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장혜진, 낯섦을 걷어낸 이 배우의 진가 [인터뷰]

한예지 기자 2019. 6. 6.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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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진 인터뷰 /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스포츠투데이 한예지 기자] 연기판을 오래도록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배우들에겐 꿈의 무대인 세계적 영화제에 발을 들이고, 제 이름을 당당히 만천하에 각인시킨 배우 장혜진의 인생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

영화 '기생충'(감독 봉준호·제작 바른손이앤에이)에서 전원백수 기택네의 중심을 잡던 기택 아내 충숙. 투박한 이름만큼이나 두툼하고 꾸미지 않은 외양과 전국체전 해머 던지기 은메달리스트 출신다운 박력 넘치는 성격, 괄괄하면서도 실제로 어느 반지하 집에 살고 있을 것 같은 동네 아줌마 충숙을 실감 나게 연기한 배우 장혜진은 대중에 꽤 낯선 이였다.

그는 열아홉에 데뷔한 한예종 출신의 배우지만 10년 가까이 연기판을 떠나 보통 사람으로 살다가, 이창동 감독의 제안을 받고 '밀양'(2007)을 통해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이후로도 그가 맡은 건 출국 심사원 역, 둘째 며느리 역, 엄마 역, 작은 올케 역 등 작은 배역들이다. 그렇기에 대중적 인지도는 낮았다. 하지만 장혜진의 진가는 그가 각인되는 순간 어김없이 발휘된다.

봉준호 감독은 영화 '우리들'(2015)에서 시험을 볼 때 아는 답을 틀리게 쓴 딸에게 이유를 묻는 장혜진의 찡그린 얼굴에서 충숙을 발견했다. 장혜진은 "감독님이 그때 제 표정을 캡처해서 갖고 계시더라. 제가 봐도 얼굴이 참 찌그러져 있었다"며 너스레였다. 또 봉준호 감독이 제 팔뚝살을 보고 캐스팅한 거라고 익살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중심이 되는 영화에서 무덤덤한 엄마 역할로 출연한 장혜진에게서 확신을 얻은 봉준호 감독이었고, 그의 선택은 대중에겐 놀라운 발견이 됐다.

장혜진은 출연 제안을 받고 나선 마음이 쉼 없이 오락가락했단다. 이렇게 큰 프로젝트에 이런 큰 역할을 맡아도 되는 것인지, 누를 끼치진 않을지 부담이 된 탓이다. 그러다 "에라 모르겠다"하며 도전했다. 우선 체중 증량에 나섰다. 15KG을 찌웠다. 외양은 한심한 백수 남편 기택(송강호)을 말 한마디로 제압할 만큼 완력 넘치는 충숙으로 변신됐다. 하지만 남편과 자식 앞에서 욕설도 서슴지 않는 괄괄한 성미에 사건이 벌어지면 말보다 행동이 튀어나가는 충숙의 모습을 쉬이 따라 하긴 어려웠다. 장혜진은 "저와 충숙의 결이 너무 다르다고 생각했다. 충숙은 운동선수 출신인 만큼 본능적으로 몸이 먼저 반응하는 사람이다. 나랑 너무 다르다고 생각했고, 감독님이 제 모습 어디에서 충숙을 보신 건지 너무 놀라웠다"고 했다.

갈수록 저 또한 신기할 만큼 닮은 지점들을 찾게 되더란다. 그는 "충숙이 살아온 환경을 보니 최고를 꿈꾸던 운동선수지만, 은메달에서 멈추고 운동을 그만둔 뒤 결혼해 가정을 꾸렸고 가난한 환경에서 삶을 꾸려가는 모습이다. 그런 삶의 맥락이 저와 같더라"고 했다. 그 또한 젊은 시절 연기가 하고 싶어 이를 전공했지만 졸업한 뒤 배우를 그만두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키우며 꿈을 접고 지냈다. 여기서부터 공감이 시작됐다. 표현 방식의 차이일 뿐이었다. "저는 적극적이지만 상냥한 표현법을 갖고 있다면, 충숙은 좀 더 본능적이고 직관적으로 표현한단 생각이 들었다"는 그다.

