응에 강점을 지닌 만큼 예상 선택지에 있는 뻔한 대응을 했다간 일본의 페이스에 말릴 수도 있습니다. 또 일본계 자금이 한국서 빠져도 아무 문제없다는 식의 허세나, 일본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 같은 대응은 현실적으로 일본에 상처를 입히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정부는 장기전까지 고려하는 분위기입니다만 장기전을 간다고 한국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론 보이지 않습니다. 장기전을 버틸 체력, 지구력, 싸움의 방식, 싸울 장소 모두 한국에게 유리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치와 외교, 과거사를 둘러싼 양국 간 국민감정의 문제가 결국엔 경제대립의 문제로 비화했습니다. 무엇보다 양국 정치권이 더 이상 피해가 커지기 전에 하루빨리 진화의 해법을 찾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이번 ‘경제 전쟁’이 벌어진 탓에 양국 간 대립이 조기에 순조롭게 해소되더라도 이제는 더 이상 양국 경제계간 상호 신뢰와 협력 관계가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란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단기적으로 한국의 주요 기업들은 일본 이외로 수급선을 다변화하려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위협이 구체적으로 가시화된 만큼, 중·장기적으론 한국이 정치·경제적으로 (중국의 자장에 들어가) 일본과 대립각을 세울 가능성도 더 높아져 보입니다. 이는 한국과 일본의 정치·외교·경제의 이익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 결코 취해선 안됐을 악수인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오랜 기간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양국 관계를 정면대결로 치닫게 해 최악의 국면을 만드는 선택을 했다는 점에서 일본과 한국 정치권은 그 무능과 잘못된 판단으로 앞으로도 두고두고 큰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도쿄=김동욱 특파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