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 시인 "'괴물' 발표 후회 안해..제 글에 대한 자신감으로 여기까지 왔다"

이영경 기자 2019. 6. 25.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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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신작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을 펴낸 최영미 시인이 25일 시집 출간을 기념해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저는 제 글에 자신이 있어요. 터무니없는 자신감이 지금까지 저를 이끌어왔습니다. 지난해 고립무원에서 ‘그의 사람들’ 틈에서 싸우면서도 온전한 정신으로 지금까지 온 것은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최영미 시인(55)이 6년 만에 신작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이미)를 펴냈다. 고은 시인의 성폭력을 고발하는 내용으로 ‘미투 운동’을 촉발시킨 계기가 된 시 ‘괴물’을 포함한 시편들이 수록됐다. 최 시인이 25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의 한 카페에서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지난해 시집을 내고 싶어 출판사에 문의했지만 답이 없었어요. ‘이제 한국 문학 출판사에서 내 시집 내는 걸 부담스러워 하는구나’ 깨달았죠. 제가 출판사를 차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지난 4월 사업자등록을 했어요. 제 몸에서 시인의 피를 빼고 사업가의 피를 갈아넣는 느낌이었어요.”

수록작 중에 ‘등단 소감’은 등단 직후 1993년 발표한 시로, 26년 만에 시집에 함께 묶었다. “내가 정말 여, 여류시인이 되었단 말인가/ 술만 들면 개가 되는 인간들 앞에서/ 밥이 되었다, 꽃이 되었다/ 고, 고급 거시기라도 되었단 말인가”라며 당시 문단에 팽배했던 성추행·성희롱을 비판한다. 최 시인은 “등단 직후 문단 술자리에서 내가 느낀 모멸감을 표현한 시다. 가만히 서 있으면 뒤에서 엉덩이를 만지고 성희롱 언어들이 무성했다. 지금껏 시집에 싣고 싶었지만 주변의 만류로 그러지 못했다”고 말했다.

최 시인은 지난해 미투운동을 촉발한 계기가 됐던 ‘괴물’이란 시에 대해 “2017년 9월 문예지 ‘황해문화’에서 젠더 이슈에 관한 시를 청탁받고 쓴 시”라며 “청탁을 받고난 후 당시 할리우드에서 벌어진 미투 운동이 벌어졌고, 이제 이야기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마지막까지 겁이 많아서 주변에 보내도 될까 물어봤다”고 말했다.

최 시인은 고은 시인으로부터 명예훼손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1심에서 승소했지만, 현재 항소심이 진행중이다. 최 시인은 “재판하면서 너무 쪼그라들었다. 재판에 영향을 끼칠까봐 이번 시집처럼 검열을 한 적이 없다. 처음으로 변호사에게 시집 원고를 보내 검토를 받고 시를 몇 개 빼기도 했다”면서도 “‘괴물’을 발표한 것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젊은 여성들에게 미안했어요. 2016년 가을 문단 내 성폭력 고발이 시작됐고, 고양예고 졸업생들이 배용제 시인의 성폭력을 고발했어요. 시를 쓰면서 너무 늦게 쓴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있었고, 그래서 발표한 용기를 얻었습니다.”

몇몇 시편에선 문단 내 권력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엿보인다. ‘바위로 계란 깨기’란 시에선 “계란으로/ 바위를 친 게 아니라,/ 바위로 계란을 깨뜨린 거지// 우상을 숭배하는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썩은 계란으로 쌓아올린 거대한 피라미드를 흔든 건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었지”라고 문단 내 권력과 우상화에 대해 비판하고, “그가 아무리 인류를 노래해도/ 세상의 절반인 여성을 비하한다면/ 그의 휴머니즘은 가짜”라고 꼬집는다.

시집엔 연애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니를 간병하며 어머니의 배변을 보고 기뻐하는 이야기 등 일상에 대한 시편들도 실렸다.

책 처음을 여는 시는 ‘밥을 지으며’다. “밥물은 대강 부어요…되는대로/ 대강/ 대충 살아왔어요/ 대충 사는 것도 힘들었어요/ 전쟁만큼 힘들었어요…서른다섯이 지나/ 제 계산이 맞은 적은 한번도 없답니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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