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각은 강력한 기억 남기는 소통 수단..낯설수록 민감해져" [김진세 박사의 K상담실]

김진세 | 정신과 전문의 입력 2019. 6. 29. 06: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ㆍ식구들한테 지하철 냄새가 난다는데 사실 잘 모르겠어요

‘백수 가족’의 장남 기우(최우식)가 과외 아르바이트로 ‘신흥 부자’ 박 사장 집에 발을 들여놓으며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영화 <기생충>은 북한 매체까지 비판에 나설 정도로 다양한 층위의 해석으로 회자되며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금주의 내담자(8) 영화 ‘기생충’의 기우

한때는 대한민국 ‘정상가족’의 표본이라 할 만한 가정의 장남이었다. 자상한 아버지, 자애로운 어머니 사이에서 여동생과 행복하게 살았던 기우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 어머니의 실직, 연이은 대입 실패를 겪으며 인생의 바닥을 찍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은 본격 고생길의 서막에 불과했다. 재난영화 같은 혹독한 풍파를 맞고 사경을 헤매다 깨어난 기우는 가까스로 대학생이 됐다. 기쁨은 잠시, 또 다른 고난 레이스의 출발점에 선 기분이다.

기우 =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오긴 했지만, 제가 여기 앉아있는 게 맞는지 모르겠어요. 주변에 저처럼 취직이 안돼서 힘들어 하는 친구들이 많거든요. 유독 제가 더 힘들어 하는 것은 아니겠죠?

김 박사 = 요즘은 여자 친구랑 싸우고 상담 오는 분들도 있는걸요.

기우 = 사실…. 도대체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건지…. 대학에 들어간 것도 엄마의 염원 때문이었어요. 스스로는 어떤 미래를 원하는지 몰랐거든요. 뭐,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강박이 동기라면 동기라고 할 수 있겠지만요. 아무튼 대학에 왔는데, 괜히 왔다 싶어요. 어찌나 돈 걱정 없이 사는 친구들이 많은지요. 세상에 잘사는 사람 많은 줄은 알았지만,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과 처지가 비교되니 너무 힘들더라고요. 어떻게 해야 그 아이들처럼 잘 먹고 잘살 수 있을까. 공부하면 되겠다 싶을 때는 열심히 공부도 하죠. 그런데 그러면 뭘 해요. 학점 잘 따놓는다고 취직이나 되겠어요? 아니, 취직을 한다 한들 등록금 대출 갚기도 벅찬데, 마당 넓은 이층집은 그림의 떡이죠. 예전과는 달리 너무 비관적인 나를 발견할 때면, 죽고 싶을 정도로 힘이 듭니다.

■큰 사건 겪고 성격 변한 것 같아

“머리 크게 다치면 변할 수도 전두엽 손상 땐 충동·공격적”

김 박사 = 마당 넓은 이층집이라…. 부자의 상징이었지요. 그런데 예전에는 어떤 성격이었는데요?

기우 = 재수 시절까지는 그래도 낙천적이었어요. 큰 욕심도 없었고, 딱히 거창한 꿈도 없었어요. 물론 좀 주눅 들어 있긴 했어요. 누가 잘못을 해도 큰소리 못 치는 성격이었으니까요. 근데 제가 최근에 큰 사건을 겪었거든요. 많이 다치기도 했고…. 그 이후에 성격이 변한 거 같아요.

김 박사 = 어떤 사건인가요? 성격이 변할 정도면 아주 큰일이 있었나 보네요.

기우 = (머뭇거리다) 하아, 그 얘기를 다 해야 하나요?

김 박사 = 기우씨를 위해서요. 여기는 기우씨를 평가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거죠. 그러니 마음 편히 이야기해요. 많이 들려줄수록 이해가 깊어지고, 그래야 더 많은 도움을 드릴 수 있겠죠.

