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자발적으로 나가면 못 줘".. '이연성과급제' 악용하는 증권사

임주언 정진영 기자 입력 2019. 4. 29. 19:12 수정 2019. 4. 29.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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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91억 미지급, 3년간 6곳 소송

이현수(가명)씨는 A자산운용사를 퇴사하면서 성과급 600만원을 포기해야 했다. 입사할 때 썼던 서약서가 발목을 잡았다. 성과급을 3년 동안 분할·지급한다는 내용의 서약서에는 ‘자발적 퇴사자는 나머지 이연성과급을 받지 못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이연성과급은 일정 기간에 나눠서 주는 성과급이다. 월급이 300만원이 채 안 됐던 이씨에게 600만원은 적지 않은 돈이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이씨는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서약서를 쓴 게 불리하게 작용한다고 했다”며 “소송을 제기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고액 성과급 파티’를 막으려고 도입한 이연성과급 제도를 둘러싸고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퇴사한 직원에게 나머지 성과급을 주지 않는 규정이 금융투자업계에서 관행처럼 굳어진 탓이다. 최근 3년 동안 증권사 6곳이 이 문제로 직원과 법정 다툼을 벌이고 있다. 직원과 금융회사의 골이 깊어지고 있는데 금융 당국은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29일 더불어민주당 김병욱 의원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최근 3년간 6개 증권사가 직원 27명과 이연성과급 미지급 관련 소송을 진행했다. 그만큼 금융투자업계에 이 문제가 만연한 것이다. 증권사들이 지급하지 않은 이연성과급은 지난달 말 기준으로 91억원에 이른다. 대부분 ‘자발적 퇴사자’에 대한 미지급금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금감원의 추정이다.

이연성과급 제도는 당초 좋은 취지로 도입됐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단기 성과를 기준으로 하는 금융회사의 보상체계를 두고 거센 비판이 제기됐다. 고액의 성과급을 받으려고 단기 성과에만 집착하는 경영 행태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다. 이에 따라 투자 업무를 맡는 금융회사 임직원 등을 대상으로 성과급을 나눠 지급하는 모범규준이 마련됐다. 2017년에는 이연성과급 대상 등을 명확히 한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하지만 제도는 엉뚱한 방향으로 변질됐다. 임직원이 자발적으로 퇴사한 경우 이연성과급 지급을 중단할 수 있다는 규정이 끼어들었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많은 금융투자회사에서 펀드 정관이나 회사 규정 등으로 퇴직자에게 성과급을 주지 않아도 된다고 정해놓고 있다”고 전했다.

실례로 B자산운용사에서 펀드 운용업무를 맡았던 C씨는 퇴사 이후 성과급을 받지 못했다. 그는 약 180억원을 투자해 311억원의 수익을 거뒀다. C씨가 퇴사하자 회사 측은 “자발적으로 퇴사한 임직원에게는 성과급을 주지 않는다”며 성과급 지급을 거부했다. 지난 2월 서울남부지법은 C씨가 회사 측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성과급 7억5000여만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회사 측은 “C씨의 개별 투자에서 수익이 났을 수 있지만, 펀드 전체로 봤을 때 수익이 나지 않았다”며 항소했다.

이씨 사례도 제도의 본래 취지와 거리가 멀다. 관련법 시행령은 이연성과급 적용 대상을 운용담당자 등으로 정해놓고 있다. 이씨가 처음 입사해 맡은 일은 운용업무와 거리가 먼 ‘백오피스(후선 업무)’였다. 받지 못한 성과급 600만원은 고액 성과급의 부작용을 억제하려는 것과 동떨어진다.

금융 당국도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다. 다만 개입 의지를 찾기 어렵다. 이연성과급 제도의 준수 여부를 감독하는 건 금융 당국 소관이지만, 개별 근로계약까지 들여다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금융회사들이 이연성과급 관련 미지급금 규모나 사유를 금감원에 보고해야 하는 규정도 따로 없다. 금융 당국 관계자는 “성과급 지급에 대한 사안은 회사와 근로자 간에 자율적으로 하게 돼 있다”며 “이제 막 문제가 되고 소송이 진행되는 상황이라 현황 파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각지대’에서 근로자만 피해를 본다는 비난도 나온다. 입사할 때 ‘자발적 퇴직 시 이연된 성과급을 받을 수 없다’는 조항에 동의를 했다면 추후 소송을 걸어도 승패를 확신할 수 없다는 게 법조계 의견이다. 법무법인 예율의 홍한빛 변호사는 “금융회사들의 모럴 해저드를 막기 위해 도입된 제도인데 법적으로 미비한 틈을 노려 정당한 급여를 지불하지 않는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고 꼬집었다.

관련 판결도 엇갈린다. 회사 규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이연성과급을 돌려받는 경우와 포기해야 하는 경우로 나뉜다.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교수는 “회사 내규나 서약서를 통해 퇴사 시 성과급을 못 받는다는 동의를 받아내는 자체가 위법은 아니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금융투자회사의 이연성과급 지급규정이 자발적 퇴직자에게 불합리한 점이 없는지 금융 당국이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임주언 정진영 기자 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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