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준구의 타임머신] '위대한 도전' NCAA 개척 나섰던 이은정·최진수·신재영

민준구 2019. 5. 1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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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과 실패를 떠나 도전은 항상 아름답다.

지난 5일(한국시간) 호주 NBA 아카데미에서 농구 유학 중이던 이현중이 NCAA 디비전Ⅰ 데이비슨 대학 입학의향서(National Letter of Intent ; NLI)에 사인했다.

많은 이들은 이현중의 NCAA 진출 소식과 함께 이전에 있었던 세 명의 주인공들에 대한 궁금증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현중 이전의 NCAA 개척자들,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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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민준구 기자] 성공과 실패를 떠나 도전은 항상 아름답다.

지난 5일(한국시간) 호주 NBA 아카데미에서 농구 유학 중이던 이현중이 NCAA 디비전Ⅰ 데이비슨 대학 입학의향서(National Letter of Intent ; NLI)에 사인했다. 이로써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선수들 중 네 번째로 NCAA 무대를 밟는 주인공이 됐다.

많은 이들은 이현중의 NCAA 진출 소식과 함께 이전에 있었던 세 명의 주인공들에 대한 궁금증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세계농구의 변방인 대한민국에서 미국 진출에 나섰던 용감무쌍한 도전자들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이다. 그래서 준비했다. 이현중 이전의 NCAA 개척자들,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



▲ 루이지애나 몬로 대학의 전설 ‘E.J’ 이은정
대한민국 여자농구의 전성기였던 1980년대, 모두가 박찬숙, 성정아, 김화순, 최경희, 김영희 등 슈퍼스타들에게 열광했다. 1984 LA올림픽 은메달, 1986 서울아시안게임 금메달 등 아시아를 넘어 세계에서도 알아줬던 때다.

이들과 달리 먼 미국 땅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떨친 ‘슈퍼 코리안’도 존재했다. 1982년 숭의여고 졸업 후, NCAA 디비전Ⅰ 소속 루이지애나 몬로 대학(당시 노스이스트 루이지애나 대학)에 입학한 이은정 코치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미국에서의 소식이 국내로 전해지기 힘들었던 1980년대. 이은정 코치의 당시 활약을 다룬 자료는 찾아보기 힘들다. 독자들을 위해 간략히 설명하자면 이은정 코치는 루이지애나 몬로 대학의 황금기를 이끌었고, 1984-1985시즌에는 팀의 유일한 NCAA 파이널 포 진출을 이룬 핵심자원이었다. 4년간 2,208득점을 기록했고, 878의 어시스트, 297개의 스틸을 기록했다.

이은정 코치의 등번호였던 5번은 이미 영구결번됐다, 그의 이름은 루이지애나 몬로 대학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다. WNBA(미국여자프로농구)가 조금만 더 빨리 출범했다면, 우리는 몇 년 더 빨리 최초의 WNBA 진출자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불꽃 튀는 승부를 펼친 김화순 감독 역시 이은정이란 이름을 잊지 못했다. “(이)은정이는 당시 여자농구계에서 볼 수 없었던 파워형 가드였다. 왼손잡이라는 특수성과 함께 빠르고 강한 플레이를 즐겼다. 미국으로 가면서 연락이 끊겨 아쉬웠지만, 정말 대단한 선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 국가대표팀에 있었다면 (박)양계 언니와 주전 자리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했을 것이다. 서로의 스타일이 다르지만, 은정이의 실력은 베스트5에 있었어도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김화순 감독과 이은정 코치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김화순 감독의 둘째 딸 신재영 역시 루이지애나 몬로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던 건 이은정 코치의 도움이 컸다. 이은정 코치는 현재까지도 루이지애나 몬로 대학의 코치로 활동하고 있으며 감독 선임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어쩌면 이은정 코치는 앞서 언급한 세 명의 NCAA 진출자 중 유일한 성공자이기도 하다. 최진수와 신재영이 미국 생활을 그만두고 대한민국에 건너왔지만, 이은정 코치는 선수는 물론 코치로도 활동 중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이 정도의 능력 있는 이가 국내에 덜 알려졌다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그에 대한 진정한 평가가 필요하다.