기우 = 네, 숨김없이 말씀드릴게요. 친구가 하던 부잣집 과외 아르바이트를 넘겨받았어요. (이하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생략) 그때 머리를 심하게 다쳐서 죽을 고비를 넘겼거든요. 저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돼버린 거죠. 슬픔과 괴로움에 힘들어 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세상에는 넘지 못할 선이 너무 많더라고요.

김 박사 = 그런 영화 같은 일이 있었군요! 충격이 컸겠습니다. 머리를 크게 다쳤으면 성격이 변할 수 있어요. ‘기질성 뇌 증후군’이라고 불리는데요, 행동이나 정서상태가 바뀌기도 하죠. 뇌는 인간의 거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전두엽을 다치면, 성격이 충동적이고 공격적으로 바뀌기도 해요.

기우 = 저는 그 정도는 아니에요. 다만 중환자실에서 깨어나고 나서 이상한 증상이 있기는 했어요. 상황에 안 맞게 웃음이 나오는 거예요. 요즘은 많이 좋아졌지만(웃음), 이것도 뇌를 다쳐서겠죠?

김 박사 = 그럴 가능성이 있어요. 웃음은 감정의 표현이죠. 감정은 뇌의 변연계에서 관장하거든요. 만약 변연계가 손상됐다면, 부적절한 상황에서 웃을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영역도 관련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뇌에 이상이 없어도, 조증이나 조현병, 우울증에서 부적절한 웃음을 볼 수 있어요. 조증의 경우는 상상이 되죠? 자기만의 생각에 몰입하면 외부 자극에 관계없이 웃게 되지요. 세상이 하찮고 우스워 보여서일 수도 있고요. 조현병의 경우에는 부적절한 정서상태가 흔한 증상 중 하나예요.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하거나, 되레 웃기도 하죠. 우울증이 심해지면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기능이 마비되거든요. 드문 경우이긴 해요.

기우 = 아, 듣고 나니 부적절한 웃음이 이해되네요. 박사님, 계속 머리를 맴돌던 궁금증이 생각났어요. 우리 식구들한테 지하철 냄새가 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우리가 반지하에 산다고 그러는 건가. 사실 저희는 잘 모르겠거든요. 저만 그런가요? 아님 후각이 둔한 사람이 따로 있나요?

김 박사 = 그럴 수 있죠. 후각은 반복적인 자극으로 둔감해지기 쉬운 감각이거든요. 하지만 아주 예민하기도 하지요. 후각은 우리의 감각 중에 가장 강력한 기억으로 작용해요. 어릴 적 맡은 냄새는 절대 잊기 힘들죠. 아기 때는 냄새로 엄마를 찾기도 합니다. 코 속에 있는 후각수용체가 뇌와 가장 밀접하게 연결이 돼 있어서 그럴 겁니다. 또 식물들은 냄새로 대화를 한다고 해요. 우리가 잘 아는 피톤치드뿐만 아니라 식물이 뿜어내는 많은 냄새는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죠. 동물들도 마찬가지고요. 결국 냄새는 소통 수단의 하나인 셈이지요.

기우 = 그럼 좋은 냄새와 나쁜 냄새의 구별 기준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 거죠?

김 박사 = 그럼요! 어떤 사람에게는 불쾌한 지하철 냄새지만, 그 냄새를 그리워하거나 편안해하는 사람도 존재하지요. 그 냄새에도 어떤 소통의 의미가 존재한다면, 역시 계급을 유지하고 싶은 욕망에 관한 것이 아닐까요.

기우 = 계급이라는 벽을 생각하니 가슴이 턱 막히네요. 도무지 이번 생이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질 않아요. 정말 잘살고 싶은데, 번듯한 계획을 세우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완전 ‘이생망’이에요.

김 박사 = ‘이생망’요? 무슨 신조어 같은데….

