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고 염호석 노조원 시신탈취 사건서 삼성 대리인 노릇"

이희경 2019. 5. 14.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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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조사위 '고 염호석 삼성전자서비스 노조원 사건' 조사결과 발표
14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에서 경찰청 인권침해 사건 진상조사위원회 유남영 위원장이 고 염호석 삼성전자 서비스 노조원 사건의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4년 5월 고(故) 염호석 삼성전자서비스노조원(당시 양산분회 분회장)의 장례 절차에 경찰이 삼성전자서비스(이하 삼성)의 사주를 받아 적극 개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고인의 뜻에 반해 ‘가족장’으로 장례를 축소하기 위해 삼성이 준비한 합의금을 유족에게 대신 건네는 등 경찰은 철저히 삼성의 대리인 노릇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 권력에 유착한 정보경찰의 폐단이 확인된 것으로 정보경찰 개혁의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찰청 인권침해 사건 진상조사위원회(이하 진상조사위)는 14일 서울 미근동 경찰청에서 ‘고 염호석 삼성전자서비스 노조원 사건’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유사사건 재발방지 및 인권 증진을 위한 제도 및 정책 개선을 경찰청에 권고했다. 이 사건은 2014년 5월17일 삼성전자서비스 노조원으로 있던 염씨가 강릉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유서를 통해 노동조합장을 요구했지만, 경찰의 개입으로 시신이 옮겨지고 화장돼 ‘시신탈취 사건’으로도 불린다.
 
◆합의금 대신 주고, 실시간 정보 공유까지…삼성 대리인 노릇한 경찰
 
진상조사위에 따르면 당시 경찰청과 경남청, 양산서 소속 정보경찰은 삼성전자서비스의 의도에 따라 노동조합장에서 가족장으로 염씨의 장례를 변경하도록 부당하게 사건에 개입했다. 염씨가 상경 투쟁을 한 뒤 자살하고 화장되기까지 3일 동안 실시간으로 사측에 정보를 제공하고, 삼성이 마련한 수억원의 합의금을 대신 건네는 등 삼성의 의도에 따라 활동한 것이다.
 
시간대별로 보면 관할서인 양산서 정보경찰들은 17일 강릉으로 염씨의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올라가면서부터 삼성 측에 이를 알렸다. 이후 삼성 측 북부산(구포‧양산) 지점장 이모 부장은 윗선으로부터 가족장으로 장례를 치르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고 염씨 부친 등과 합의를 시도했다. 이때 정보경찰은 노조장으로 치러달라는 염씨 유서 내용을 염씨 부친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이때만 해도 염씨 부친은 노조에 장례절차를 위임하는 등 삼성 측과 합의를 거부했다.
 
이런 상황은 염씨의 시신이 서울의료원에 안치된 18일부터 달라졌다. 경찰이 삼성의 부탁을 받고 염씨의 지인을 통해 설득에 나서는 등 장례절차 변경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면서다.
 
설득 작업은 투트랙으로 진행됐다. 양산서 정보과 김모 계장이 염씨 부친의 지인 이모씨를 찾아내 ‘노조에 위임장을 써주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도록 하는 한편 경찰청 정보국 김모 경정(노정팀장)은 삼성전자서비스 종합상황실 최모 상무의 요청을 받아 염씨 부친을 직접 만났다. 특히 김 경정은 서울 강남 르네상스호텔에서 염씨 부친을 만난 자리에서 ‘합의금 6억 정도면 어떠냐’고 제안하고, 3억원을 먼저 지급하고 가족장 치르면 나머지를 주는 합의금 지급방식까지 제안한 것으로 확인됐다. 염씨 부친은 이를 받아들였고 염씨의 계모는 합의금 3억원을 수령했다.
 
노조원들이 지키고 있던 염씨의 시신을 빼내는 과정에도 경찰이 개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김 계장이 염씨 부친의 지인 이씨에게 연락해 112 신고를 하도록 종용했고, 이씨는 오후 6시56분 “300~400여명의 노조원들이 운구차를 못나가도록 방해하고 있다‘는 취지의 신고를 했다. 경찰은 이씨의 신고 4분 만에 기다렸다는 듯이 경력 240여명을 서울의료원에 투입했다. 캡사이신을 동원한 경찰과 노조의 대치 끝에 운구차는 이날 오후 7시55분 서울을 빠져나갔고, 시신은 부산 세계로 병원에 안치됐다. 이동 중에도 경찰은 실시간으로 삼성 측에 운구차의 이동상황을 전달했고 졸음쉼터에서 사측과 염씨 부친 등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다.
 