▲ 역대급 재능을 지닌 최진수, 그러나 아픔만 가득했던 NCAA
2000년대 중반, 농구 팬들은 최진수(당시 김진수)라는 괴물의 탄생에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최진수는 202cm의 장신, 압도적이었던 플레이에 이미 동연령대는 물론 고교무대에서도 적수가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미 국내 잔류는 최진수에게 의미가 없었고, 결국 미국으로 농구 유학을 떠나게 된다.

몬트클레어고로 진학한 최진수는 이후 미국의 농구 명문인 사우스겐트고로 전학하며 현지에서도 인정받는 유망주로 꼽혔다. 한때 전미 스몰포워드 랭킹 25위에 오를 정도. 당시 그를 원했던 대학 팀은 조지타운부터 노스 캐롤라이나, 메릴랜드 등 NCAA 디비전Ⅰ에서도 상위권으로 꼽힌 곳이었다. 메릴랜드 대학의 개리 윌리엄스 감독은 스카우트가 아닌 자신이 직접 최진수의 경기를 보기 위해 찾아오기도 했다.

여러 학교를 염두에 뒀던 최진수는 메릴랜드 대학을 방문하던 도중 감동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최진수를 강력히 원했던 메릴랜드 대학은 그의 유니폼을 미리 제작해 놓았던 것이다. 더불어 1만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체육관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최진수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입학을 원했다. 결국 최진수는 메릴랜드 대학으로의 진학을 결정했고, 남자농구선수로서는 최초로 NCAA 진출자가 됐다.

최진수를 밀착 취재했던 서정환 기자는 “당시 최진수에 대한 평가는 그 어떤 선수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NCAA 디비전Ⅰ 소속 팀들 중 상위권에 속한 이들이 손을 내밀었고, 메릴랜드 대학 역시 2001년 파이널 포, 2002년 토너먼트 우승을 차지한 강팀이었다. 그런 팀에서 최진수를 위해 유니폼을 제작하고, 체육관을 가득 채워 이름을 외쳤다는 건 지금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팬클럽도 있었다. 그만큼 최진수에 대한 기대감이 엄청났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행복한 순간도 잠시, 최진수에게는 조금씩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당시 최진수는 3번(스몰포워드)의 움직임을 배우고 있었다. 202cm의 스몰포워드는 미국에서도 경쟁력이 충분했다. 비교적 무난했던 신입생 시절을 보낸 최진수는 위기의 연속이었던 2학년이 된다.

3번으로의 움직임을 거의 완성했던 상황에서 최진수에게 비극적인 소식이 전해진다. 당시 메릴랜드의 주전 4번(파워포워드)이 부상을 당하면서 공백을 메꾸는 부담이 전가된 것이다. 당시를 회상한 서정환 기자는 “NCAA처럼 경쟁력이 심한 곳에서 갑작스런 포지션 변경은 쉽지 않은 일이다. 3번으로 경쟁력을 키우고 있었던 최진수에게 4번으로 뛰라는 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라고 전했다.

고질적인 어깨 부상, 어색한 포지션, 더불어 성적에 대한 압박까지 겹친 최진수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부족한 학점을 채우기 위해 여름, 겨울 학기를 소화해야 했지만, 무리한 국가대표팀 차출까지 더해지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끝내 최진수는 국내 리턴을 선택했고, 1년의 공백기를 지낸 후, 일반인 자격으로 2011 KBL 국내 신인선수 드래프트에 참가했다.



▲ 꿈 많았던 신재영의 도전, 아름다웠던 마무리
시작은 그저 미국 무대를 경험한다는 것에 만족하려 했다. 그러나 신재영의 재능은 그 이상을 바라보기에 충분했다. 선일초를 졸업한 신재영은 어머니 김화순 감독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신재영은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며 어려운 미국 생활을 이겨냈다. 머서 아일랜드고의 에이스로 올라섰고, 평균 17.0득점 4.2리바운드 3.2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김화순 감독과 깊은 인연을 가진 이은정 코치가 루이지애나 몬로 대학을 추천했고, NCAA 디비전Ⅰ 무대를 밟게 됐다.