기우 = ‘이번 생은 망했다’는 거죠. 그냥 ‘대충 살자’는 마음이 들기도 해요. 결혼? 내집 마련? 자녀 계획? 꿈도 못 꿉니다. 그런 얘기를 하는 애들도 있긴 한데, 둘 중 하나예요. 금수저거나, 현실 감각이 떨어지거나. 그냥 부모님 집에 빌붙어 살면서 용돈벌이나 하는 게 현실적이죠.

김 박사 = 맘이 아프네요. 요즘 젊은이들은 지나치게 피상적인 자극에 집착한다고 기성세대가 뭐라 합니다만, 실은 상당 부분 기성세대의 잘못이 큽니다. 혹시 여러 가지 이유로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님과 함께 사는 친구들이 있다면, 너무 자책하지 말라고 해주세요. 부모 입장에서는 답답하고 속상하긴 해도, 언제까지나 편이 되어줄 겁니다.

■인생 너무 괴로워 게임으로 도피

“게임중독, 병이냐 아니냐보다 결과가 나쁘다면 바로잡아야”

기우 = 박사님, 저는 그런 친구들마저 부러워요. 의지할 부모라도 있으니까요. 제 인생은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이미 마이너스잖아요. 너무 괴로워요. 할 수 있는 거라곤 게임밖에 없어요. 그때만큼은 아무 생각을 안 할 수 있거든요. 근데 걱정은, 자꾸 게임으로 밤을 새우고, 심지어 수업에 빠질 때도 있어요. 현실 친구들과 등진 지는 오래고요. 친구도 돈이 있어야 만나죠. 엄마는 맨날 게임만 하느냐고 잔소리하시는데, 게임이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미쳐버릴 거 같은데 어떡해요.

김 박사 = 얼마나 힘들면 그러겠어요. 충분히 이해해요. 그런데 게임이 일상생활을 무너뜨리고, 대인관계나 사회활동에 지장을 줄 정도라니. 기우씨가 생각해도 좀 지나친 거 같지 않아요?

기우 = 그건 그런 거 같아요. 문제라고 생각해서 게임을 끊거나 줄이려고 해봤는데, 안되더라고요. 엄마는 제 의지가 약해서 그렇다는데. 좀 도와주세요.

김 박사 = 요즘 언론을 통해 들어서 아시겠지만, WHO(세계보건기구)에서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분류했어요. 물론 논란의 여지는 많아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게임이 노인의 인지기능 저하를 막는 데 도움이 되고, 우울증을 나아지게 할 수 있다는 연구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지금 나에게 발생한 결과죠. 결과가 나쁘면 병이든 현상이든 바로잡아야 합니다. 다른 중독과 마찬가지로 게임 역시 뇌의 신경회로를 변화시켜요. 인간의 뇌에는 쾌락중추가 존재해요. 게임이든 마약이든 술이든 이 중추를 통해 쾌락을 반복해 느끼게 되면, 인간의 감정과 행동을 조절해서까지 쾌락을 탐닉하게 합니다. 의지의 문제라기보다는 뇌의 문제죠. 의지 역시 뇌의 지배를 받으니까요.

기우 = 박사님 말씀 들으니 저 정말 심각한데요. 사는 것도 힘들고, 미래도 막막하고, 게다가 쾌락에 빠져 현실을 부정하고 있으니….

김 박사 = 기우씨만 그런 것은 아니에요. 요즘 젊은이들 다수가 같은 고민으로 고통받고 있어요. 우선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봅시다. 게임중독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돕는 치료를 받아보면 어때요? 그래서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면, 그때부터 미래와 현실의 막막함에 대해 고민해봅시다. 높은 산을 넘을 때는 산봉우리를 바라보지 않는 것도 쉽게 산을 오를 수 있는 방법이에요.

기우 = 그렇지만 저는 자꾸 산봉우리가 보이는데 어쩌죠?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아버지가 잘나가면 학점 좀 적어도 대기업 척척 붙는다면서요? 무슨 왕조시대도 아닌데, 부모가 누구냐에 따라 삶이 결정된다니 억울해요.