염씨 시신을 신속하게 화장하기 위해 경찰은 염씨 친모 등 유족의 의사도 묻지 않은 채 공문서를 발급받기도 했다. 양산서는 18일 오후 11시40분쯤 ‘관내 진행 중인 집회 사건 관련 증거자료를 수집하기 위함’이란 이유로 강릉서에 검시필증 등 사본 송부 협조 공문을 보냈지만 거절되자 30분 뒤 ‘유족의 요청에 의함’으로 수정 기재해 공문을 재발송해 검시필증 등을 받았다. 하지만 진상조사위 조사 결과 경찰은 유가족 의사를 확인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은 19일 삼성 측 최 상무가 염씨 부친에게 주기로 한 합의금 중 잔금 3억원을 사측을 대신해 전달해 주기도 했다. 진상조사위는 “2013년 10월 최종범 노조원 사건 당시에도 김 계장을 포함한 경찰이 삼성전자서비스가 준비한 합의금을 직접 유족에 전달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염씨 친모, 경찰 개입에 얼굴도 못 보고 아들 떠나보내
 
경찰의 이 같은 개입 과정에서 고인인 염씨는 물론 부친을 제외한 유가족 의사는 철저히 배제됐다. 노조장을 원하는 고인의 유서는 무시됐고, 친모는 얼굴조차 보지 못한 채 아들을 떠나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진상조사위에 따르면 김 경정은 시신 화장 전날에 김 계장에게 ‘화장이 빨리 진행되도록 하라’고 지시했고, 김 계장은 염씨 부친에게 조속한 화장을 종용했다. 결국 염씨의 시신은 당초 예정됐던 화장 시각(20일 오후 1시)보다 앞선 오전 10시21분에 화장됐다. 화장 시각을 뒤늦게 파악한 노조원들이 염씨의 친모 김씨에게 이를 알리고 부랴부랴 오전 10시56분에 화장시설에 도착했지만 염씨 시신은 이미 화장절차를 마친 뒤였다. 진상조사위 관계자는 “친모는 염씨의 유골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기회마저 빼앗긴 것”이라고 말했다.
 
염씨의 시신이 화장된 뒤에도 유골함과 관련해 노조와 경찰 간 대치가 발생했다. 염씨 부친이 ‘노조가 아들의 유골을 탈취해가려 한다’고 신고하자 경찰이 투입돼 유골함이 보관되고 있던 분골실 출입구를 통제했고, 노조원들과의 대치가 이어졌다. 당시 경찰은 염씨 부친만 분골실 내부 진입을 허용하고, 친모의 출입은 막았다. 이날 오후 1시50분 염씨 부친은 경찰의 보호를 받아 유골함을 들고 밀양화장시설을 빠져 나갔고, 이튿날 오전 9시30분에 유골함이 부산 기장군 소원사에 안치될 때까지 이송을 도왔다.
 
조사결과 사건에 깊숙이 개입한 김 계장은 22일 경남 양산시 한 주유소 인근에서 삼성 측으로부터 현금 1000만원을 건네받아 양복 14벌을 정보보안과 소속 경찰관 14명과 맞춰 입고, 남은 금액은 고깃집 회식을 하는 데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민변 노동위 삼성노조파괴대응팀이 지난해 5월 18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경찰의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염호석 열사 장례절차 개입에 대한 진상조사를 요청하고 있다. 연합뉴스
◆진상조사위가 풀지 못한 숙제는?
 
경찰의 삼성 의도에 따라 시신탈취 과정에서 대리인 노릇을 한 것이 지난해 검찰 수사에 이어 이번에 재차 확인됐지만 아직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는 지적이다. 우선 경찰 본청, 경남청, 양산서 소속 경찰들이 노조장 대신 가족장으로 장례를 치르길 원하는 삼성의 뜻에 따라 체계적으로 움직였는데 누가 이를 총괄해 지시하고 계획했는지 드러나지 않았다. 이 사건을 진두지휘한 컨트롤타워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진상조사위가 이를 밝히지 못한 것이다. 유남영 진상조사위 위원장은 “현실적으로 (윗선의 지시나 개입에 대한) 단서를 파악하지 못했다”며 “보고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컨트롤타워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전반적으로 (검찰) 수사가 진행되고 있어서 (조사 대상자의) 진술을 받아내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진상조사위는 현직 경찰은 조사에 대부분 응했지만 고위직이거나 퇴직한 경찰은 진술을 거부한 경우가 있어 한계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실제 당시 경찰청 경비국장은 진상조사위의 조사에 응했으나 정보국장은 조사를 거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아울러 정보경찰들이 직무에서 벗어난 행위임에도 왜 삼성의 대리인처럼 행동했는지도 향후 풀어야 할 실체적 진실 중 하나라는 지적이다. 진상조사위에 따르면 정보경찰들은 관행적으로 합의를 주선해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이런 행동을 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진상조사위는 권고문을 통해 경찰이 염 씨의 장례와 관련해 회사 측 입장을 옹호해장례 절차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염 씨의 모친인 김모 씨의 장례 주재권을 방해했다며 이에 대한 사과를 주문했다. 또 정보경찰이 노사관계에서의 객관 의무를 위배하고 경찰 활동이 관리·통제되지 못한 점에 대해서도 유감을 표명할 것을 권고했다. 진상조사위는 이와 함께 정보활동 범위를 경찰관직무집행법상 경찰의 직무에 부합하도록 개정하고 집회·시위 등과 관련해 정보경찰의 정보 내용을 분석하고 활동내용을 평가·통제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경찰청에 권고했다. 
 
이희경 기자 hjhk3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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