그러나 문화적인 차이, 농구에 대한 이해가 달랐던 신재영과 루이지애나 몬로 대학은 궁합이 맞지 않았다. 2학년 때까지 올라서지 못했던 신재영은 결국 NCAA 디비전Ⅱ 험볼트 대학으로 편입하고 말았다.

김화순 감독은 “사실 미국으로 건너갔을 때, 큰 것을 바라고 가지는 않았다. 그저 경험을 쌓자는 생각에 갔지만, 시간이 길어졌고 또 잘 적응하는 것 같았다. 은정이의 도움으로 루이지애나 몬로 대학을 갈 수 있었지만, 아쉽게도 금방 떠나야 했다”고 말했다.

험볼트 대학에서의 신재영은 루이지애나 몬로 대학에서의 아쉬움을 떨쳐보낼 수 있었다. 디비전Ⅰ이 아니라는 설움은 있었지만, 2014년 한 해 동안 평균 11.3득점 4.6리바운드 2.2어시스트 및 CCAA(California Collegiate Athletic Association) 우승을 이끌었다.

험볼트 대학을 졸업한 신재영은 국내 리턴 의사를 밝혔고, 2016 WKBL 국내 신입선수 선발회에서 전체 5순위로 신한은행에 입단했다. 2017-2018시즌을 끝으로 은퇴했고, 이후 항공사 승무원으로 새 인생을 살고 있다.



▲ 네 번째 도전자 이현중, 그에게 전하는 조언
앞서 언급한 위대한 도전자들의 경험은 이현중에게 있어 귀중한 자산과 같다. 그들의 성공과 실패에 어떤 과정과 결과가 있었는지 미리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은정, 최진수, 신재영이 공통적으로 겪었던 문제는 바로 문화적 차이였다. 대한민국과 미국은 기본적인 생활부터가 다르다. 사람들 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대하는 태도의 차이가 크다. 기본적으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면 인정받을 수 없다. 또 선수들과의 신뢰 관계를 쌓지 못한다면 자신의 진가를 발휘할 기회조차 잡을 수 없다.

서정환 기자는 “최진수와 신재영 모두 미국에서의 생활에 완벽히 적응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적응하지 못해 힘들어했고, 그들의 문화에 녹아들지 못했다. 미국에서 농구로 성공하고 싶으면 농구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인 생활에 녹아들 수 있어야 한다. 대한민국처럼 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를 사귀는 것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마음 안에 문제를 쌓아놓고만 있으면 결국 터지고 만다. 이현중이 성공하기 위해선 농구도 중요하지만,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녹아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화순 감독 역시 “은정이나 재영이 모두 대한민국과는 다른 미국만의 문화를 굉장히 힘들어했다. 은정이는 어느 정도 극복했지만, 재영이는 그러지 못했다. 그들에게 있어 동양인들은 외부자나 다름없다. 그들과 동화가 될 수 없다면 정말 힘들 것이다”라며 “다행인 건 (이)현중이는 정말 강한 집중력과 높이 오르려는 의지가 있는 선수다. 어렸을 때부터 지켜봤지만, 정말 대단하다. 미국에서의 성공을 의심하지 않는다. 어려움도 있겠지만, 슬기롭게 이겨냈으면 좋겠다”라고 바랐다.

학점 관리 역시 NCAA 선수로서 성공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최근 들어, 성적 관리에 나선 대한민국에 비해 미국은 학생 선수 때부터 농구보다 성적에 더 엄격한 편이다. 물론 학교를 대표하는 선수라는 의미에서 어느 정도의 배려는 있지만, 기본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출전할 수 없다.

서정환 기자는 “농구와 문화적 차이에 성적까지 NCAA에서 성공하기 위한 조건은 너무도 많다. 특히 미국은 우리와 달라서 농구를 잘해도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출전할 수 없다.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학생 선수가 미국의 교육 문화를 이해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최진수도 그런 케이스가 아닌가. 미국에서 오래 지냈지만, 결국 성적 때문에 돌아와야 했다. 공부를 엄청 잘하라는 건 아니다. 커트 라인 정도는 통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전했다.

# 사진_점프볼 DB, 메릴랜드 대학 홈페이지, 루이지애나 몬로 대학 홈페이지
  2019-05-10   민준구(minjungu@jumpbal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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