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이웃들 구하던 사이.. 그의 가족은 당했다

진주/고성민 기자 입력 2019. 4. 18. 16:50 수정 2019. 4. 18.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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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야!’ 지난 17일 새벽 4시 25분쯤 경남 진주 가좌동 한 아파트에 다급한 비명소리가 울렸다. 고성을 듣고 잠에서 깬 403호 주민 금모(44)씨는 직감(直感)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아내와 딸, 조카를 아파트 바깥으로 대피시켰다. 아래층 304호에 사는 부모님도 대피하도록 했다.

금씨는 갑작스런 상황에 놀라 눈이 동그래져 있는 열두살짜리 딸에게 "엄마랑 할머니랑 먼저 내려가 있어. 이따보자"라며 진정시켰다. 손을 흔들며 인사하던 딸의 뒷모습을 봤지만 그게 마지막이었다. 방화·살해범 안모(42)씨가 마구 휘두른 흉기에 목과 등을 찔린 딸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숨졌다. 안씨의 난동으로 목숨을 잃은 피해자 5명 중 가장 어렸다.

지난 17일 경남 진주시 한일병원 장례식장에서 만난 금모씨(오른쪽)와 금씨의 친구. /진주=최지희 기자

딸이 숨진지도 모른 채 금씨는 이웃 주민을 구하기 위해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불이야. 불이야"를 외치고 다녔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파트에 불이 난 줄 알았지... 살인 사건이 있을 줄은 꿈에도..."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였다.

금씨가 이웃을 구하던 사이 방화살인 피의자 안모(42)씨는 양손에 흉기를 들고 2~4층 계단에서 대피하는 주민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딸 뿐 아니었다. 안씨의 흉기로부터 딸을 지키려던 아내(41)도 옆구리를 찔렸다. 아래층에 살던 어머니(65)도 안씨가 휘두른 흉기에 목을 찔려 끝내 숨졌다. 조카(19)는 대피 과정에서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졌다. 아래 윗집에 살던 일가족 6명 중 4명이 숨지거나 다친 것이다.

한참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던 금씨는 아파트 계단과 입구에 피가 낭자된 것을 보고서야 ‘아!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졌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빨리 병원으로 가보라"는 이웃들 말에 눈앞이 캄캄해졌다고 한다.

슬리퍼를 신은 채 뛰어간 병원에는 아내와 조카밖에 없었다. 어린 막내 딸과 어머니는 피해자 명단 속에 있었다. 그 순간 금씨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래층에 살던 아버지는 다행히 대피했고, 수영 훈련 하느라 부산에 머물고 있던 큰 딸(15)도 화를 면했다.

합동분향소가 차려진 진주시 한일병원 장례식장 한 귀퉁이에서 금씨는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옆에 있던 친구 김모(44)씨는 "‘딸들 먹여 살려야 한다’며 일을 엄청나게 열심히 했던 친구다"며 "뒤늦게 가족들 소식을 듣고 제대로 말을 하지도 못할만큼 힘들어하고 있다"고 했다. 금씨는 5년 전부터 덤프트럭 운전으로 가족 생계를 책임지다가 최근 건강이 안 좋아지는 바람에 건설 현장 일용직으로 일하고 있다.

금씨의 금쪽같은 막내 딸은 평소 미술을 좋아해 미대(美大)에 가서 화가가 되는 게 꿈이었다고 한다. 금씨네가 살던 아파트 인근 미술학원 강사 이모(28)씨는 "(금양은) 그림 그리기를 워낙 좋아했고, 밝고 활발해서 친구들에게 인기 많은 아이였다"며 "금방이라도 금양이 학원문을 열고 인사할 것 같은데, 가슴이 너무 아프다"고 했다.

금씨 어머니와 딸의 목숨을 앗아간 안씨, 18일 살인과 방화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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