이를 깨달은 순간 장혜진은 봉준호 감독에 메시지를 보냈다. 충숙과 다른 줄 알았는데 닮은 모습이 있었다고. 그는 이전까지 자신을 믿지 못하고 걱정과 부담에 흔들렸었지만, 봉준호 감독은 그의 문자에 그저 허허허 웃으며 "잘할 거면서 투덜댄다"고 웃었단다. 장혜진은 "제가 제 모습을 못 보니까 흔들렸던 것 같다. 그런데 감독님께서는 제가 저를 믿는 것보다 훨씬 저를 믿어주셨다. 감사했다. 송강호 선배님과도 합이 잘 맞았다. 늘 제게 '좋았어! 아주 좋았어'를 외쳐 주시며 저를 믿어주셨다"며 이런 믿음이 그렇게 힘이 되더라고 털어놨다. 그랬기에 장혜진은 주눅 들지 않고 연기할 수 있었단다.

사진=영화 기생충 스틸


이토록 신뢰를 얻고 장혜진은 마음껏 진가를 발휘했다. 성질 사나운 동네 아줌마의 후줄근한 모습에서 상류층에 입성하며 패션과 행동거지까지 교양 있게 돌변하는 모습, 한바탕 시끌벅적하고 충격적인 소란이 벌어진 뒤 긴박하게 '짜파구리'를 끓여야 하는 상황에서 그가 보여준 긴장감 넘치는 액션들은 단연 시선을 사로잡는 짜릿한 시퀀스였다. 이중에서도 장혜진은 박사장네서 기택네 식구들이 여유와 사치를 부리던 신이 특히 기억에 남는단다. 그는 "대본을 볼 때부터 내 것이 아닌데 내 것처럼 보이고 흡수돼 있는 모습이 슬프고 짠하더라"고 했다. 기택네 식구들이 잔디밭에 둘러앉아 있던 신은 유독 그랬다. 좋으면서도 슬프더란다.

이는 대본을 볼 때부터 느꼈던 감상이다. 장혜진은 "처음 볼 땐 다음장이 너무 빠르게 쑥쑥 읽혔다.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다르게 변주가 돼 신기한 마음으로 봤다"며 "아무래도 제가 충숙이 우리 가족이 처해진 현실에 더 감정 이입해 보는데 너무 슬프고 먹먹해서 눈물이 나오더라"고 털어놨다. 또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게 됐단 장혜진이다. 울컥울컥 한 지점들이 제 삶과도 맞닿아 있어 감정의 동요가 일었다고.

그 역시도 기회를 쉽게 잡지 못했다. 장혜진은 "연기를 다시 시작했을 때 오디션을 보고도 떨어졌다. 작품이 많이 들어오지 않았다. 단역인데 왜 이렇게 열심히 하느냐는 질문도 받은 적 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 과정 또한 자신을 채워 나가는 시간이라 여겼고, 연기를 다시 시작한 것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했기 때문이다. "정말 힘들었던 순간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면 주변에 정말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가족의 힘이 크다. 딸은 '엄마 장혜진보다 배우 장혜진으로 행복했으면 좋겠어'라고 하더라"며 눈시울을 붉힌 그는 "가족이 가장 큰 힘이 되는 것 같다. 선배님과 동료 배우들, 친구 친척들 모두 자신의 일처럼 좋아해 준다. 이렇게 좋은 일들이 생겨서 감사하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장혜진은 '기생충'을 보며 절대적 수직구조에 대한 계층 공포, 이로 인한 슬픔과 허무함을 느꼈을 관객들에게도 위로를 건넸다. "그래도 우린 혼자가 아니지 않나. 누군가 내 감정을 나눌 사람이 있으실 거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삶을 돌아보면 그렇지 않다. 힘든 상황을 멀리서 내다보면 우리는 이를 이겨내고 치유할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우린 단단해진다고 생각한다"는 그의 진심이었다. 내일이 있기에 오늘을 포기할 수 없고, 이것이야말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아니겠냐며.

장혜진의 심지는 이처럼 굳세고 단단하다. 그러면서 인간미도 넘치게 풍긴다. 그는 이미 40대 중반을 넘은 나이에 거창한 꿈을 꾸지 않는단다. 그저 교만하지 않고, 건방지지 않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 나이와 걸맞은 배우가 되고 싶을 뿐이다. 작품을 통해 위안을 받고 싶은 관객들과 함께 감정을 공유하고 나눌 수 있는, 때론 동지이자 친구처럼 힐링이 될 수 있는 그런 연기를 할 수 있길 꿈꾸는 장혜진이다.

장혜진 인터뷰 /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스포츠투데이 한예지 기자 ent@st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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