김 박사 = 참 불공평하죠? 누구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고, 누구는 빚을 물려받으며 태어나죠. 뻔한 이야기 같을 수 있겠지만, 일단은 ‘세상은 불공평한 곳’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기우 = 박사님! 솔직히 그런 얘기 너무 많이 들어서 약간 거부감이 드네요. 말 나온 김에 말씀드리자면, 요즘 청년들은 ‘세상은 불공평한 곳이니, 열심히 살아보라’라는 유의 이야기를 들으면 분노부터 치밉니다.

김 박사 = 그 마음 이해해요. 그런데 제 이야기가 다 끝난 것이 아니거든요. 좀 더 들어봐줄래요?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뜻은, 우리의 스타트 라인은 여기라고 인식하는 겁니다. 남 탓만 하고, 스스로를 내팽개치는 실수를 범하지 말자는 뜻이에요. 맞아요. 아주 불리한 스타트 라인이죠. 그럼에도 살아가야 합니다. 마음속을 들여다보자고요. 절대 이대로 끝낼 수는 없을 거예요. 저도 마찬가지지만, 잘살아보고 싶은 욕망은 본능이니까요. 아무리 욕하고 화가 치밀어 올라도, 인간답게 사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어요.

■불공평한 세상, 분노 어떻게…

“마음에 쌓아두면 되레 무기력 폭력 자제…적절한 표현 중요”

기우 = 박사님과 얘기하면서 기분은 좀 나아졌는데, 죄송합니다만,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저 같은 고민으로 상담을 하는 친구들이 많나요?

김 박사 = 안타깝게도, ‘취준생 우울증’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많죠. 만약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로 불편하면, 다시 말해 우울하거나, 불안하거나, 잠을 못 자거나, 집중이 도저히 안된다면, 상담과 치료가 필요하지요. 기우씨 생각처럼, 치료를 받는다고 100% 좋아지지는 않아요. 열악한 환경이 지배하고 있으니까요. 열심히 상담하고 필요에 따라 약을 먹으면, 70~80%까지는 좋아질 수 있지요. 중요한 사실은 70~80%만 좋아져도 역경을 헤쳐 나갈 힘이 생긴다는 겁니다. 피상적으로는 집중력이 향상되니 학업이나 취업 준비에 도움이 되죠. 의욕이 살아나고 기운이 생기면 미래를 계획하는 것도 가능해지겠죠.

기우 = 도대체 이 분노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벌일 거 같아 두렵습니다.

김 박사 = 저도 걱정입니다. 마치 화병처럼 요즘 젊은이들의 집단적인 심리상태는 분노가 핵심입니다. 분노는 결국 해로운 존재지요. 표현하지 않는 분노는 역설적으로 당사자를 무기력하게 만들죠. 암과 연관이 될 정도로 건강에도 나쁘고요.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좋아요. 다만, 긍정적인 분노의 표현은 절대 폭력적이어서는 안됩니다. 앞뒤 가리지 않는 분노의 표현은 모두를 불행하게 해요.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분노를 표현하고, 저항해야 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이 많잖아요? 저는 그것이 저항의 큰 동력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자신이 속한 집단의 변화를 위해 노력해야겠죠. 토론하고 의견을 나누세요. 우리는 생존해야 합니다. 지금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봅시다.

▶필자 김진세
정신과 전문의 김진세 박사는 슬럼프 극복을 위해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도 ‘길 위의 카운슬러’로 나섰던 천생 상담가다. 고려제일정신건강의학과 원장으로 20년 이상 진료실에서 상담을 하고, 정신 건강과 관련된 수백편의 글을 써왔다. 저서로 <심리학 초콜릿> <행복을 인터뷰하다> <태도의 힘> <길은 모두에게 다른 말을 건다> 등이 』 있다. 김진세 | 정신과 전문의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