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장 대응·정보 부족·수어 통역 X..지상파 산불 재난 방송 '엉망'

김지혜 기자 2019. 4. 5.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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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지난 4일 KBS 뉴스 특보는 수어 통역 지원 없이 단순 화재 중계에 치중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KBS 화면 갈무리

지난 4일 저녁 강원 동해안 일대에서 ‘국가재난사태’급 대형 화재가 발생했지만 지상파 방송사들의 미흡한 재난방송으로 지역 주민과 시청자들의 혼란이 가중됐다.

특히 법이 정한 재난방송 주관방송사인 KBS는 이날 화재 발생 이후 4시간 여가 흐른 밤 11시25분에서야 본격적인 재난 관련 특보 체제로 돌입하는 등 ‘늑장 대응’으로 지탄 받았다. 뒤늦게 시작한 뉴스 특보에서도 장애인을 위한 수어 통역조차 지원하지 않은 데다가, 대피·구조 관련 정보 전달보다는 ‘관찰자 시점’의 화재 상황 중계에 치중해 재난방송 주관사로서 의무에 소홀했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이날 저녁 7시17분쯤 고성 산불이 발생한 이후 KBS 1TV <뉴스 9>, MBC <뉴스데스크> 등에서 관련 소식을 다뤘다. 문제는 정규 뉴스 이후 재난 관련 속보가 신속하게 방송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날 밤 8시45분쯤 불이 속초 시내로 번지면서 주민 대피령이 확대되는 등 사태의 심각성이 커졌지만 지상파 방송사들은 드라마·예능 편성을 그대로 이어갔다. 산림청이 산불 재난 국가위기경보 단계를 ‘경계’에서 최고 단계인 ‘심각’으로 격상한 밤 10시에도 마찬가지였다.

밤 10시 MBC는 수목드라마 <더 뱅커>를, KBS 1TV는 다큐멘터리 <시민의 탄생>을 정규 편성 그대로 방송했다. 실시간 뉴스 속보를 기다렸던 재난 지역 주민과 시청자들은 연합뉴스TV, YTN 등 뉴스 전문 채널에 의존하거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화재 상황과 대피 정보 등을 확인해야 했다.

4일 밤 10시50분쯤 한 누리꾼이 갈무리한 지상파 방송사 방송 현황. 재난 뉴스 특보를 방송하는 곳이 한 군데도 없다. 인터넷 커뮤니티 갈무리

KBS 1TV는 다큐멘터리 방영이 끝난 후 밤 10시53분부터 11시5분까지 짧게 뉴스 특보를 전한 후 다시 정규 편성 방송 <오늘밤 김제동>을 방송했다. MBC는 <더 뱅커>가 끝난 밤 11시7분 예능 프로그램 <킬빌>을 결방시키고 뉴스 특보 체제에 돌입했다. KBS는 밤 11시25분에서야 <오늘밤 김제동> 방송을 중단하고 뒤늦게 특보를 재개했다. SBS는 예능 프로그램 방송 도중인 밤 11시52분부터 58분까지 특보를 방영했다가 다음날 새벽 0시46분부터 산불 소식을 집중적으로 전했다.

현행 방송통신발전 기본법은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대처가 필요한 재난이 일어났을 때, 지상파·종편 등의 방송사는 재난의 대피·구조·복구 등에 필요한 정보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제공해 그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재난방송을 해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날 KBS·MBC와 YTN 등 뉴스 전문 채널의 재난방송은 재난 지역 주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대피·구조 정보보다는 제보에 의존한 화재 상황 중계에 집중돼 있었다. 속보 경쟁 속에서 오보도 나왔다. MBC는 속초의 가스 충전소가 폭발했다는 속보를 전했으나 후에 사실이 아닌 걸로 밝혀져 정정 방송을 하기도 했다.

MBC는 속초의 가스 충전소가 폭발했다는 속보를 전했으나 후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져 정정 방송을 하기도 했다. MBC 화면 갈무리

4일 재난방송에서 장애인을 위한 수어 통역을 지원한 방송사는 한 곳도 없었다. 이날 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는 페이스북에 “두 공중파 방송국(KBS·MBC)은 재난 속보에 수어통역을 지원하십시오”라는 글을 올려 문제를 지적했다. 전장연은 “속초, 고성 지역에 있는 분들이 위험에 노출된 상황이다. 그 중에는 청각장애인도 있을 것”이라면서 “그런데 국가재난주관 방송국인 KBS는 물론 MBC 등 공중파 뉴스 속보에선 수어 통역이 전혀 없는 상황이다. 장애인도 재난 속보를 듣고 안전해질 권리를 보장해 달라”고 주장했다. 재난방송 주관방송사 KBS는 노약자, 심신장애인 및 외국인 등 재난 취약계층을 고려한 재난 정보전달시스템을 의무적으로 구축해야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수어 통역조차 지원하지 않은 것이다.

누리꾼들은 방송사들의 안일한 재난 대응에 대해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5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많은 국민들이 지방에서 발생된 재난을 속보로 전하지 않는 방송사에 크게 분노하며, 불안함에 떨며 살아가고 있다”면서 “국가적 재난 발생 시, 각 방송사에서는 진행 중인 방송을 모두 중단하고, 해당 재난에 대한 속보 방송을 편성하길 요청드린다”는 글이 올라와 낮 2시30분까지 2827명이 서명했다. 청원인은 방송사의 미흡한 대응이 “서울특별시 및 인근 수도권 지역을 벗어난 재난이라 그런거냐”며 수도권 위주의 언론 보도 행태를 꼬집기도 했다.

이날 KBS 시청자청원 게시판에도 “재난민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재난방송을 하라”는 청원글이 올라와 191명이 동의했다. 이 글을 올린 시청자는 “대피 요령을 반복해서 보도하고 대피소 현황을 자막으로 알려야 한다. 재난 발생시 바로 수어 통역이 나갈 수 있도록 재난 유형별로 미리 촬영해 송출하라”면서 KBS가 재난방송 주관사로서 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KBS는 이날 “재난방송 주관방송사로서 재난방송 매뉴얼 비상방송 지침에 따라 특보 체제를 갖춰 피해 내용과 규모, 확산 속도 등에 따라 단계별로 재난방송 수준을 조정, 확대해 나갔다”면서 “지상파 방송사 중 가장 빨리 뉴스특보를 실시한 뒤 생방송 <오늘밤 김제동>에서 속보를 이어 전하려 했으나 현장 상황 악화로 본격 특보로 전환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김지혜 기자 kim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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